@@Noname48003 전두환은 치세에도 동탁짓을 한 사람인데.. ㅋㅋㅋ 그리고 웃긴건 동탁도 자기 사람들에게는 ㅈㄴ 잘함. 그래서 하극상 안 당함. 자기 재산이나 다름없는 시녀 건드린 여포가 예외였을 뿐이고, 심지어 그거조차도 여포가 이미지가 다르게 하남자에 쫄보같은 놈이라 선빵친거에 가까움
유비가 갔던 곳마다 민심이 바뀌는 패턴을 보면 '애교'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준이 아닌데... 내가 아무리 mbti기준 극 T인 사람이어도 다른 사람들이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 과연 당시 '모든' 백성들이 조조군에게 민둔으로 잡혀가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죽을지도 모르는 피난길을 갔을까... 진짜 그런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민중들이 움직였다면 요즘 유행하는 mbti 기준은 싹 다 갖다 버리고 초기화해야지. 조조도 동탁이나 원소보다는 훨씬 인간미가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최소한 식자들은 잘 모였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으로 흡인력이 있었던 게 유비인데, 인의군자라는 보기 좋은 단어는 갖다 버리더라도 당시 군웅으로서는 누가 뭐래도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건 부정 못하고, 그걸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그의 숙적 조조였음. 세력은 잘 안 생겨도 그냥 가는 길 하나하나가 족족 조조의 바로 앞을 막는 격이라, 거기에 생존력은 좀비 저리가라 수준이니, 내가 조조였으면 트라우마 생겼을 것 같다 싶음. 그러니까 호표기 5천이 공세종말점을 아득히 넘어선 추격도 했었던 거겠지... 그러다 장비한테 막힌거고.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유비가 정치적 식견이 남달랐던건 채널장님의 의견에 크게 동의합니다. 하지만 유비가 싸움에 지고도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이 그를 다시금 찾아오거나, 서주에서 대효도 중인 조조군에게서 서주 백성들을 구한 일화, 무엇보다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그야말로 모셔가는 모습까지. 그 당시 군웅들 중에 가장 특이한 캐릭터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즉 인의따위 잘 챙기지도 않던 당대 군웅들 가운데 독보적인 점을 가진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또한 익주점령 역시 저는 인덕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는 유비였기에 가능했을거라 봅니다. 무엇보다 유비와 그의 군은 큰 전투나 저항없이 민심과 호족들을 달래가며 꽤 단기간에 점령을 완수해냅니다. 이것은 유비의 야망에 의한 사건이었으나 다른 군웅들이 익주를 점령하려 했을 때 과연 유비군 만큼 민심을 얻으며 행군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유비는 익주점령 직후 바로 한중공방전을 통하여 조조를 축출해내는데 성공까지 해냅니다! 인덕을 통한 민심확보가 아니었다면 이게 가능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비는 야망이 있던 당대의 군웅이었으나 분명 당대의 다른 영웅들과는 달랐던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ISAMIT-18 유장은 익주에서 그 아버지부터 따지면 2대에 걸친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수십년이죠. 당신의 말 역시 맞습니다. 걍 유장을 못믿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갑툭튀한 유비를 뭘 믿고 익주를 맡기나요? 당신이라도 갑툭튀한 옆동네 군벌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습니까? 익주 호족들이 수십년간에 걸친 통치로 익숙한 유장과, 갑툭튀 군벌 유비 중 유비를 선택한건 역시 유비 그 자신의 인덕이 아니면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유비의 또 다른 뛰어난 능력은 사람 볼 줄 안다는 점 같습니다.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는 의견은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여하튼, 평화로운 시기에는 그냥 짚신이나 팔다가 끝났을 인물이 황제까지 해먹고 역사에 기록을 남겼으니... 난세에 대단한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요.
삼국지 읽다보면 초장에 장세평과 소쌍은 딱 삥뜯긴게 아닌가 느낌이 들거든요. 중국드라마에서 어질게 생긴 분들이 유비 역으로 나오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유덕화 같은 마스크가 고조나 소열제 이미지에 맞지 않나 싶구요. 익주를 얻고 나서 가볍게 기뻐하는게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는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좋은 내용 잘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 의아한 것이, '유비가 입촉해서 성도를 함락하고 잔치를 열었는데' 부분의 일화입니다. 방통은 성도 함락 전에 촉 공략 중 낙성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성도 함락 후에 함께 잔치를 열 수 없었을 텐데, 오류가 아닐지요? 확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바꿔말하면, 서주백성 30만이 살해당하는 지옥도에서 난민 수천명을 거둬서 보호하고 신야에 있었을때, 조조의 남하로 겁에질려 유비에게 의탁한 형주백성 10만명 이상을 기어이 다 데려서 강하까지 간거 이게 전부 "이해득실 계산 다 끝내고 진행시킨 일이란 말이네요" 이정도면 진짜광기 아님?
연의 덕에 이미지 논란이 여전히 이어지는 인물이죠 연의와 달리 군재와 싸움도 탁월했다는 재평가를 밀어붙이기에도 연의의 바탕이 된 인과 덕을 버리지 않으려는 행보도 많이 보여서 한 마디로 확 정립하기 힘든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여전히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마 입체적인 인물상으로 가장 이해하기도 힘든 동시에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영화-w7p유장 통수쳐서 서천뺏은건 인의예지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되요. 원소가 기주 탈취한 방법 그대로입니다. 손권이 형주반환 요구했을때 양주를 취하면 반환한다는 어이없는 답변도 인의예지가 아니죠. 그걸 나쁜짓이라 지적하는게 아닙니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죠. 그러나 다른 군웅과 별반 다를게 없는 사람을 인덕 좋다고 평가하는건 단순한 팬심 이상이 아니라 보네요.
손찬이형 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게임으로만 삼국지를 접했거나 유비를 연의와 정사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은 마냥 후덕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 정사의 선주전을 꼼꼼히 살펴보면 덕장보다는 효웅에 가까운 사람이 바로 유비입니다. 빨리 유비 2편 올려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아, 그리고 정사에는 없지만 관우의 부장이었던 가상의 인물 주창에 대해서도 다뤄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조랑 유비는 사실 막역했습니다. 조조가 연주에 자리잡기 전 초기 예주에 군사를 모을때 함께 했으니까요 동탁 토벌하러 모일때도 사실상 조조 밑에서 함께 왔다고 보는게 맞구요 그래서 나중에 여포에게 군사 다 잃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항장 내지 객장으로 온 유비를 군공높은 측근들도 못한 사방장군의 필두인 좌장군과 예주 자사를 준것도 그 이유죠
아무리 전략적 행동과 정치질의 달인이었어도 끊임없이 참고 명분 없는 행동을 안하는걸 50살 넘어서 까지 안한다는건 미친 비범함임ㅋㅋ 그 절정이 장판파고.. 아무리 계산이어도 5천 기병 달려오는데 그걸 안도망가다니.. 연의 관우로 입문해서 정사 조조에 놀라고 유비에 더 놀랐음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서 묘사된 중세 중국인 취향의 유비에 질려서 반작용으로 조조를 재평가하게 되는데, 정사를 잘 읽고 나면 유비 역시 조조가 두려워했을만한 능력에 패도와 명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는 행보, 조조에겐 없는 인간적 매력까지 있어서 다시 촉빠가 될 수밖에 없음
한 고조 유방 마냥 유비도 술 좋아하고 거의 거렁뱅이 수준으로 놀기 좋아했다는게 정사 기록임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싸움도 ㅈㄴ 잘했고 관우 장비가 형님으로 모신 이유가 인덕이 아니라 유비 특유의 호걸 성격 + 싸움 실력이라고 정사에 나옴 그리고 평원 그 촌구석에서 돗자리를 짜긴 했지만 사람 보는 눈이 ㅈㄴ 좋아서 마속을 중용하지 않고 장비 제끼고 위연을 한중 태수로 임명하고 법정을 황충한테 붙여주기도 했지 유방이 좀만 태생 기반이 좋았었으면 조조 원소 씹어먹고도 남았을듯
손찬이형이 설명해준 유비의 보스 기질과 추정하는 관상을 고려해보면 제갈량의 삼고초려의 진실은 어느 날 갑자기 제갈량에게 좌 장비, 우 관우를 떡하고 데리고 온 보스포스를 내 뿜는 유비가 찾아와 내 밑에서 일하라는 압력을 계속 주는 것을 버티고 버티다 세번이상 거절하면 산채로 땅속에 파뭍힐까봐 두려워 제갈량이 세상으로 나온 것입니까?
삼고초려도 실제로는 유비가 '내 밑에 들어오면 살려는 드릴게'에 가까웠겠지. 시대가 북두의 권이나 매드맥스 못지않은 무정부상태였고,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러 갈 때, 동행한 사람이 무력으로 이름난 관우, 장비였고, 표준어가 있는 지금도 서로 다른 언어로 볼 수 있을만큼 지역마다 말이 달랐던 중국의 특성상 유비와 제갈량이 서로 말이 통했을 가능성은 낮으니 주먹맛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정사가 아니고 삼국지연의를 보고 설명하는 건가 아무튼 삼국지에서 인덕으로 탑에 포함된 군주인게 확실함. 초반 유우나 이런 사람 빼고. 원소, 여포, 원술, 조조, 손책.손권, 누구와 비교해도 유비가 제일 인덕이 많음. 물론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것처럼 무른 성격이 아니었지만.
연의의 이미지랑 다르게 원소처럼 직언 받는걸 매우 싫어하던 타입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번에 조운편하셨을때 조운이 요직을 못받은 이유가 직언을 자주해서 눈밖에 났다는 식으로 얘기하신것처럼 유비 밑에서 직언을 한 사람은 방통 한명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였고 성격 더러운 법정도 우회해서 말했을 정도였으니
독우에게 뇌물을 주면 효렴으로 천거가 가능하긴 매우 어려웠을겁니다. 효렴은 지방관이 추천 가능하고 독우도 태수의 감찰관이긴 하지만. 효렴은 서로의 일가를 추천해주는 품앗이 전략이 성공 모델이 되는 면이 강합니다. 후한 말도 그렇고. 고려의 음서제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명문가라는 집안 스펙이 중요해지는 거구요. 추천을 받은 만큼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추천권이라. 그에 반해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은 후한 말 영제의 시기엔 환관을 통해 주로 이뤄졌으니. 독우를 통해서 매관매직이 일어나긴 좀 어려워보입니다. 좀 잘못된 추론이 아닌가 합니다.
독우에게 뇌물을 준다고 효렴으로 추천받긴 어려워도. 파면당하지 않기 위해 뇌물을 준다거나 하는 의도는 유비가 가졌을 수 있습니다. 워낙 해석이 다양할 수 있지만. 효렴 추천은 태수급 인사들이 서로의 관직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품앗이 하는 면이 강하니 독우에게 뭘 줘도 어렵겠죠. 그럴만한 재산이 유비에게 있지도 않고.
이게 사실 유원기 이야기 잠깐 지나가서 그런데 유비가 노식한테 배우러 갈정도면 살만 했을거다라는 이야기보다 가난 했다가 맞을수도 있을법 한게 저 때 당시 자기 친적이라도 그래 해줄만 하다 하면 지원했다 라는 이야기가 꽤 있는걸로 봐서는 실제로 유비가 가난 했는데 유비 어머니가 뭐 친척의 지원을 받아서 유비를 공부시켰다 로 볼수도 있을법 함. 지금 같은 세상이야 내 친척, 사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 보여도 잘 되는건 지가 알아서 할 일이다 하는 생각들 많이 한다 쳐도 저때 당시에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았던거 같음. 유비 배우러 가는것도 유원기 이야기 보면 유비 집 자체에는 돈이 없으나 주위에서 도움 받아서 간게 아닌가 하는 생각 해봅니다. 그럼 유비가 살만 했다보다 가난 했다는 말이 맞을수도 있지 않은가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