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전쟁 몰아보기] 시간순삭 고구려 VS 백제 VS 신라 그리고 나당전쟁까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한반도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전쟁 #역사몰아보기 #나당전쟁 #역사순삭 #고구려백제신라정리 #삼국시대정리 #역사10분정리 #한국역사 #역사이야기 #역사다큐멘터리
지금 전쟁에서도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진입로를 뚫어 무기와 식량을 이어주는것이였다 아무래도 배급이 끊겨버린다면 제대로 싸울수가 없으니 그래서 예전 고구려 수나라 시절 수나라가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왔을때도 그 배급로를 잘 막앗기고 또 백만대군이긴하지만 그중 진짜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러다보니 결국 수나라는 무너진것이겠지 물론 당나라때 결국 무너지게되지만 하지만 너무나 아쉬운것은 신라가 조금만더 욕심을부려 만주까지 내려갔다면 어떻게되었을지 모르지 물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고 난후 다시 찾긴하였으나 아쉽긴하지 머 지금은 한반도가 반으로 뚝 짤려져 있지만 ㅋㅋㅋ
@@user-bg6ig9hw3g 본격적인 삼국 통일전쟁에서 당나라까지 합세한 태종무열계 신라중대시기~문무왕까지 드라마틱한 전쟁의승리 이에 뒤를이은 신문왕의 군사 경제 사회 에 과감한개혁 자기장인을죽이고 왕비까지 내쫓고 통일전쟁의승리에 지분을요구하는 진골 귀족들을 과감히 숙청하고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이방원 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뛰어난 명군주였음 실질적으로 통일신라를 확실한반석위에 세웠고 그뒤 ~성덕왕거쳐 경덕왕까지 우리역사상 가장 강대했던시기 이시기는 동북아전체가 평화의시대였기도했음 제대로된역사가들은 이시기를 우리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성기로 보고있음
교과서 교육은 초중고면 족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디에 살던 민족인지 진짜 알필요가 있습니다. 민요인 아리랑만 보아도 우리는 아리랑, 아라리요 같은 단어 의미도 모르고 쓰지도 않지만 우리완 다르게 쓰고있는 민족도 있다고 다큐멘터리에서는 말하더군요. 바이칼호수 근처의 민족이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이고 단어뿐만 아니라 전래동화도 비슷하고 사람 생김새도 비슷하다고요.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게르만민족이나 노르만족, 흉노족의 이동처럼 우리도 민족 이동으로 지금 한반도에 정착한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교과서는 내용을 중간중간 빼먹은것같은 느낌이 많이 듭니다. 끝으로 삼국지 도스게임했을때 요서지방은 중국땅이 아닌것으로 나오는데 영상속의 지도에서는 중국땅이네요. 중국땅은 전진의 글자위 강줄기까지로 나오거든요..
현재 영상에서 언급하는 한국 교과서가 주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와 구당서, 신당서, 요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영토는 완전 다르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백제 한강 유역 포기설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기원전 6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 현대 교과서에는 백제의 첫 도읍지가 인천 또는 경기도 어디쯤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말갈이 북한 개성에 있었고 낙랑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었다는 소리가 되요. 그런데 교과서에는 낙랑이 북한 개성에 있다고 나오고 말갈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완전 엉터리 뒤죽박죽이죠.
@@livingdead210 @리빙데드 아하, 재미있는 말씀을 해주셨네요. 이미 윗 댓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구당서,신당서, 요서, 금사에도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개의 고서들에서는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현대 교과서에서만 다른 내용을 주장하는 상황이예요. 교차검증에서 여러개는 일치하지만 하나만 다르다면 그 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고, 그 책이 바로 현대 교과서라는 뜻입니다. 모든 문헌 내용들을 일일히 다 복사해 오기에는 자료가 너무나도 많아요. 말이 나온 김에 삼국사기와 요사 지리지를 살짝 비교해 볼까요? 일단 평양성과 낙랑의 기록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죠. 고서들을 종합해보면 1세기에 고구려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곧바로 한나라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세웠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현대 교과서와 삼국사기, 구당서,신당서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5세기 초반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대방(帶方)지역 이름이 언급되는데, 391년에 승하한 광개토대왕때의 4세기 말에 장악했다는 대방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한번 볼까요? ..........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14년(404년) 갑진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ㅡㅡ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현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군, 왜군이 싸웠던 대방이 현재 북한 황해도 지역이라고 주장하죠.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는 뭐라고 나올까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기원전 28년에 낙랑이 혁거세 거서간때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남해 차차웅 서기 4년, 14년 또 낙랑이 쳐들어오죠. 아주 가까이서 자주 싸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245년때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 그리고 서기 300년때 낙랑과 대방이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바로 뒤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다시 낙랑군과 대방군을 침략하여 되찾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국정교과서에 신라는 6세기에 와서야 신라가 한반도 중부 한강 지역까지 진출했었다고 주장하는데, 300년에 이미 신라의 영토가 낙랑, 대방 지역까지 맞닿아 있었다는 뜻이네요. 국정교과서 주장대로 백제가 한강 지역에 있고, 낙랑과 대방이 현대 북한 황해도에 있었다면 이때 당시 신라가 백제보다 영토가 더 컸다는 말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직접적으로 낙랑과 대방 영토들이 고구려의 동남쪽이라고 하고, 신라의 북쪽이라고 하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 있던 지역임은 분명하죠. 자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측 기록에는 뭐라고 나올까요?
@@livingdead210 @리빙데드 글을 길게 써서 그런지 글이 삭제됐네요, 짧게 편집해서 다시 씁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북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낸 곳이 평양성이요, 요나라 동경이다. 그 외성을 한성이라 한다. 철주는 안시현이다. 고구려 안시성이다. 안시성은 동경(평양성)에서 서남 방향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신당서 동이 고려 고려의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고려왕은 평양성에 거하는데 장안성이라 하며 전한의 낙랑군 자리이다. 산의 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 외성이 된다. 남쪽은 패수이며 왕궁을 패수의 좌측에 축궁했다. 또 국내성, 한성이 별도 도성이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한漢이 (고)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평양은 낙랑땅이다. 동진 의희(405~418)이후에 장수왕이 평양성에 거했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정벌했는데, 그 나라가 압록수의 동남 천여리로 이동하였다(여기서 압록수 동남은 왕건의 고려를 뜻함). 옛 평양이 아닌데도, (고려왕) 왕건은 이동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낙랑과 대방은 원래 같은 지역의 북쪽과 남쪽을 뜻하는 것입니다. 쉽게 검색이 되니 굳이 출처를 가져오지는 않겠습니다. 자, 중국쪽 기록에는 낙랑에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 있었다고 나오고, 그게 바로 요나라때 동경이라고 나오네요. 요나라 동경은 만주 남쪽, 현대 중국 랴오닝성입니다. 한국 역사 교과서에는 평양성이 북한 황해도에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livingdead210 조선왕조실록을 한번 볼까요?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3월 21일 무오 1번째기사 평양 소윤(平壤少尹) 송저(宋儲)가 요동(遼東)에서 보낸 동녕위(東寧衛) 천호 김보(金寶)가 가지고 온 칙서를 전해 받들고 행궁(行宮)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복기대 인하대 교수의 인터뷰입니다.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 평양 아닌 중국 랴오닝성”2015년 6월 2일, 중앙일보 남의현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명나라 때 조선인으로 구성된 동녕위(東寧衛)와 평양의 관계를 규명해 주목받았다. 동녕위의 동녕이 지금의 랴오양 부근이며, 랴오양이 평양으로 기록되는 사료가 속속 나타나고 있음을 『봉천통지(奉天通志)』 등 사료를 활용해 검토했다. 답이 나왔죠? 고대 평양성이 있던 낙랑과 대방은 북한 황해도가 아니라 현대 만주 지역입니다. 3세기 신라의 영토가 현대 중국 랴오닝성까지 닿았다는 증거입니다. 원사 지리지에 나오듯 현대의 평양은 왕건 고려시대때 옮겨왔던 지명이예요. 그리고 그것을 이전 삼국사기 기록과 비교한다면? 초기 신라의 영토가 한반도 남쪽이 아니라 한반도 저어어어기 북쪽 어딘가에 위치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길림성이 초기 신라의 위치였던 것 같아요). 신라가 한반도를 차지한 것은 가야를 점령하고 백제가 멸망한 이후부터예요.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은 뭐냐! 라고 하실텐데 그건 통일신라 이후 유물들이죠. 3,4세기 이전의 백제와 신라 유물들이 한반도에서 거의 나오질 않고 있는 이유는 간단해요, 3,4세기 이전까진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남쪽까지 진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 말씀드릴까요?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한 고대사에서 일컫는 왜군이 사실 가야를 뜻한다는 것 ㅋㅋㅋ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이 바로 가야인들이었고, 고구려 같은 만주나라들은 왜인과 가야인들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걍 다 왜인이라고 생각했고, 신라와 고구려 때문에 세력이 크게 약화된 가야연맹이 일본열도로 옮겨와서 백제와 연합한게 바로 야마토 정권이었다는 것. 일본 고분시대 유물들이 몽땅 한반도인들의 유물인것만 봐도 답이 나와요. 한민족의 특징이라고 알려져 왔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일본 고분들에서 자꾸 출토되니 일본에서 고분연구를 금지 해놨죠 ㅋㅋㅋㅋ
솔직히 측천무후는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에 만주땅을 차지하고 하겠지만 결국 거란의 반란으로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도망을 가면서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을 끌고 가서 동모산에 발해를 건국한 것만 봐도 거란의 반란을 막지 못한 측천무후가 얼마나 대외전쟁에 안좋은 여황제인지를 알수 있는 상황이지요. 그 후 측천무후는 북쪽에 있던 돌궐도 못 막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나 엉망이냐면 기원전 4-5세기 유방항우에 한신등 대부분의 장수가 자세하게 나오고 더욱이 그전에 진나라의 여불위 백기등이 모두 자세하게 나오는데 600년대에 자료가 없다니 한심하기 짝이없다...기벌포해전에 영웅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1100년 고려시대 척준경도 제대로 모르고 개판이다 개판...아직도 요동이 고구려 땅인지 아닌지 동북9성이 어딘지도 모르고잇다니..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중국과 일본에 침략을 많이 받다보니 외세에서 태우거나 손실시킨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중국은 내전이 많았지 수도가 외세에 의해 침략당한 역사는 많지 않으니까요 일본도 마찬가지이구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으로 수도가 여러번 함락되다보니 역사서가 많이 보존이 안된것같아요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고 보기보다 반도의 특성상 그 많은 외세의 침략을 견디고 지켜낸 역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사이에서 살아남고 이렇게나 발전한게 대단한거 아닐까요 특히 일본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저희 역사유물 손실을 대놓고 자행했죠 개새끼들
역사를 볼 때 사료와 유물만을 가지고 이야기 합시다 밑에 댓글보니 민족이나 국뽕을 가지고 과거를 보려다보니 음 글쎄요... 통일이니 민족성이니 특정 목적으로 역사를 보면 왜곡 우려가 큽니다 중국 일본이 그렇죠 그냥 역사를 살펴보고 그것 자체에서 의미를 살펴볼 수도 있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 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특정 사료 유물 해석에서 왜곡되는 현상이 흔하게 나타나네요
역사는 여러가지 사료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당나라를 연구하는 서양 학자들에게 나당연합이라고 하면 무슨 얘기인지 이해를 못 할 겁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알겠지만 강대국이라도 남의 나라 전쟁에 군대를 투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를 속국으로 여겼고 신라왕이라는 직위도 당나라가 봉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속국을 공격하는 백제에 군사적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백제와의 전쟁은 당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에게는 병참 임무만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신라가 당시 백제의 그 어떤 성도 포위하거나 공략했다는 기록이 우리 쪽이던 중국 쪽이던 아예 없어요. 소정방이 길길이 날뛰었던 이유도 시킨 게 달랑 병참인데 그것도 제 때 가져오지 못한다고 노발대발한겁니다. 그리고 백제를 멸망시킨 후 웅진 도독부와 계림 도독부를 두게 되는데 이 도독부라는 호칭이 가지는 의미가 큽니다. 나중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고구려 땅에 안동 도호부를 두는데 당은 총 6개의 도호부를 운영했습니다. 도호부는 과거에는 하나의 국가였지만 지금은 당의 속지가 된 영토를 의미합니다. 반면 도독부는 일종의 군사 기지의 의미를 갖습니다. 한마디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 거점으로 재편성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봉합니다. 당의 입장에서는 속국인 신라왕에게 관직 하나를 더 주어 고구려 정벌에 관련한 임무를 추가한 거고 그 주된 임무가 병참, 즉 옛 신라 땅에 주둔하는 당군의 식량, 의복 및 기타 물자를 원활하게 제공하는 것이었죠. 이걸 잘 보여주는 게 664년 당 고종이 유인궤를 다시 당으로 불러들였을 때 지금은 고구려 정벌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시점이므로 웅진 도독부를 아직 떠날 수 없다고 올린 장계입니다. 나중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고구려 정벌 이후 대부분의 병력이 빠진 웅진 도독부를 상대로 영토 확장을 꾀하자 이에 분노한 고종이 문무왕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대신 김인문을 새로운 신라왕으로 봉하여 그를 신라로 보내려 하자 문무왕이 용서를 빌며 많은 공물을 보냈고 이에 고종이 문무왕의 작위를 복위하고 김인문을 보내는 게획을 취소하였는데 이 때 김인문을 호위해서 신라로 가는 임무를 맡은 게 이근행입니다. 당쪽 기록을 보면 이근행은 말갈족 군사를 이끌고 호위 임무를 맡았고 김인문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그대로 신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때까지 당은 신라에는 당군을 주둔시키지 않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신라에도 당군을 주둔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이 바로 매소성 전투의 그 당군입니다. 당시 당군이 20만이라고 하는데 그건 당의 정세나 대외적인 상황 상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수치이며 말갈군의 경우 당시 북쪽 전선에 이미 투입된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만이 되지 않았습니다. 구지 이런 얘기들을 하는 건 중국이나 일본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미화 왜곡하는 모습이 지식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꼴불견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거기에 예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제와 벌인 황산벌 전투는 왜 무시하시는 가요! 왜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하시는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읽어 보시지요! 거기에 얼마나 많은 전투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착각하시는 데, 삼국 통일이후, 나당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데, 왜곡이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중국이 모든 역사를 기록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을 빼는 것이 중국 기록 방식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또한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확대 해석도 잘못이지만, 자기 비하적 역사도 주의 해야 합니다. 고대 역사는 아직도 연구 진행중입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선사시대, 고대시대 까지만 하더라도 고조선 여성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당들로써 지도자 역할을 했었고,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여성들도 전쟁터에 나가서 왕 대신 갑옷을 입고 선두 역할을 하는 등 우리가 아는것 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회적 역할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를 건국했던 소서노가 아들 둘이 있는 상태에서 고주몽이랑 재혼을 했으며, 고구려에서 유민들을 이끌고 따로 분리해 나왔을때도 소서노가 우두머리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유교보다는 불교 세계관이 더 강했기에 이때까지는 남자가 위고 여자가 아래라는 중국 유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요. 특히 기마민족 전쟁국가였던 고구려쪽 기록에서는 여성들이 수군을 지휘한다거나 성을 방어한다거나 하는 전투적 활약들이 자주 나오기에 현대시대 생각하는 고대 여성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세계 인류역사에 모두 공통적으로 선사시대에는 농사에 중요한 날씨를 예측하는 능력이 최우선이었는데, 고대시대로 들어오며 먹거리가 해결되니 이제는 늘어나는 인구수와 그에 따라 필요한 땅과 자원을 가지고 서로 전쟁과 전투를 해야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남성 리더들이 월등히 더 많아지기 시작한거죠.
@@OYT0724 전 신라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말한건데 고구려는 왜나오고 선사시대 고대시대는 왜나오는지 모르겠군요 님이말하는 고구려도 소서노가 리더쉽이 뛰에나서 졸본군장을 했어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황후가 된게 전부입니다 비류와 온조를대리고 나온건 예소야 부인이 돌아와서구요 고구려에서 나와도 왕을못했죠 상대적으로 고대시대에는 유교사상과 별개로 전쟁이 잦던시기라 전쟁터를 지휘할수있는 체력이 겸비된 그리고 누구나 믿고 따를수있는건 남성이기에 남성이 왕을 여성이 황후가 보편적이였죠 고대시대에도 호모에릭투스때 결혼이라는 문화가생겼을때도 남성은 가정을 외부로부터 지키고 여성은 육아와 가사일을 전담했죠 그건 인류가 진화하며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충실했던겁니다 그런 상황속에 신라는 골품제라는 특수성때문에 여왕이 나올수가있었던거죠
@@kimkimkimkim7184 @kimkimkim kim '골품제가 없었다면 여왕이 나올 수 없었죠' 라는 말씀을 하셔서 신라 뿐만 아니라 주변 삼한국가들과 고조선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었다고 설명해 드린 것 뿐입니다. 같은시대 당나라에서도 측천무후라는 여왕이 있었죠.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한것도 아닌데 굉장히 공격적인 말투를 쓰시네요. 님에게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서 더이상 반응은 하지 않겠습니다. 병원 한번 가보세요.
결국 고구려 백제는...내분으로 망한거네요...성문을 열어주다니...아무리 그렇지...신라가 통일한 결정적 이유중에 하나는 불교로 국가가 똘똘 뭉쳤기 때문이죠...신라가 통일하는데 큰 역활한 분이 원효대사 입니다..! 그러나..안타까운건...고구려가 통일을했으면 지금만주까지 우리땅이였을텐데.. 북한이 왜 저렇게 버티는지 알겠음..미국아니면 우린 북한에 먹혔을수도 있음... 개인적으로 신라가 당을 끌어들인건 큰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ㅠㅠ그이후로 우리나라는 중국속국이 되어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디테일한 역사 설명 감사합니다~!
애초에 80년전에 한번 싸운 북한이랑도 죽일듯이 보는데 몇백년 동안 치고박고 싸웠는데 한민족 개념이 어디있음 신라가 당이랑 손잡은것만 민족주의 사관이 지배한 지금 비난 받는데 고구려도 말갈이랑 손잡고 신라 공격했고 백제도 일본 가야랑 손잡고 신라 공격했음 여기서 묻고 싶은건 신라가 뭐가 문제냐는거임
그 같은 민족이란 개념자체가 그전에는 없었어 저 멀리 고조선 까지 간다면 어땠을지 모르나 예맥족이 주류인 고구려와 백제였고 마한 진한 변한의 한韓족 이뤄진 신라는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봤는데 무슨 같은 민족타령하지?통일신라때 백제 고구려 멸망시키고 통합해야 하니깐 융합정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고려와 조선까지 되서야 같은민족 한민족이라 불렸던건데 지금의 개념으로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안됨
대방군과 낙랑군은 요동과 요서의 사이에 있습니다 지금의 개성 지역은 최리의 낙랑국입니다 그 밑으로 대방국의 땅은 백제가 흡수 하고 낙랑국은 고려에 복속 절대 중국의 잔존 세력이 아님니다 낙랑국과 대방국은 조선의 한족이 대다수 옛 고조선의 인구 중 대표 민족이 예족 맥족 한족 그 이외에도 수많은 민족이 있었죠 여기서 한족은 중국의 한족이 아님
낙랑군이 그곳이라면 그곳에 최리라는 왕이 어떻게 존재하냐 한나라의 군현이고 그 나라에서 임명한 왕이라더냐 허면 한나라의 유적이 발견 되지 않는 이유는 뭔가 한나라와 조선이 전쟁을 했으나 조선이 수성을 잘하였다 하지만 수십개월 잘 막아내었지만 왕검성의 식량은 바닥을 보이고 신하들과의 의견대립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지켜내자는 쪽으로 양분되고 허나 굶주림에 하나 둘 전쟁을 끝내는 쪽으로 가닥 저희 조선의 신하들이 왕을 잡아다 한나라에 바치면서 조 한 전쟁 마무리 이들 한나라가 이미 왕까지 잡았는데 압록강과 대동강 이남까지 내려와서 지금의 평양 지역에다 한사군을 설치하냐 하나만 묻지 조선의 왕검성이 어디인가 그 성에서 조선 왕을 잡아 놓고 더 남쪽으로 내려올 얼간이가 어디 있나
@@maple4801 낙랑군이 그곳이라면 그곳에 최리라는 왕이 어떻게 존재하냐 한나라의 군현이고 그 나라에서 임명한 왕이라더냐 허면 한나라의 유적이 발견 되지 않는 이유는 뭔가 한나라와 조선이 전쟁을 했으나 조선이 수성을 잘하였다 하지만 수십개월 잘 막아내었지만 왕검성의 식량은 바닥을 보이고 신하들과의 의견대립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지켜내자는 쪽으로 양분되고 허나 굶주림에 하나 둘 전쟁을 끝내는 쪽으로 가닥 저희 조선의 신하들이 왕을 잡아다 한나라에 바치면서 조 한 전쟁 마무리 이들 한나라가 이미 왕까지 잡았는데 압록강과 대동강 이남까지 내려와서 지금의 평양 지역에다 한사군을 설치하냐 하나만 묻지 조선의 왕검성이 어디인가 그 성에서 조선 왕을 잡아 놓고 더 남쪽으로 내려올 얼간이가 어디 있나
당시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 지방군이 요령강 일대 요동지역에서 방어를 하려 했으나 당나라의 말갈족출신 장군 이근행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괴멸되어 대동강 일대까지 후퇴해서 만주땅을 잃은걸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발해가 이를 회복하고 발해는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우리역사에서 만주땅을 영영 잃게됩니다
구당서, 신당서, 요사, 원사 등등을 읽어보면 신라가 낙랑과 대방의 요동성까지 차지했다고 나와요, 그리고 낙랑에 평양성이 있다고 기록들에 나옵니다. 또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가 평주로 밀려났다고 하는데 평주는 하북성 맨 북동쪽 끝을 뜻합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북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낸 곳이 평양성이요, 요나라 동경이다. 그 외성을 한성이라 한다. 철주는 안시현이다. 고구려 안시성이다. 안시성은 동경(평양성)에서 서남 방향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신당서 동이 고려 고려의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고려왕은 평양성에 거하는데 장안성이라 하며 전한의 낙랑군 자리이다. 산의 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 외성이 된다. 남쪽은 패수이며 왕궁을 패수의 좌측에 축궁했다. 또 국내성, 한성이 별도 도성이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한漢이 (고)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평양은 낙랑땅이다. 동진 의희(405~418)이후에 장수왕이 평양성에 거했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정벌했는데, 그 나라가 압록수의 동남 천여리로 이동하였다(여기서 압록수 동남은 왕건의 고려를 뜻함). 옛 평양이 아닌데도, (고려왕) 왕건은 이동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하북성 북동쪽이 당나라 국경이었고, 신라가 요동성까지 차지했다면 하북성부터 랴오닝성까지 빈 땅이 되는데 말이 되냐? 라고 질문 하시겠죠. 그곳이 바로 보덕국입니다. 당나라와 신라 국경에 속국을 만들었다고 나오는 내용이 신당서와 삼국사기 두곳 동시에서 완전 일치합니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에 붙었는데, 고장(삼국사기에는 보장왕)의 외손 안순(삼국사기에는 안승)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붙었다'는 내용도 똑같습니다. 그 뒤 다시 당나라에서는 보장왕을 안동도호부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임명하였는데 보장왕이 또다시 고구려의 재건을 노리며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다가 발각되어 681년 다른 지역으로 유배되어 죽고, 유민들은 말갈과 돌궐로 흩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말갈과 돌궐 역시 만주 북쪽에 있지 한반도에 있던 집단은 아니죠. 신당서에 고구려 유민들이 계속해서 당나라와 싸우고 당나라는 이들을 제압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나오고, 삼국사기 신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이를 제압하고 있었다는 내용들이 똑같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같은 지역을 두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현대 국사 교과서에는 보덕국이 전라도에 있었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당나라와 방금 전쟁을 끝낸 사이에, 당나라군과 계속 싸워주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굳이 전라도로 옮겨와 살게 했다는 주장 자체가 이상하죠. 당장 중국과의 국경에서 싸울 사람들이 필요한데. 더군다나 당나라와 신라가 겸보잠, 보장왕 같은 같은 고구려 리더들을 상대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성들을 두고 싸우는 내용이 중국측과 한국측 고서 동시에 나오는데, 그게 전라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말이 안되요. 그만큼 교과서가 엉터리 투성입니다.
중국인이 이영상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 니들의 역사를 그런 보잘것 없는 역사야 한복,김치,아리랑은 우리거야 그리고 북한 지역은 고대부터 우리 고유의 영토이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우리의 지방 역사인거야 뭐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들이 주류 사학계에서 그렇게 말하고 배우고 이렇게 유튜브에서도 우리와 일본에서 그려준 지도를 절대적으로 쓰고 있잖아
@@maple4801 최근 중국에서 나온 예군 묘지명 연구결과, 당시 삼한과 왜를 자연물에 빗대어서 표현하기도 했다. 풍곡=고려, 반도=신라, 일본=백제 왜=부상. 후에 백제가 망하고 왜가 백제 국호를 씀. 삼한 중에 하나인 백제가 왜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 참고로 현 왜국 나라대학교 도노 하루유키 교수 주장임.
@@maple4801 친일파나 왜국 우익들의 의도는 항상 팩트와 본질을 흐리려 하는거지 그걸 의견이라고 하진 않음. 백제를 당나라에서 일본이라고 부르던건 해가 뜨는곳이라는 의미로, 정식국호는 아니지만 백제의 이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음. 애초에 일본이라는게 자국 중심의 국호가 아니라는건, 지금 왜국 학계에서도 당에서 백제를 부르던 일본이라는 말을 쓴거라고 보고있음. 왜국이 삼한의 동쪽에 있기도 하고. 국호까지 쓸정도로 왜인들이 백제를 바라봤던 시각을 생각해보면, 당시 왜국 내에서 종속주종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함.
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 전쟁이 아니랍니다 역사 공부 하세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 무대는 대륙입니다. 고구려(현 몽골) 백제(북경 부분) 신라(안휘성) 입니다 식민 사관 역사 가르치지 마세요 이런 역사 채널 보지 마시고 책보고란 유트브 추천 드립니다. 식민사관 앵무새 역사관을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식민 사관이 틀린 것은 맞지만 신라가 안휘성이었다는 썰 또한 틀렸습니다... 신라 안휘성 썰 근거로 박창범 교수의 최적 별자리 관측 장소를 들이대시는 분들도 있는데 박창범 교수 연구결과는 안휘성이 아니었어요 -_-;;;; 고구려가 몽골 동쪽에 있던 것도 사실이고, 백제가 북경 동쪽 부분에 있던 것도 사실인데 뜬금없이 신라를 중국 남쪽에 있었다는 거짓 주장을 해 버리니 정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끔하게 다 실증으로 증명이 되어야지 자꾸만 중간에 엉터리 근거를 섞어두면 안되요.
민족타령하는거웃김 한민족이라는 틀에 엮이려면 일단 중앙집권제의 통일국가가 존재하는 상태로 수백년이 흘러야함 애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개국으로 각각출발한 각자의 국가였던 삼국에게는 통일국가라는 개념자체가 없었음 땅따먹기싸움이었고 고구려백제신라안가리고 자기들이 불리할땐 중국왕조 일본왕조에 손내밀고 연합하려든게 저때임 삼국중에 반도의 패권을 장악한게 신라인거고 뒤에는 고구려백제의 부흥군들과 전쟁벌이다가 당나라가 한반도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의도를 보이니 신라군과 고구려백제부흥군들이 연합해서 당과 전쟁벌여 몰아낸게 나당전쟁이고 삼국이 한나라라는 유대감으로 묶이기시작한건 그때부터시작이라고 보는게 맞음
남북국시대 신라 영토는 고구려 평양성까지 닿았었고, 고구려 평양성은 왕건의 고려시대에 와서야 동남쪽으로 천리 떨어져 한반도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교과서에서는 나당전쟁 직전까지의 내용만을 토대로 신라 영토를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나당전쟁 이후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신라로 망명하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포함한 남쪽 성들이 대부분 신라에게로 흡수되었습니다. 현대 북한에 있는 평양은 원래 자리에서 왕건고려때 동남쪽 천리로 이동하였다고 나와있기에 고대 고구려의 평양은 한반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과거 삼국지 시대때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이며 남쪽에는 소해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인문(金仁問) 대당총관이 되어 평양성을 함락시키다(0668년 (음)) 총장(摠章)註 096 원년 무진(戊辰:668, 문무왕 8)에 고종(高宗) 황제가 영국공이적(英國公李勣)註 097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또 [김]인문을 보내 우리에게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김]인문과 함께 군사 20만을 내어 가서 북한산성(北漢山城)註 098에 이르렀다. 왕은 여기에 머무르고, 먼저 [김]인문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만나게 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한 지 한 달 이상이 지나, [고구려]왕 장(臧)註 099을 사로잡았다. [김]인문이 [고구려]왕으로 하여금 영공(英公) 앞에 꿇어 앉게 하고 그 죄를 헤아렸다.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은 예로 그것에 답하였다. [영공은] 곧 [고구려]왕과 남산(男産)·남건(男建)·남생(男生)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 삼국사기 권 제35 잡지 제4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한주(漢州)는 본래 고구려(高句麗) 한산군(漢山郡)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이 한주(漢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광주(廣州)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황무현(黃武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남천현(南川縣)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병합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주(州)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이천현(利川縣)이다. 거서현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구성현(駒城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용구현(龍駒縣)이다. ..............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한산주의 주·군·현·성 북한산군(北漢山郡), 평양(平襄註 081)이라고도 한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그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平壤城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대漢代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장안長安에서 5천리 밖에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浿水와 연해 있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宮闕을 지어 놓았다. 또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별도別都라 부른다. 물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大遼는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少遼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양수梁水가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흘러 나오는데, 물빛이 압두鴨頭와 같아서 압록수鴨淥水로 불리운다.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거쳐 영난수鹽難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 간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淥江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이 건너 다니므로, 이를 해자(天塹)로 여긴다.
아래 기록은 고구려가 위나라 공손씨들에게 패배하며 서쪽 영토를 잃은 이후의 상황을 뜻합니다. 고구려가 서쪽 영토를 잃을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에서 1000리 떨어진 북쪽 지역을 요동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위서(魏書) 열전(列傳) 고구려(高句麗) 세조世祖 때에 쇠釗의 증손 연璉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安東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국휘國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詔命으로 제계帝系의 이름 자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파견하여 연璉을 도독요해제군사都篤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국왕高句麗王에 제수拜授하였다. 오敖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책성栅城,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민호民戶의 수는 전 위魏나라 때보다 3배가 많았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여리이며 남북은 1천여리나 된다. 백성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및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토질土質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업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즐겨, 밤이면 남녀가 떼지어 어울려 노는데, 귀천의 구별은 없었지만 정결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하였다.
가야는 600년 역사를 지닌 나라였습니다. 친일사관 때문에 3국에 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제부터 4국 시대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수로 왕과 허황후 이야기, 여러분이 잘 아는 구지가의 노래가 있는 독자적인 문화를 지닌 나라였습니다. 금관가야 왕가의 후손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신라세력과 금관가야 연합 세력이 나중에 통일신라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가야의 역사는 600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웃기고 어이없는게 고구려 발해 영토 만주를 넘어 시베리아까지 그려놓는거 너무 웃김. 거기 아무것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냥 허허벌판인데 거기 차지해봐야 아무 쓸데 없는데 국뽕들 자존심 세우자고 영토라고 그리는거 보면 진짜 한심함. 장수왕도 시베리아 만주 가봐야 아무것도 없고 중국으로 진출은 어려우니까 그나마 만만한 백제 신라 공격한거겠지. 진짜 시베리아가 중요하면 오히려 수도를 북쪽으로 옮겼어야 맞지.
@@user-fg7hn6yy1z 이게 삼국사기에는 애매하게 그냥 신라가 한강을 차지했다로만 나오고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했다고 나옵니다. 둘 다 신라가 침공했다라고 표현을 안 쓴 것으로 보아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철수 했고 신라가 빈자리를 채웠다 라고 주장되는 겁니다.
저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도 조그만한 신라가 몰아냈는데 지금 남한이 미국과 연합하여 중국 못 이길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번기회에 중국 박살내고 미국과 함께 중국 분할통치 했으면 한다 한국이 만약 중국 이기고 중원을 접수한다면 세계강국으로서 발돋음 할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 중심지가 농사를 짓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고구려가 장악한 만주가 얼마나 넓고 비옥한 토지인줄 아냐? 중국에서 동북평원이 식량생산기지로서 어떤 역활을 하는지 알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고구려가 가진 동북평원을 척박한 한반도 땅에 비교하냐? 조금 공부를 하고 헛소리를 해라. 부끄럽지도 않냐? 당시에 그 지역이 경작인구가 부족했는지는 모르지.
저렇게 온나라가 다 땅따먹기 전쟁을 하는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 한게 왜 잘못이냐?? 안 그러던 나라가 있나?? 강한쪽이 약한쪽 지배 하는건 당연한거지..지금은 코딱지만한 남쪽지역에서 아웅다웅 하며 살고 있는것들이 고구려땅이 드넓고 어쩌구 아쉬어 하는거 왜케 웃기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