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는것 같은데요 연개소문의 출신지는 동부 즉 동부여 지금의 두만강 일대 다시말해 국내성 지역이 연씨 가문의 세력권이자 고구려 5부중 동부가 수장 노릇했는데 연씨를 평양귀족 가문에 넣는건 잘못 아신것 같네요 애초에 연개소문이 막리지에 오르는 것을 방해한 가문이 평양중심 귀족가문 이었고 그래서 연개소문이 모략으로 평양귀족 가문 수백명과 왕까지 숙청하고 막리지에 올랐는데 연개소문을 평양귀족 가문의 대표로 내세운건 모순 같네요 이후 정권을 장악한 다음 새로운 평양귀족 가문이 성립할 순 있겠지만 연개소문 사후 장남 연남생이 동생들에게 쫓겨 연씨 세력권 동부로 가서 국내성 일대 지지세력 이끌고 당나라 망명 자중지란
맞아요. 그리고 세조가 된 수양대군도 그랬었고요. 사실 조선 쯤 되어서 모든 지방에 관료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확립하긴 했지만 사실 조선도 절대왕정이라고 보긴 어려워요. 사대부들이 건국한 나라다보니 무능한 왕이 지나치게 왕권강화에 집착할려고 하면서 자신의 오판을 밀어붙이거나 왕의 외척들이 왕을 바른 길로 이끄는 세도를 올바르게 쓰지 않고 이상하게 사용할 우려가 매우 컸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관이 쓰는 사초제도를 발달시키게 된거라고 합니다. 사초는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만들었고요. (사초를 유일하게 본 사람 : 연산군)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세종 이도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상왕으로 일정기간 세도정치, 즉 섭정을 하면서 여흥 민씨 세력을 대거 축성했었다고 하고요. 수양대군도 단종의 외척들이 세도정치를 올바르게 쓰지 않고 이상하게 쓸려고 하자 정변을 일으켜서 집권한 거고요. 근데 중기쯤 되면서 사림파로 정권이 교체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돌아갔다고 합니다.. 근데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세도정치를 하게 되는데 김좌근이 사리사욕과 탐욕이 매우 강해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정치를 하게 되면서 매관매직이 벌어지고 나라가 엉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근데 그런 거에 대해 사초제도를 제외하고는 견제시스템 자체가 폭삭 사라진 상태라 막을 방법자체가 없었죠. 풍양 조씨가 잠깐 집권하기도 했지만 다시 안동 김씨가 재집권하게 되고요. 흥선대원군과 조대비가 합의를 보면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 고종을 왕위로 올렸고 섭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개혁을 해놨잖아요? 근데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난 후 고종이 무능한데 왕권강화에 아주 집착을 보이게 됩니다. 거기에 고종의 왕비였던 민비도 무능해서 여흥 민씨 세력들이 활개를 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다니는데 그걸 제제하지를 못했다고 해요. 거기에 고종이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입으로 청나라 군대에 파병을 요청하면 어떨까라는 말을 먼저 꺼냅니다. 당연히 그 당시 관료였던 사람들과 여흥 민씨 정계 사람들은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텐진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일본군이 들어와 우리 땅에서 싸우게 된다고 하면서 그건 안 된다고 말렸지만 고종은 왕권강화에 아주 집착하고 있었고 민비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고종과 민비는 갑신정변 때 청나라가 일본을 이겼으니 이번에도 청나라가 일본을 이길거라고 오판을 하고 청나라 파병요청 추진을 밀어붙이게 됩니다. 여기서 고종과 민비가 한 파를 이루고 중앙관료들과 여흥 민씨 정계쪽 사람들이 다른 한파를 이루면서 조선 정계에도 내분이 벌어지게 되고요. 그 내분을 해결하겠다고 민비가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데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여러번 치르면서 흥선대원군이 벌어놓은 재정을 상당수 탕진해버립니다. 물론 조선 땅에 들어온 청나라군과 일본군 중 일본군이 철군을 거부하면서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요.
백제 왕실이 힘이 없는 이유는 우리 민족이 아닌 외국인이라서 그럼. 사서에도 백제 왕실과 백성들간에 언어가 달랐다고 버젓이 기록되어있고 실제로도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별종이었음. 우리 한민족은 마한.진한.변한 삼한에서 유래했는데 고구려에서 건너온 백제왕실과 한반도 토착민간의 화합이 안되었기때문에 중앙집권화에 실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