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넘게 당하고 당하면서도 한번도 그놈들을 유린하지 못한것은 자랑이 아니라 뼈에 세길 통한이다. 한번만 더 우리땅 우리국민을 범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 땅에 그놈들 위아래 삼족을 천만배 짖이겨 놓아야 조상님들의 한이 풀리고 후세의 한이 없는것이다. 미사일을 수만발 준비하고 남자라면 모두 전투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것은 통일이 되고 평화시기가 오더라도 꼭 지켜야하는 역사의 교훈이다.
@@nateriver7955 바위는 자세히 보면 구멍이 많습니다 피는 액체이니 바위에 스며들면 그 성분이 건조되고 남아 붉은 형태를 띌 수 있어요 과학시간에 안배웠나요? 많은 양의 피처럼 농도가 짙은건 한번 바위 같은 곳에 베기면 물로 잘 씻기지도 않습니다 바위가 닳아서 없어지기 전에는요
이것도 해주세요. 보다보니 이성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그걸 부정할 필요는 없지요. 근데 하나 간과한 것이 황상전투와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침략에 이르기까지 1350(?), 1592, 1919년 이삼백년 사이로 일본의 침략이 있었어요...호란도 있었구요. 이런 일본의 침략과 국내의 상황에 대한 연구는 없나요... 저는 그게 더 분노가 치밀어요. 일본과 고려말과 조선의 지배층은 어떤 상태였나요? 위 교수님의 강의는 세밀하긴 하나 그냥 과거 역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한 것에 불과한 것 같네요.그것도 훌륭하지만.... 그런 과거속에 있는 개념이 현재에 적용될 때 과거와 역사에 대한 연구가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오늘 날 적용하기까지 무리인가요.. 아쉽습니다.
정보) 이성계는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으로 요동을 정복해본 장수였다. 1만 명의 군대를 끌고 요동을 정복하고 성에 고려 깃발을 걸었으나 고려의 국력이 부족해 요동까지 보급을 못해줘서 다시 고려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1차 요동 정벌의 결과로,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4불가론과 위화도 회군은 그 이후에 있었던 2차 요동 정벌때 있었던 일이다. 이걸 생각해보면 이성계가 왜 요동 정벌 불가능다고 이악물고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나라 꼴이 좀 괜찮았던 공민왕 때조차 1만 명도 보급 못해줘서 후퇴해야 했는데 아예 나라가 곱창이 나서 중앙 정부가 세금도 제대로 못 걷는 우왕의 고려가 5만 명이나 되는 원정군을 보급을 해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걸 판단한 이성계는 당시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 최영보다도 훨씬 더.
보급 ......, 관리 불찰로 식량 창고가 불이나서 부득이 철군 했지요. 어떻게 불이 났는지 원인도 모르고, 이상 하게도 책임자도 못 찾았다고 하죠. 좀 이해가 안가는 되목 입니다. 전장에서 이긴 점령군 장수가 지킬여는 의지만 있었다면 현지 조달도 충분 했을겁니다. 이해가 안다는 대목 입니다. 그만큼 왕권이 약화댔다고 봅니다.
무인으로서만 보면 분명 이성계는 훌륭한 명장입니다. 그러나 무인으로서 최영 장군도 못지않는 훌륭한 명장입니다. 무인으로 이성계의 영웅적 전투만을 조명하면 상대적으로 최영 장군은 가려집니다. 최영 장군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많은 전투횟수 전투승리를한 고려말 최고의 명장입니다.
동북면을 왜 원나라 땅이라고 하는지 알수없네요. 바라보는 입장이 중요하지 않나요? 최태성씨 실망입니다. 시험문제 풀어주는 강사로 인지도가 높으니 이제는 이런 역사를 강의하는데는 폭넓은 시각과 사료를가지고 강의해야하지 않을까요? 감독관 앞에 앉혀두고 하는 방송프로그램도 아쉽고 안타깝네요.
심양왕이라고 했으니, 심양, 선양 만주 중앙인 듯 고려왕이 황금씨족이라, 고려만 통치한 것이 아니라, 심양, 만주도 통치한 것이니 쌍성 총관부는 만주에 위치했을 듯 역사를 재밌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식민지 사학에 빠져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식민지 사학을 주장하는 사람인지.....
쌍성총관부 위치는 요동에 있습니다. 만약 쌍성총관부가 함경남도에 있었다면 거기까지 명나라땅이겠죠. 잘못된 위치를 지금도 이렇게 당연하듯 가르치고 있네요. 중국사료에도 위치 아주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명에 빼앗긴 이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기 위한거구요. 그러니 당연히 요동으로 가는거지요 최태성 선생님 좋아하지만 이건 아닌것 같네요.
○丙子/遣平壤君 趙大臨、參知議政府事尹思修如北京。 韓尙敬到遼東, 欽錄五月二十日頒降詔書以送。 詔曰: 自元祚旣終, 四海鼎沸。 天命我太祖高皇帝, 統一華夷, 普天率土, 靡不臣妾, 惟胡寇遺孼, 分竄沙漠, 呰窳偸生, 殺戮易置, 有如反掌。 朕承大統, 撫治寰區, 志在安民, 惟懷不及, 盡心殫慮, 以求其寧。 凡居覆燾之中, 擧納甄陶之內, 獨此殘胡, 騁兇梗化, 屢使撫循, 輒見拘殺。 往者邊將, 獲其部屬, 念其有父母妻子, 盡釋還鄕, 遣使送之。 彼猰性不移, 復殺信使, 積(匿) 恣虐, 益肆寇攘。 怨憝神人, 實天所殛, 遏虐之旅, 以慰傒蘇, 遂親率六軍往征之, 用拯顚連, 綏寧降附。 五月十三日, 師至斡難河, 遇胡寇 本雅失里來戰, 卽摧敗之, 追奔逐北, 電掃霆驅, 本雅失里奔命不暇, 以七騎奔遁。 獲馬駝牛羔, 生口無算, 其餘降附者, 相繼而至, 遂撫安之, 給與羊馬糧廩, 令各安生業。 數百年之孼芽, 一旦蕩除; 千萬里之腥膻, 由玆灑滌。 乃封于山川, 振旅班師。 於虖! 包擧無外, 弘施一視之仁; 撫輯有方, 永樂萬年之治。 乃遣大臨等, 奉表箋進賀。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윤사수(尹思修)를 보내어 북경(北京)에 가게 하였다. 한상경(韓尙敬)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5월 20일에 반강(頒降)한 조서(詔書)를 기록하여 보냈는데, 조서는 이러하였다. "원(元)나라 운조(運祚)가 끝난 뒤로 사해(四海)가 모두 어지러워졌다. 하늘이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명하여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통일하게 하였으니, 넓은 하늘 아래 온 천하가 신첩(臣妾)이 아닌 것이 없다. 오직 호구(胡寇)의 남은 무리가 사막(沙漠)으로 나누어 도망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해, 살육(殺戮)과 역치(易置)를 손바닥 뒤집듯이 하였다. 짐(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환구(寰區)를 무마하여 다스리며, 뜻이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 있어 오직 미치지 못할까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그 편안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였다. 무릇 부육(覆育)하는 가운데 있는 것은 모두 교화(敎化) 안에 들었으나, 오직 이 잔호(殘胡)만이 흉악을 부리어 교화를 거부하였다. 여러 번 사신(使臣)을 보내어 무마하였으나 문득 구금(拘禁)하여 죽였다. 지난날에 변장(邊將)이 그 부속(部屬)을 잡았으나, 그 부모 처자가 있는 것을 생각하여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신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는데, 저들의 늑대[猰] 같은 근성이 변하지 않아서 다시 신사(信使)를 죽였다. 음흉한 것을 쌓고 포학한 짓을 자행하여 더욱 도둑질을 방자히 하였다. 그리하여 신인(神人)에게 원망을 샀으니, 실로 하늘이 죽이는 것이다. 포학을 막는 군사가 혜소(傒蘇)를 위로하였다. 드디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여 곤란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 항복하여 복종하는 자를 편안히 하였다. 5월 13일에 군사가 알난하(斡難河)에 이르러, 호구(胡寇) 본아실리(本雅失里) 와 만나 싸워 곧 이를 패퇴(敗退)시켰다. 달아나는 것을 쫓고 패퇴하는 것을 쫓아, 번개처럼 쓸고 우레처럼 내몰았다. 본아실리(本雅失里)가 도망하기에 여념이 없어 겨우 7기(騎)만으로 도망하였다. 말·낙타·소·염소·생구(生口)를 수없이 얻고, 그 나머지 항복하여 복종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이르므로, 마침내 안무(安撫)하고 양과 말과 양식을 주어 각각 생업(生業)에 편안하게 하였다. 수백년의 싹[蘖芽]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천만리의 더러운 냄새[腥膻]가 이로 말미암아 씻어졌다. 이에 산천(山川)에 봉(封)하고 군사를 떨치어 회군하였다. 아아! 외방(外方)이 없이 모두 포용(包容)하여 널리 일시(一視)의 인(仁)을 베풀고, 무집(撫輯)하는 것이 방도(方道)가 있으니, 길이 만년의 다스림을 즐기리라." 이에 조대림 등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받들어 진하(進賀)하게 하였다. ------------------------ "원(元)나라 운조(運祚)가 끝난 뒤로 사해(四海)가 모두 어지러워졌다. 하늘이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명하여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통일하게 하였으니, 넓은 하늘 아래 온 천하가 신첩(臣妾)이 아닌 것이 없다. 오직 호구(胡寇)의 남은 무리가 사막(沙漠)으로 나누어 도망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해, 살육(殺戮)과 역치(易置)를 손바닥 뒤집듯이 하였다. 원번역의 일부이다.다시한번 곱씹어보자.기존의 역사와 다르고 강역 또한 우리의 시선이 한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다.고작 현재의 만주를 벗어나 본적도 없다. 斡難河====>이강은 지금의 몽고 북동부밖 러시아 지역에 있는 강이다.우리의 역사에서 함경북도 6진9성외에 두만강을 건너 이 지경을 벗어난본적이 없다. 그런데 알난하 이것은 지금의 오논강으로 몽고를 지나 지금의 러시아 영토에 있는 강이다.이것이 흘러 실카강으로 흐르고 아무르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中華 이놈의 중화가 중반점이겠나. 夷狄 이적 이는 동이인 우리를 카리키는 대표적인 말로 굳어진 것이지만 한상경(韓尙敬) 은 이적이라 칭하고 있다. 몽고와 관련있는 우리의 역사에서는 고려이다.고려말의 이성계에 대한 치적을 말하는 가운데 중화와 이적을 통일 시켰다고 말한다. 이기록들을 바탕으로 5개의 댓글을 새벽에 작성해서 올려 뒀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이기록 포함 2개가 사라졌고 함께 주르륵 댓글란에 달렸던 것이 지금은 제각각 다른 사람들의 뎃글속으로 흩어져 있습니다.이유를 모르지만 짐작되는바는 있긴 합니다. 이 기록이 님이 생각하는 직접적인 기록인지는 모르겠습니다/.제가 올린 이기록은 기존의 요동이라는 영역보다 지역적으로 훨씬 북쪽에 위치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한상경이 말하는것을 보면 지금의 한반도를 생각할수조차 없는 이유가 한반도에서 그저 북쪽이지만 대륙에서 바라보면 당연히 동북면이 됩니다.한상경이 비록 동북면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기록속에서 동북면임을 확인할수가 있습니다.
@@목격자냥이 중국 사료가 아닙니다.님이 적어놓으신대로 우리측 사료에도 충분히 나오는 기록입니다. 중국측 사료를 뒤지려면 우리측 사료를 뒤지는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서안을 찿아서 기록으로 연결된 부분으로 들어가려해도 들어가지질 않습니다. 전에는 검색이되던것이 요즘은 검색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京師 와 관련된 기록들을 중국측에서 찿으려면 개고생입니다.죄없는 컴퓨터 박살내고 싶어지니까요. 국내에서 이 경사를 모조리 명나라 중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강단이든 학계든 교육부든....개탄스럽습니다. 경사는 중국측이든 우리측이든 오로지 한곳만을 가리킵니다.주나라의 호경부터 시작해서 고구려와 연관된 장안이라 이름까지 오로지 서안만이 경사란 이름을 갖습니다.
@@목격자냥이 명실록과 청실록에 대한 글을 지금 찿아보니 없네요.이영상의 댓글란에 분명하게 올려 두었는데 사라졌습니다. 문역각이라는 키위드로 싸이트를 뒤져도 이에 대한 글들이 없습니다. 다만 실록에서는 수없이 나옵니다.문연각이 기존의 역사 인식으로는 중국측 기록물인것처럼 인식되지만 실록에서의 내용은 문연각이 건청궁으로 이어집니다.즉 명실록 청실록이 조선의 기록이란것으로 말입니다.
겨울철엔 동상걸리지. 군대안간 애들이구나! 이성계와 그 아비는 한국사에 최대 악마들이다. 민족정신과 영토가 축소해가는 시기다. 아직도 미국 똥구멍 빠는 애들처럼 . 자기네들이 명나라 일본 미국식민지 국민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데 영어 달력 뉴스 교육 법률 등 따라가는 쓰레기들.
동북면과 서북면의 위치 고증이 잘못 됬습니다. 고작 저 영토를 차지하겠다고 왕명을 통해 서북면과 동북면 각 병마사에게 군사를 주어 공격을 했다는게 그냥 생각해도 납득이 갑니까? 압록강을 넘어 요양과 심양 주변을 서북면이라 칭하여 공격하게 하였고 두만강 북쪽 700리에 선춘령까지를 동북면으로 보고 공격하게 했다는 거겠지요. 조선 보다 군사력이 강대하고 자주 국방을 했던 고려가 어떻게 영토가 압록강 보다 아래 있을 수 있겠어요.
@@나폴레온 조선의 2/3 정도 되는 강역으로 무슨 수로 조선 보다 더 강할 수 있는지 한번 되묻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고려사 부분을 배우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 아닙니다. 당시 송나라에게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던 거란(요나라)을 상대로 고려는 무려 군사 35만명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고려의 강역이 황해도 평양 이남이라는게 말이 되나 싶었거든요. 그 이후 현대6.25전쟁 까지 상비군의 숫자가 단 한번도 35만명을 운영해온 적이 없으니까요. 고려사 기록에서 원&명 교체기 때 서북면(요동)과 동북면을 수복하기 위해 각각의 병마사를 필두로 서북면 병마사를 압록강의 북쪽으로 출군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역이 함경도 평양 바로 위 까지가 고려의 강역이었다면 여진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야 외교적으로 말이 안되는겁니다. 지금도 고려사 왜곡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햐후 고려사 수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나폴레온 제가 잘못 있는 부분이군요. 고려거란 전쟁은 그 규모 면에서 조선 말기 까지 통틀어 최대로 알고 있는데 외세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당시 최강국으로 맹위를 떨쳤던 국가의 침략을 막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거든요. 역사를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 고려 공민왕 때 요동정벌에 대한 고려사 내용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 뜬금없이 지금 것 단 한번도 고려영토가 아닌 그 지역을 정벌하려 했을까요?
저 시대는 원나라가 고려 이북지역을 함락 했다고 하지만 중국인이 대거 들어와서 점령한 상태가 아니고 그냥 연락사무처나 공관을 설치 해 놓고 깃발만 꼿아 놓은 것이지요. 한국이 역사상 그 수많은 중국으 침략을 받아도 한민족의 멸망 하지 않고 이어 온 이유가 이 것 때문입니다. 지금과의 침략과 점령이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침략해서 그곳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혼을 내놓고 나서 깃발만 꼿아 놓고 철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은 예전 부터 인육 문화가 일반화 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 사실은 중국의 유명한 문호 임어당이 기술한 저서에 자세히 나옵니다. 어느 정도인가 검색해서 찾아 보면 나옵니다. 홍건적은 점령한 곳의 포로와 주민을 바퀴처럼 만든 기계에 집어 넣어 뼈까지 가루로 내어서 그것으로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국은 깃발을 꼽지, 자기 민족이나 부족을 이주시키지 않습니다. 반란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나 민족 이동이나 다른 세력을 투입하고, 그게 아니면 현 상황 그대로 갑니다. 페르시아제국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대영제국 여러 중국왕조 등 거의 모든 제국이 개방성과 다양성을 중시합니다. 로마의 시민권이나 오스만의 밀레트, 페르시아의 관용정책이 대표적인 케이스죠.
25:00 In the year 1380, 2,000 koryo cavalry clashed with 20,000 invading japanese army with their samurais , spearmen and horses and all at Hwangsan. Fierce battle ensued and the japanese suffered heavy casualties with the remnant fleeing to the mountains . It is recorded that the dying 😭 japanese sounded as the wailings of 10,000 cows. The bloodshed was so great that the battle ground had turned red permanently and remains that color to this day. This battle proves contrary to the japanese belief that they are a warrior race. Japanese are no warrior race. Lo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