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부실공사 등이 원인이었던 이 사고로 약 1000여 명 이상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사망하거나 부상 당했습니다. 현재 작가 '산만언니'로 활동 중인 한 생존자를 만났습니다. 사고 당시 지하 1층 식품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는 아팠던 스무살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놓았습니다. 다시는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러고 또 삼풍같은 게 광주에서 터졌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안전불감증이 아니라 중국인 같은 곳이 유독 있음 그런곳에게 맡기면 진짜 개 망함. 보통의 리더가 있고 그런 곳은 꼰대가 있을지라도 제대로 돌아감. 근데 하나 알았네 다들 좋았구나 근데 번외경기에서 그런 소식듣고 온 사람들이 주서가려고 그런 특정 개것들이였구나 ㅋㅋㅋ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에 김건희 윤석열의 책임은 전혀없지만 대통령 됐음에도 굳이 아크로비스타 사는이유가 삼풍백화점 무너진 자리에서 원혼들 깔고 살면 좋은 기운 받는다는 무속때문 아님? 정상인들이라면 무슨 그런 말도안되는 이야기를 이라고 하겠지만 김건희는 무속인이잖아. 그러니까 충분히 저럴것같은데 무속때문에 이름도 개명하고 얼굴도 바꿨는데 집정도야 물론 진실은 본인들만 알고있겠지만
그거 잘못된 내용이에요... 경영진들은 무너진동 말고 다른동에서 백화점 문 닫을까 말까로 회의하고있었다고함... 경영진들도 설마 무너지겠어? 라는 마인드로 백화점 운영했으니 뭐... 백화점 회장 며느리는 지하 1층에 있었다가 구조됨.. 알았으면 며느리도 같이 나오라 했겠죠
전혀 모르는 피흘리는 사람을 아무 바램 없이 프라이드 새차에 태워주신분.. 얘기하시는데 그 부분에서 눈물이 나네요.. 또 그걸 선명히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하는 모습..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다 그럴 것이라는 믿음..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 하고 버티는 힘이 되었을 것 같아요
저도 화재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본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말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있지요. 나와 내 가족이 해당되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다는 말이요. 꼭... 이걸 직접 겪고서야 깨닫지 않길, 그런 세상을 지향하길 바랍니다
저날 이모랑 저 백화점에 갔었거든요 이모네 놀러갔었는데 이모부 서류 갖다드릴꺼 있다고하셔서 서류드리고 삼풍백화점에 들렸었는데 그 후덥지근한 공기와 그리고 어렸지만 기억에 남는게,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손을 닦으려고 물을 틀었을때 녹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모가, 이모쪽에서 닦아 하셨었고 그런데 그쪽도 녹물이 나와서 포기하고 나왔던거. 그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정장입은 남자분들이 분주하게 무전치고 물건도 막 들고 뛰고 그래서 저는 누가 물건을 많이 샀고 실어주러 가는건줄 알았던 기억이나요 이모가 오븐 산 기념으로 닭사다가 닭구이 해준다고 식품층으로 내려가자 하셨는데 피자가 갑자기 먹고싶어서 이모 나 피자먹고싶어 했더니 이모가 피자재료 집에 있다고 그럼 피자만들어줄까? 하셔서 집에 돌아왔는데 TV프로 보려구 틀었더니 속보가 떴고 보니까 삼풍백화점 무너졌다는 얘기였어요 저희 엄마한테 이모집으로 막 전화오고. 어른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쩌면 저중에 하나였을 수 있었다고 말씀나누셨던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나요
@@레몬트리-l5l 맞아요 엄청 더워서 계속 시원한거 먹고싶다 했던 기억나요 그리고 밍크코트 같은거 있잖아요 그걸 밖으로 막 빼길래 이모가, 세일하려나? 하셨던것도 기억나고 크고나서, 삼풍백화점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듣고나서 그날을 생각해보면 아..그래서...?그래서 그랬었구나 이런 생각도 솔직히 많이 들구요. 그분이 나오고 한시간 뒤 붕괴면 그날 그분과 저 같이 있었겠네요 저희도 집에오고 50분?~1시간 정도 있다가 그일이 벌어진거였거든요 진짜 삶과죽음이 이렇게나 멀지않네요 무섭ㅠ
최근방송을통해 알게된게 그날 비싼보석들파는 보석전을했는데 경연진들은 미리 건물의이상느끼고 도망가기전 비싼보석들은 미리 옮겼다던뎨 밍크코트등 비싼의류도 같이옮겼었나보네요 여러가지 붕괴위험을 느끼고 에어컨도 꺼지고했음 그날은 일찍영업끝내고 손님들과 일하는직원들을 다 내보냈다면 그런 큰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말이죠 이준회장 사고후에도 끝까지 자기 망한거 돈없어지는것만 걱정했다더니 경영진중 일부는 오늘은 조기영업종료해야 된다고 했다던데 영업시간 앞당기면 매출이 줄어들테니 끝까지 시간다끝나면(7:30 이나 8시까지였나?) 그후 건물점검하고 수리하자고 우겨서 그렇게된거라고ㅠ 진짜 모든비리와 부실공사 인간의욕심이 빚어낸 참사였습니다
삼풍백화점 사고로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성수대교 붕괴사고때는 같은 아파트 같은동에 살던 무학여고 다니던 언니가 죽었었죠.. 그땐 어린나이라 그냥 막연하게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초등학교 하교후에 티비보는데 속보로 백화점 붕괴소식을 보고 옆집에 가계신 엄마한테 미친듯이 달려가 얘기한 기억이 나네요.. 참 슬픈기억이에요..
4:17 할머님이 손주 데리고 오셔서...ㅠㅠ 억장이 무너지셨겠네요. 손주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통곡하는 할머니 옆에서 멀뚱멀뚱 서있는게 너무 슬프네요. 한순간에 자식과 부모를 잃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을듯 싶어요. 그리고 사고 수습 후 위령비도 현장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세워졌다죠? 집값 떨어진다는 반발 때문에... 그 해 성수대교까지 너무나 슬펐던 해였던것 같아요.
이 날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서 공중전화로 집에 미친듯이 전화를 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하는 통에 전화가 불통이 되어서 공중전화기 앞에서 우는 사람도 있었고... 그 때가 여름이라 사고 후 한참동안 삼풍 옆을 지나가면 끔찍한 냄새가 난다는 말도 있었어요. 625사변 이후 단일 사고 최대 사망자를 기록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인재였습니다.
제가 중학생때 삼풍 백화점붕괴, 성수대교붕괴, 대구지하철공사 가스폭발사고 등 참 많았죠. 제가 대구 지하철 사고났던 상인동 영남고교를 나왔는데 친구들 중에 그 사고로 머리에 화상 자국있어서 두발검사 하는데 예외였죠. 한달에 한번씩 심리치료하러 다니곤 했었어요. 어떤 친구는 폭발로 하늘로 날아오른 금속 파편에 그대로 맞아 찢겨 죽은 친구를 직접 봐서 트라우마로 학교를 거의 못나가서 출석일수 겨우 맞춰서 진학은했는데 공부를 제대로 못했었죠. 그래서 시험성적은 늘 전교에서 꼴찌였지만 저랑 여러 친구들이 차별없이 잘지냈던 기억 나네요.
우리 아버지도 저 당시 삼풍백화점에서 일했었는데 살아서 집에 돌아 오셨음! 지금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저 당시 집에 아버지가 들어 왔을때 온몸에 피 범벅~ 같이 일했던 직원들도 대형 선풍기에 빨려 들어가는걸 목격했다는데 정말 무서웠다고~ 그리고 저 당시 인명 구조를 위해 국내 무당, 해외 초등력자들 까지 모두 초청해서 잔해에서 사람 구조 했었음! 그래도 몇명은 무당과 초능력자 덕분에 구조 됬지만 더 큰 공을 세우면 더 많는 인명을 구조한건 구조견 이였음! 구조견은 특수 훈련을 받고 또한 동물의 뛰어난 후각과 청각으로 많는 사람을 구조 했지~ 그리고 워낙에 현장에 사람들도 많고 비명소리에 자동차 소리에 구조 장비 소리에~ 그런 소음 때문에 구조가 늦어진 이유도 있었을듯~ 안에 깔린 사람들이 분명 구조해 달라고 소리쳐도 소음 때문에 안 들리지~ 최장으로 갇힌 사람이 13일이였나? 16일이였나? 안에서 누운체로 갇혔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기 오줌 받아서 마시고, 또 구조대원들이 뿌리는 물 덕분에 살수 있었다는데~ 정말 기적이였지~ 그리고 진짜~ 몰상식한 악마 같은 X발 년놈들이 백화점 붕괴 됬다고 금품들 줏으러 감~ 어떤 중년 아줌마가 졸라 히히덕 웃으면서 금품 줍는 사진도 찍혔던데, 졸라 소름~
저때...생존한 직원들 각유통업체에서 제취업 해 주었지요. 제가 근무했던 회사 H..스토아 ㄱㅈ점 점포에 한 여직원이 왔섰는대...공포심과 트라우마에 결국 한,두달만에 구만두었지요. 글구 희생된 망자들중에 고교 후배가 있다는 예기를 나중에 들었지요... 생존하신 살고 있는 그때 그분들..부디 트라우마 극복하시고 잘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6시에 동생 만나 백화점 가기로했는데 교대에서 삼호가든 방면으로 길이 많이 막혔어요. 마을버스 중간에 내려서 백화점 안으로 갔으면 시원할텐데 하는 생각하는 도중에 눈앞에서 무너졌어요. 그 앞 아파트에 살아서 친구도 친구엄마도 많이 돌아가셨어요. 난 살았기때문에 아무말 못했는데 그 후유증을 첫임신 유산되고 심하게 왔어요. 심장병 갑상선 이병원 저병원 다니다가 공황발작이 와서 정신과에 가게됐고 불안장애 우울증 PTSD진단받았어요.
안전 불감증이 아직도 있다는 말이 와닿네요. 건축 전공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저 사건들에 대해서 배우는데, 참혹하죠. 소방시설도 그렇고 구조안전도 그렇고 그래도 많이 발전되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은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위험한 곳들도 많죠. 그 삶에 대한 회의감과 불안에 대한 우울증이 얼마나 깊었을 지 이해가 갑니다.
PTSD가 이렇게 무섭군요...휴...그래도 사람에 대한 신뢰 잃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고 계셔서 참 다행이에요. 제 생각에 이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가 겪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말 같아요. 그걸 간과하고, 큰 사건들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거. 이제쯤이면 보내줘야지 왜 아직도 징징거리냐 지겹다, 단순 사고다 등등. 그거 내 일이 되면 그렇게 못할걸요. 한번 그랬었죠 정치인이 이런 발언 하는 사람에게 내 가족이라면 어떻겠냐라고 묻는 말에 '당연히 내 가족이랑 네 가족이랑 같냐' 라는 대답을 했는데 '이게 맞지'라며 논리적이라고 하는 사람들 있었는데, 그게 왜 논리로 통하는지. 차라리 '난 내 가족이어도 그렇게 안해'가 되어야 논리에 맞죠. 내 가족 아니니까 난 듣기 싫다 는 비논리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적인 겁니다.
역시 ...작가가 되실 줄 알았어요. 딴지일보에서 글 읽고 좋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글에 힘이 있더라고요. 같은 글을 얼마 후 또 읽어도 똑같은 감이 딱 왔어요. 이 분은 글을 쓰시면 좋겠다, 안 쓰기엔 아까운 재능이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좋은 재능 살리시니 제가 다 기쁘네요
그 당시 삼풍백화점 맞은편 삼풍주유소 하루 매출 5천만원 유공 지금에스케이 전국 1위 저는 부산 대흥 주유소 하루 3천만원 전국3위 롤오라스케이트타고 주유원들이 일했는데 매출 다 포기하고 삼풍 백화점 생사자들을 위해 봉사함 3개월후 나는 작은 주유소 소장으로 발령남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는 시절
이런 사고에 장동민은 방송에서 “오줌 먹는 사람들 동호회가 있어, 동호회. 그래가지고 옛날에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뭐 21일 만에 구출된 이 여자도 다 오줌 먹고 살았잖아.” 라고 발언했다. 이어 유세윤이 “그거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지”라고 말하자 장동민은 “그 여자가 창시자야, 창시자”라고 했다.
정말 지금 봐도 안타깝고 분노할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당시 시간대에 내 가족이 저런일을 겪었더라면 저 회장놈과 경영진 그리고 솜방방이 처벌을 내린 판사놈과 산사람 외면하고 고급시계만 풀러서 갔던놈들 어떻게든 끝까지 색출해서 다 찾아가 죽일것이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정의는 없다 이젠 법에 정의를 바라지도 않는다 결국 피의 복수만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