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시절 무심코 봤던 미륵사지.항상 봐왔기에 무덤덤하게 봤는데.내가지나쳤던 한자리 한자리가 그렇게 역사적으로 뜻이있는곳이었다니 세롭게 느껴지내요. 왕궁터도 세롭게 자리매김 해야겠습니다.왕궁이란 동네도 너무 홍보가 안돼있고요 대한민국에 어디 면소재지 이름이 왕궁이란 이름이 있던가요?지금도 왕궁면은 천년전부터 면소재지 입니다.익산시 왕궁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일 잘하는 공기관은 문화재청인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고 정직한 모습들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문화재 정립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야의 모든 분들이 애써주신 덕분에 우리 역사가 더 빛을 더해 간다는 것,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전해줄 역사를 지금 이 시간에도 기록해 주시느라 애 많이 쓰신다는것 다 압니다! 모두 힘 내십시요!!
@@오리-p6g 종교가 판치는 세상이라서 복원을 못하는건 아닙니다. 복원을 못하는 이유는 1. 역사학자들의 반대: 복원을 하는데 가장 힘이 필요한 역사학자들이 현재 삼국시대 건물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재창조가 물다피하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2. 나무 부족. 조선시대의 건물들은 모두 금강송을 써왔는데 그렇기에 현재 복원 나무로 금강송을 안쓰면 부실 공사라는 편견이 팽배함. 3. 예산 부족. 미륵사는 동양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목탑이 존재했던 절이기에 복원 비용이 많이 든다. 4. 심주석등 문화재 훼손이라는 종사자들의 반대: 기록이 부족하고 복원시에 천년이 넘은 터와 돌 위에 복원을 하게 되는데 그 복원이 훼손이라는 주장
미륵사지 석탑의 구조를 보고 대충이라며 한민족의 민족성이 원래 그렇다는 스스로의 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글을보고 몇자끄적여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거처 우리나라에 전래 됐듯이 탑의 형태도 그렇습니다. 인도에서는 흙을 이용한 봉분 형태 중국에서는 나무를 이용한 전각형태 그것이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을 이용한 석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각각 그런 자재들이 그곳에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전래된후 삼국시대 한반도의 초기탑들은 중국의 전각 모양을 돌로 본떴기 때문에 단지 그런 구조가 생기는겁니다.(미륵사지석탑,분황사모전석탑등) 그러던것이 통일신라가 되어서 한민족 고유의 석탑형태(불국사3층석탑)를 갖추고 꽃을피우게 됩니다. 대충대충이라는 표현과 그게 민족성이라 그렇다는 비약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스스로를 모르는 멍청한 소리입니다. 일제가 한국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위해 만들어낸 이론이 한민족 타율성론이니 당쟁이니,이씨조선(이조)이니 임나일본부니하는것들이 한민족 비하 이론입니다. 그러한 식민사관의 관점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날조하기위해 조선사 35권을 이미 1938년에 지들 기준으로 편찬합니다. 그게 한국 역사 날조에 이용됩니다. 한국은 40년후인 1978년도나 되서야 한국사 25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위해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근대 한국 역사학자들도 일본의 조선역사교육아래 성장하신분들이라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던것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세대가 몇번바뀌면서 민족 정체성이 그나마 회복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로 바꾸고 너무늦어 구분기준도 애매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친일파를 숙청하자는등 오늘날에도 이런의견들을 제시되는게 그러한 맥락이라 보면 될겁니다. 당파싸움이나 하며 민족스스로 발전할수 없었다는 이론이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한민족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이론입니다. 당쟁이란 왕이 다스리던 봉건주의 사회에도 가신들이 참여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합리적인 토론과 이를 정치에 반영하던 보다 확대된 민주정치의 한형태로 보게되죠. 한민족은 작지만 강하고 대단한민족입니다. 동방예의지국,퇴계,이기일원론의 율곡,유교의 꽃을피운것도 화엄과 대중불교, 불교의 꽃을피운것도 중국민족이아니라 바로 한민족입니다. 세계최고의 과학적인 문자를 창제한것도 한민족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의견들을 볼때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교육에서 완전히 벋어나지못했구나하는 개탄을 합니다
Japanese made sure this top won't topple down because it's made by their lords from the past. It it was not made by BecJae then they woulden't have cared cared.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거처 우리나라에 전래 됐듯이 탑의 형태도 그렇습니다. 인도에서는 흙을 이용한 봉분 형태 중국에서는 나무를 이용한 전각형태 그것이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을 이용한 석탑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각각 그런 자재들이 그곳에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초기탑들은 중국의 전각 모양을 돌로 본떴기 때문에 단지 그런 구조가 생기는겁니다.(미륵사지석탑,분황사모전석탑등) 대충대충이라는 표현과 그게 민족성이라 그렇다는 비약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일제가 한국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위해 만들어낸 이론이 한민족 타율성론이니 당쟁이니 임나일본부니하는 한민족 비하 이론입니다. 일제가 식민통치하면서 한국 역사의 조선사 35권을 이미 1938년에 지들 기준에서 써놨고 그게 한국 역사 날조에 이용된겁니다. 한국은 40년후인 1978년도나 되서야 한국사 25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위해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근대 한국 역사학자들도 일본의 조선역사교육아래 성장하신분들이라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던것이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민족 정체성이 그나마 회복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친일파를 숙청하자는등 너무늦어 구분기준도 애매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의견들을 제시되는게 그러한 맥락이라 보면 될겁니다. 당파싸움이나 하며 민족스스로 발전할수 없었다는 이론이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한민족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대표적인 이론입니다. 당쟁이란 왕이 다스리던 봉건주의 사회에도 가신들이 참여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합리적인 토론과 이를 정치에 반영하던 보다 확대된 민주정치의 한형태입니다. 한민족은 작지만 강하고 대단한민족입니다. 이기일원론의 퇴계,율곡,유교의 꽃을피운것도 화엄과 대중불교, 불교의 꽃을피운것도 중국민족이아니라 바로 한민족입니다. 세계최고의 과학적인 문자를 창제한것도 한민족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민족을 비하하는 어리석은 의견들을 볼때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교육에서 완전히 벋어나지못했구나하는 개탄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