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g7661 연개소문은 당나라도 알아주는 영웅입니다 대당전쟁을 총지휘하여 수차레 물리친 장군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부정적인 모습을 그렷는데 그 영향으로 사대주의 사관이 자리 잡아서 그렇습니다 삼국유사가 나온것도 삼국사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빠진것을 새로 일연스님이 역었거든요 사실 김부식 이전에 구삼국사가 있엇다고 합니다 만약에 일연스님이 스님이 아니고 국가로부터 학자 사료 재원을 지원 받았다면 아주 멋진 역사서가 되엇을 겁니다
이순신은 문서를 다루는 고고학자의 의하면 임진왜란 끝나고 100년후에 류성룡이가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자기가 천거 한 이순신의 능력을 과장되게 기록 한 책이 임진왜란 끝나고 100년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기서 가공되었던 인물임 물론 해전에 관해서는 일본 입장에서는 이순신 때문에 해전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던 것임. 일본은 해군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냥 병력수송 보급용이었고 이점에서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냥 장비 + 관우 같은 인물로 숭상 됨. 한국에서는 소설과 만화 영화로 부풀리고 너무 과장 시킨 인물임 그냥 소설을 써다 보니까 그게 진실인양 여겨지고 마치 나라를 구한 대단한 인물인양 묘사됨 이순신 때문에 나라 구해지지도 않았고 일본이 평양성에서 멈춘 것은 고니시 와 가토라는 두장수의 권력 다툼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너무 연로해서 죽기직전의 상태 였기 때문임 오히려 선조가 일본 장수 가토가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이순신에게 막을 것을 지시했는데 이순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 아무 대책도 안세운 덕분에 나라가 위험해졌지요. 초기에 선조의 명령을 따랐다면 임진왜란은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 듯.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일본 기록에는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이순신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약한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구선은 원래 대형선박이 아닌 중형선박이었던거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왜란이 끝나고 나서도 구선이 건조 된듯 하고 1603년 쯤에 나대용이 새로운 돌격선을 만드니 이걸 창선 이라고 합디다. 창선을 개발한 이유가 구선이 점점 대형화가 되어버려서 기동성이 떨어져버려서 였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구선 과는 달리 창선은 인원수를 125명에서 그보다 훨씬 적은 42명으로 운항 하게 끔 만들어졌었다고 합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선체에 개판을 한 형태. 판옥선 등 한국의 전통선박은 기본적으로 소나무를 주 재료로 씀. 그리고 충돌가능성이 높아서 더 높은 강도성능을 요구하는 부분인 이물. 즉 함수부분에는 소나무보다 더 강도가 높은 참나무류를 사용. 함의 형태는 한반도의 남서해안의 얕은 수심에서도 움직일수 있게 평저선의 형태. 물에 잠기는 흘수선이 작아서 속도는 느리지만 선회반경이 작다. 이순신장군이 쓴 학익진은 평저선으로 제자리 선회가 가능한 판옥선이기에 사용가능했던 진법 소나무는 많이 굽어있고 옹이가 많아 두껍게 재재할수밖에 없음. 더군다나 소나무 판자를 연결할때 끌로 파내서 나무못으로 연결함.그래서 충격에 강함. 두꺼운 목재와 나무못으로 고정시킨 것때문에 화포발사시 반동을 선체가 흡수가능. 이게 조선군이 대량의 화포를 발사해서 원거리에서 적선을 제압하고 기선제압한 뒤 포위해서 활로 남김없이 섬멸하고 불화살로 남김없이 태워버림 반면 왜선 중 대선 아다케부네, 중선 세키부네, 소선 고바야가 있음. 소선 고바야는 고작 30명정도 태우는게 고작임. 그리고 왜선은 첨저선. 배바닥이 뾰족한 형태, 물에 잠기는 흘수선이 커서 속도가 빠르나 선회반경은 크다. 아다케부네와 세키부네는 재질이 무른 삼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함. 무른 나무를 사용하다보니 비교적 얇게 재재 가능해서 정교하게 만들었으나 판자를 이어붙일때 쇠못을 사용함. 때문에 화포의 강한 반동을 선체가 흡수하지 못해 화포사용 못함. 그래서 왜군의 전술은 빠른 속도로 돌격해서 조총으로 제압한 뒤 적선에 배를 붙이고 적선으로 넘어가 칼과 창으로 백병전을 벌여서 승부를 내는 형태. 거북선은 왜군의 도선을 막아 인명피해를 줄이려고 만든 전선.
그런 훌륭하시고 이나라를 재팬이 될뻔한 엄청난 위기를 타개하신분이 달랑 백원짜리 모델이십니다. 코미디아닌가요?? 신사임당이 과연 무슨 업적을 남겼기에 오만원에 계신지요??ㅎㅎ 세종대왕이야 당연히 넘사벽이시지만 이황, 율곡또한 ㅎㅎㅎ 그럴만한 업적이 있으실까요??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한민국 그래도 만세입니다.^^
이엉을 최대한 가볍게 엮어서 거북선 위에 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가마니 엮듯이 촘촘하게 엮어버리면 너무 무거울것 같은데 거기에 화공을 대비해서 물까지 뿌리면 거북선의 상부무게가 무거워져 중심을 잡기 힘들 것 같다 아마도 그랬을듯......전라남도 어디에 이엉촌도 있었다는데~ 또 정박시에는 초가집처렴 보여 은폐효과도 있었겠지~ 이순신장군 짱~~!!!! ㅋㅋㅋㅋㅋㅋ
배가 파도에 침몰 안하고 버티고 있으니 경악하지. 고려군이 왜 태풍에 움직였을까? 날씨를 몰랐을까? 반대겠지. 오히려 태풍을 좋아했지. 일본배는 파도에는 꿈쩍도 못하니 태풍에 움직이면 최소한 상륙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건데 아무리 오래걸려도 4시간안에는 도착가능하니 날씨는 원인이 아니지. 전쟁을 포기한건 몽고애들이 태풍에 경악하고 차라리 섬에 상륙하는게 낫다고 관종하다가 쳐발려서 그런거지. 태풍위에 흔들흔들 하면 두려움은 상당하지. 몽고애들 아니면 전쟁할 이유도 없으니 적당한 조공으로 끝냈겠지.
이런 중요한 컨텐츠는 전문가 감수받고 제작하면 안되나요? 1:18 태종13년이면 1413년인데, 임진왜란이랑은 거의 180년 차이인데, 뭔 80년 전이에여... 1:26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공식기록은 없습니다..심지어 난중일기에조차 없죠. 야사에만 기록되어있을 뿐입니다 1:40 평저선과 대비해서 일본배를 설명할때 "첨저선"이라고 설명해야 설명의 균형이 맞지 않나요? 대본조차도 준비되지 않고, 생각나는대로 말했다는 반증.. 3:30 옥포 합포 적진포를 3연패라고 저렇게 쉽게 설명하시는건 좀 무리가 있어요.. 이순신은 당초 옥포해전을 목표로 1차 출정했고, 승리한 뒤, 영등포에서 휴식을 취하려다가 합포와 적진포에 정박중인 적선을 발견하고 빈 배들을 박살낸 것 뿐입니다.. 6:21 장사진으로 돌격하면서 양옆으로 십자포화를 쐈다는건 어떻게 아세요? 출처는요? 혹시 KBS 임진왜란1592가 출처는 아니시죠?ㅎ
사실은 거북선 실물도 발견 된 적 없고 본 사람도 없고 일본 임진왜란 기록에도 전혀 없고 또 명나라 기록에도 전혀 없고 사실상 너무 과장되고 가공된 것으로 보임. 좀 오래 됬는데 누가 그린 그림이다 하고 본 적 있다가 다시는 그 그림 안타나는데 그 그림은 그냥 일반배에 용머리 모양 나무 조각상 앞에다 달아 놓은 것임. 이것이 정확한 것 같네요. 단시간에 저런 거북이 모양 배 만든 것도 말이 안되고 또 저모양으로 시뮬레이션 해보니까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고 전투도 불가능하고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위로 가 있어서 배가 뒤집어 지거나 가라 앉게 됩니다. 뭐든지 사실에 근거해야지 영상을 과장되게 뇌피셜에 의존해서 안됩니다. 선조가 1597년에 일본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이순신에게 지시를 내렸지요. 준비했다가 가토인가 하는 일본 장수를 잡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고 왕명을 거역한 되로 좌천 당했지요. 이순신이 알려진 것은 류성룡이가 자기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서 이순신을 자기가 천거했고 잘 싸웠다 라고 공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기록한 것 때문이고 그 기록이 100년 후에 일본으로 건너 가면서 이순신을 일본인들이 신격화 시켰고 일본이 이순신을 장비에 비유하면서 강한 것으로 묘사한 이유가 자기들을 장군을 치켜 세우기 위한 것임 적이 강할 수록 그것과 싸운 자기들도 당연히 강하고 신격화 되니까요 암튼 일본인에 의하여 편집된 류성룡의 책이 다시 청나라로 건너가면서 청나라에서도 알게 된 것임. 류성룡도 명나라때는 간신배로 취급 받다가 일본에 의하여 가공된 책으로 인하여 청나라에서 우리가 잘못 알았네 하게 된 것임.
맞아요. 그냥 잘 싸운 장군인 것은 맞는데 그당시 일본이 쳐들어 오기전 두가지 부류가 있었어요 한쪽은 일본이 군사를 증강중이고 조선을 쳐 들어오니까 대비해야 한다 라는 쪽과 혹세무민 하지 마라 . 일본이 쳐들어 올리가 없다 군사대비할 필요 없다는 두부류인데 이순신은 후자쪽이었음.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리 없다 생각했고 아무런 대비도 없었지요. 선조의 지시를 어겼다는 것은 처음 알았는데 간뎅이가 큰 장군인 것 같고 일본이 장비로 묘사한 것이 이해가 감니다.
일본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임진왜란 은 축소해서 제작하거나 아예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전쟁이니까요. 더군다나 이순신 한명의 장군때문에 졌다는 걸 인정하기 싫겠죠. 그러니 조작과 왜곡된 일본 역사서에 당연히 누락 시켰겠죠. 명나라는 조공을 갖다 바치는 신하국 조선이 철갑 거북선을 만들어서 실전에서 왜군을 박살냈다는 걸 못봤 거나 명나라 조정에 보고를 안했을수도 있구요. 보고를 안했으면 기록되지 않았을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