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금 6학년 6반입니다. 좋은 강의 너무 감사합니다. 중고 시절 읽은 책이 생각나네요. 야사입니다.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본인 뿐 아니라 나라에 큰 낭패를 준 이유. 이렇게 기억됩니다. 장군이 젊어 여자를 좋아했는데 장군이 성공한 뒤 배신해서 여자가 원한을 품고 자살한 뒤 원귀가 되어 배수진을 현몽 지시하여 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생가
선생님 곧 봄이 오려고 눈까지 내린답니다^^ 탄금대 전투는 제가 충주 주변이 고향이라 조령지역 지리를 조금 압니다ㆍ 경북 문경읍서는 충주로가는 고개가 두개입니다ㆍ 하나는 계립령 삼국시대부터 길.조령은 나중에 새로난 길로 조령이 약간 지름길이죠ㆍ계립령은 문경읍서 오른 쪽으로 약간 돌아서 넘어야겟기에 조령은 시간 단축이 됩니다ㆍ 그런데 조령길로 넘어도 지금의 수옥정 폭포지나면 고갯길 내려가면 계립령에서 오는 길과 합쳐진답니다ㆍ 그당시 조령 지금의 2관문 지역서 방어했다고해도 일본군이 군사 나누어 계립령으로 우회해서 지금의 3관문을 봉쇄하고 2관문서 진을 친 조선군을 후방 차단하였다면 고립돼서 전멸 당했다고 봅니다ㆍ 신립장군이나 이일장군이 그 당시 이것을 모를리가 없게지요ㆍ 설사 조령서 방어했어도 단지 수일정도 시간만 벌었겟지요ㆍ 조령과 계립령을 임진왜란 딩시 관점서 답사하니 결론은 조령방어했어도 후방 고갯길이 차단되어 전멸.다만 시간을 벌고 적어도 탄금대처럼 허무한 패배는 안되었다는 관점입니다ㆍ 계립령 길만 없었다면 신립이나 이일장군의 무능을 탓하겟지만 저로써는 그분들 입장이 조금 이해가 갑니다ㆍ 기마병의 산악길 방어 불리함에 계립령이라는 우회길이 있는 상황서 조령방어만 고집할 수 없는 장군들 입장을 말입니다ㆍ 구독자 30만을 위하여 늘 기원드립니다^^
영상 내용중에 시청자들에게 자칫 오해를 살만한 면이 있는 것 같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댓글 달아 봅니다. 1. 고니시가 큐수에서 대마도로 온거는 3월이고 이후 대마도에서 한달가량 있다 부산으로 출발 합니다. 2. 당시, 경상도 육군은 좌병사가 이각이고, 우병사는 조대곤입니다. 김성일은 나이가 많았던 조대곤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창원의 부임지로 남하하던 중이었습니다. 하필, 조선의 입장에서는 경상우도의 육군/수군(원균)의 수장들 모두가 개전 직후 시기를 전후하여 한꺼번에 교체되는 불운이 발생했지요. 3. 추풍령,조령,죽령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 소백산맥의 고갯길인 이 지역을 방어한다는 개념은 아닙니다. 제승방략의 따라 경상도 순변사, 우방어사, 좌방어사가 각각 담당 방어 지역으로 내려가는데, 먼저, 김천-성주쪽으로 내려가는 우방어사는 추풍령을, 안동-경주방면으로 내려가는 좌방어사는 죽령을, 3일 뒤에 출발한 순변사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상주-대구로 내려가 막는 겁니다. 제승방략의 4운체계에서 1차적인 초기대응은 각 지역의 고을 수령들이나 군관들이 먼저 초기 징집 병력을 데리고, 사전에 약속된 지역으로 가서 경상우병사와 좌병사의 지휘를 받거나, 나중에 중앙에서 순변사나 방어사들이 내려오면 후방의 남아있는 나머지 병사들을 추가 징집하여 감사,해당 지역의 좌(우)병사, 순변사/좌우방어사들이 각기 담당지역을 방어하거나 협업하여 교전하는 것입니다. 임란때는 1차 대응해야할 최전방의 지역방어 거점들이 너무 일찍 무너지고, 중앙에서 내려온 경장과 후방의 후속 지원병력들이 미처 이들 지역으로 도달하기 전에 일본군이 예상보다 빨리 북상하면서 제대로 된 전투없이 무너져 버리게 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유성룡이 군사작전계획(작계)면에서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도 이 부분이 크죠. 첨언하면, 죽령은 경상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약간 돌아가는 점이 있어 나중에 좌방어사도 조령을 넘어 경상좌도로 들어가고, 가토도 당초 계획과 달리 죽령이 아니라, 고니시를 따라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옵니다. 4. 충주전투는 임란 전기간을 통틀어 일어난 전투중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라 여기서 다 언급하기에는 무리가 많겠네요. 조령 방어의 타당성과 관련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일자와 일본군이 조령을 넘는 시점 사이가 불과 하루이틀 정도라는 기간을 감안해 봤을때 조선군이 조령일대에 분산 포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5. 저도 원균이 임란초기 해전에서 10여척을 불살랐다는 부분은 원균의 일방적 주장으로 이순신의 장계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다른 문헌이나 일본쪽 사료에도 나오는게 없고, 당시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원균의 전란 초기 행적에 대해서는 저도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요, 다만, 영상 설명만 봐서는 마치 원균이 옥포해전 이전, 전란이 발생하고 얼마되지 않아 바로 전장을 이탈하여 사천, 노량까지 철수한 것 처럼 전달되는데,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영상을 보니 원균의 임란 초기행적과 관련해서 주로 난중잡록의 내용을 위주로 하여 설명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도 난중잡록의 사료적 가치는 높게 평가하지만, 이 시기 조선 수군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시간적인 구분이나 사건별로 나뉘지 않고 마구 섞여 있다보니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지요. 아시다 시피, 그나마 임란초기 조선 수군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이고, 이게 신뢰성면에서 1차 사료로서 더 가치가 있지요. 이순신의 장계나 후대 이충무공행록에 보면 옥포해전 발생전까지는 원균은 한산도 주변 통영 인근에 있다 당포로 합류한 것으로 나옵니다. 원균이 사천 인근 노량까지 물러난 거는 옥포해전 후 일본수군의 경상우도로의 서진이 본격화된 5월말상황으로, 1차 출진과 2차 출진의 사이 기간이지, 일본 수군이 도해하는 4월중순에서 말까지의 시점이 아닙니다. 원균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사실관계만은 명확히 해야되지 않을까 싶어서, 댓글로 남겨 봅니다.
초기에는 침략자의 군세가 우세하기에 ㅡ작전상 후퇴도 가히 나쁘지만은 않다고 볼수도 있다 사태를 파악 도망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재결집 재반격 또한 전쟁 장기화에는 중요하다고 볼수있다 배설장군의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13척의 333대의 일본수군 울들목에서의 대승에서와 같이 배설의 12척 ㅡ그마저도 없었으면 조선 수군은 결국 ㅡ와해되었을 것이다
중국연변에 사는 교포입니다. 제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때 단순히 부산성안에 들어앉아 방어하는것보다는 고구려때처럼 견벽청야 전술로 철저히 성을 비우고 왜군들이 잘곳이 없게 집들을 다 태우고 먹을걸 다 감추고 우물들을 다 메우거나 독을 풀고 밤에는 자주 기습을 진행해서 피로하게 하고, 주로는 바다에서 왜군 수송선을 습격하는걸 주로 하는 이런 전략이 더욱더 유효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뉴스 시간 마다 눈물로 피난길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바라 봅니다.213조 원의 자산을 즐기며 인생을 즐기는 푸틴과 암 치료 조차 못받게 된 어린 고아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천의 천도시비에 저 역시 동감하게 됩니다. 공평치 못한 것 그 자체가 공평이라던 어느 회의주의자의 말이 생각을 휘젖는 요즈음입니다.
인간은 다투지 않고는 존재하기 힘든 종족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사랑과 인류애 또한 한 없이 넓은 것도 인간이지요. 몇몇 권력욕에 빠진 인간 쓰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서 되겠습니까. 인류의 집단지성이 한층 높아져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악인과 독재자는 세상 어느 곳에도 발 붙일 수 없도록 해야하겠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조선시대 병자호란이 다가옵니다ㆍ 우쿠라이나의 정치적 무능이 조선시대 병자호란과 같지요ㆍ 다시말해 실질적 위협 지배는 소련인데 일부 지식층 정치인들이 자신들 이해위해 유럽에 치중한 논리가 결국 소련의 침입으로 전 국토 도시 파괴되는 모습ㆍ 소련 탓할필요는 없겟지요ㆍ 오늘 날 남한은 미군기지화인데 북한은 중국 기지화가 안된것을 한국인들은 감사해야지요ㆍ전략적으로 중국입장서 북한은 완충 지대전략 차원서 미군처럼 주둔안하고 있지요ㆍ 우쿠라이나 정치인들이 나라망치고 있지요ㆍ 장기화되면 우쿠라이나는 재기 불능입니다ㆍ 결국 미국 유럽이 버린카드지요ㆍ
先生의 말씀을 구독하고 시간날때면 즐겨 듣습니다 조금은 왼쪽으로 말씀하시어도 사람은 누구나 나름 이념이 있슴을 알고 있기에 특별히 문제 없이 잘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정도가 심하시네요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이시기에 말과 글로 어찌하리까? 우리나라 위정자 중 "중국은 큰 봉우리요 한국은 작은 봉우리"라고 하신 분이 있고 또 한분은 "萬折必東" 이라는 글을 중국에 받친 분이 있는데 위글에 先生의 생각은 어떠한지 묻고 싶습니다 같은 저울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萬折必東은 “황하가 만 번 꺾이고 굴절해도 끝내는 반드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런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일이 수많은 곡절과 어려움을 겪더라도 반드시 결과는 좋고 바르게 마무리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로 압니다. 정치인들이 이상하게 해석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라는 식의 해석을 하는데 그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Yeokg 미천한 제게 답변해 주신 것만도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원음을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실지로 그렇게 쓰이나요 원글을 그대로 번역하면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우리나라쪽으로 흐르니 결국은 우리나라로 귀결된다고 해석이 가능합니까? 이는 曲學阿世 , 惑世誣民 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뜻이 어떻게 변하여 있는 지 알고 있슴에도 필요시에는 이글의 해석이 달라지면 그도 경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말씀처럼 역사를 정치로 해석하신다는 글을 잘들었습니다 선생님도 답변과 같이 역사를 정치적으로 인용하시지 말아주세요 저는 정말로 역사학자가 역사를 이야기 하시면 역사로만 이해하며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어는 때 부터 인가 아마도 도올 김용옥교수의 EBS, 강의로 부터 사마천 사기를 해석한 김영수선생까지 중간에 박재희선생님도 계셨지요 우리나라 역사를 민초에게 전달한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그분들의 노력에 심심한 감사를 보냅니다 이런 역사학자 분들이 어느듯 정치적 언어를 사용함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그분들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분들을 말씀을 듣고, 역사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 이제 그분들은 역사학자의 초심을 넘어 정치적 메세지로 유명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역사의 현장을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어떨땐 천년전 역사도 변하고 백년전 역사도 변하더이다 이제 얼마안된 근대사로 서로가 갈라지니, 저는 이를 염려할 뿐입니다 오늘의 역사관이 내일 변하는 것이 인생이니 선생님과 같은 분이 역사를 가르침에 자기 반성과 초심으로 돌아가 있었던 사실을 더욱 추구하여, 저같은 사람이나 혹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정확하고, 명료한 말로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부산성에서 과연 전투가 있었을까? 실지로는 전투가 이뤄졌으면 상당한 피해는 있어도 점령은 힘듬. 사극에서는 결사항전을 했지만 실지로는 그딴거 없었음. 충주성에 병력이 전혀 없었다는것도 이해가 안되는것임. 신립이 아무리 무능해도 병력을 뺀다는건 말도 안됨. 결국 애초에 지킬 의지도 없었다는것임. 만약 일본에 매수당해서 배반했다면 일본이 한양까지 쉽게 진격한것임.
1세부터25세까지 군대가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살기좋은 대한민국 진짜여성해방 대한민국 최초 천만대군화 만들기 프로젝트 안녕하세요 여러분 자식때문에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 모든국민들이 대학교를 무료로졸업하는 세상 사회출발점이 공정한세상 소통이잘되는세상 진짜여성해방 대한민국 국민
불편한 역사도 역사입니다. 다만 다시는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의 시대롤 불편하지 않게 생각하도록 과거를 반면삼고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거죠. 얻어맞는 역사가 가슴아프긴 하지만 이기기만 하는 역사에선 배울 수 있는게 많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