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느 일터에서 일할 때 먼저 일하던 두 여자들이 자기들은 주일성수하고 헌금 많이 해서 복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주일에 일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예수믿는 사람들이라 너무 반갑고 좋아했지만 남편이 아파서 가게가 망했고 뱅크럽 파산의 과정을 겪는 중이라 헌금을 거의 할 수가 없었어요. 월세내면 식료품비가 부족했거든요. 이십여년 십일조도 헌금도 기쁨으로 드려왔지만 그땐 할 수가 없었는데 그들의 정죄하는 비판에 저는 마음이 몹시 아팠어요. 하지만 혼자 울면서 기도했어요. 내 기도로 내 헌금으로 내 정성으로 내가 복받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못해도 아버지되는 하나님은 내 신음소리도 아시고 도와주심을 알게 되었어요. 그 때 저는 다만 주님의 선하신 손만을 바라보았어요. 가족들도 들볶지않았고 그들도 미워하지않았고 다만 기도할 뿐이었어요. 지금은 가족이 회복되었고 집도 있어요. 좋은 교회도 주일에 갈 수 있어요. 하나님을 계산적으로 보면 안돼요. 그 분은 선하신 아버지세요.
백억 있는 사람이 100만원 헌금 한 것과 월세사는 사람이 만원 헌금과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헌금을 크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숫자를 보시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중심과 처지를 보시는줄 믿어요 과부의 두렙돈을 크게 보시고 칭찬해주신것만 봐도 알 수 가 있죠~ 우주만물을 다 갖고 계시고 있는걸 없게도 하시고 없는걸 있게도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실까요? 우리의 마음을 받고 싶으신거라 저는 믿어요 마음을 다 하고 뜻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걸 알게되었습니다 저는 6년전 암4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게 많은 교인들이 너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못해서 심판을 받은거라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누구에게도 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누구에게 비난을 받을까.두려웠습니다 그래서.치료가 끝나고 몸이 다 회복되었을때 교회를 떠났습니다 저는 언제든지.재발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럼 또 제게 올 비난이 두려웠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저와 교제하길 원하셨다는 것을요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지 그것이 나의 원함보다 소중하다는 말씀에 아멘입니다. 나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떼쓰기보다 하나님안에 머물러 있는지, 말씀안에 있는지 자신을 점검케 하는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기도를 기각해주심에 감사할 만한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기도는 우선 태어나서 존재하는 나에대한 감사로 시작 실존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내힘으로 해결할 수없는 문제,과제를 해결을 간구하는 믿음의 행위.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나자신의 삶을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변화의 회계의 참회가 있으면 응답이 있는듯 하다 . 85세 🕊🍇🔥 🤗
기도란 뭘까요? 전 하나님과의 교제한다고 생각해봅니다 문제해결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원하시는것을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디ㅡ 복음전하는것입니다 이세상에는. 마약과 중독과 고난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충만으로 늘 나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살아가는데. 마귀한테 속지않고 살아간다면. 하나님 또한.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시사 승리케하시고. 만민에게 가서 제자삼고 구원을 이루어 나갈때 천군천사를 동원시켜서기도의 응답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신학의 분야 중에 예배학과 설교학은 있는데 기도학은 없다. 너무나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고 매우 심각한 일이다. 기독교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다. 크게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4개의 분야가 있다. 그 중에서 실천신학을 보면 목회학, 목회상담학, 예배학, 설교학,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교회음악학(또는 찬송가학) 등 세부적인 분과들이 있다. 실천신학은 말 그대로 신앙과 교회의 실천과 관련된 신학 분야인데 그 중에는 ‘기도학’이란 게 없다. 예배학도 있고 설교학도 있으며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그리고 심지어 교회음악학(찬송가학)도 있는데 기도학은 없다. “신학교에서 기도학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누군가 하면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기도학이 왜 필요한가? 기도는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냥 하는 것이다, 기도는 배워서 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학문이 될 수 없다, 기도를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기도는 학문과는 무관하다, 기도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영혼으로 하는 것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머리로 믿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믿는 것이다, 기도는 공부한다고 잘 하는 게 아니다, 기도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비신앙적이다, 기도학이라는 것 자체가 경건하지 못한 것이다, 기도학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등등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도학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고 필요 없는 것인가? 신학의 분야 중에 기도학이 없다는 것은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기도는 그냥 ‘막’ 하면 되는 것이고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인가? 기도는 배워서 하는 게 아닌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라는 게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마태복음 6장 9~13절)을 가르쳐주셨는가? 누가복음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마땅히 주기도문의 원리를 잘 배워서 그대로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신자들의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지도해야 할 목회자 후보생들인 신학생들이라면 신학교에서 기도학을 배워야 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닌가? 실천신학에 예배학도 있고 설교학도 있고 찬송학도 있고 선교학도 있는데 기도학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닌가? 기도학이 필요 없다면 당장 모든 신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예배학, 설교학, 선교학, 기독교교육학도 빼야 하지 않겠는가? 신학교에서 예배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설교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선교에 대해서도 가르치면서 기도에 대해서는 왜 가르치지 않는가? 기도만 ‘영적인’ 것이고 예배, 설교, 선교, 기독교교육, 찬송은 ‘영적인’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신앙과 교회의 실천에 관한 신학 분야인 실천신학에 예배학, 설교학, 선교학, 찬송학이 있다면 기도학도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기도문을 배운 것처럼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예비 목회자들을 비롯한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성경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잘 배워야 하고 그렇게 배운 대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학’이란 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그럼 왜 성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까? 기도를 가르칠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지금 우리들이 보는 성경에서 당장 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아직까지 주기도문을 안 빼고 그대로 놔두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근본 목적은 죄로 얼룩진 이 땅에서 잘 멋고 잘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본질인 욕구를 좇지 않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실천을 통해 신의 성품을 얻어 신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다 이에 육으로는 다 죄뿐이므로 이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려 하심의 은혜의 기도를 주심이다 즉 기도를 주심으로 삶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의탁하는 은혜를 베푸심이라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안하다.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의심하게 한다. 불안한 미래를 담대하게 맞이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을 비교해보자. 담대하게 맞이하는 자는 변하는 환경에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갖는다. 반면 그렇지 못하는 자는 끊임없이 현실을 외면, 도피하고 자신은 바뀌지 않은 채 통제불가능한 환경의 변화를 비난할 뿐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내 불안한 미래를 대하는 나의 다짐과 각오가 들어있다. 기도는 불안한 현실과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대하게 맞이하게 해준다. 또한 예측 못하는 미래, 그리고 현실의 불안한 감정을 하나님께 모두 내려놓고 나에게 오는 환경의 변화를 담대하게 마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겠다는 의지이다. 기도를 통해 내가 통제가능한 것들과 내가 통제 불가능한 것들을 구별하고 내가 통제 불가능한 것들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든 응답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불안이 엄습하는 그 순간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나의 상황과 나의 불안한 감정들을 생각하고 입 밖에 내게된다. 기도과정에서 내 머릿속에서는 상황 인식-언어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내 스스로 지금 이 순간 해야할 일들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통제불가능한 것들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이것들에 압도되어 걱정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다. 대신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차분히 하나씩 해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불안함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결과는 어떨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환경의 변화, 위기에 더 잘 대처하고 당면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귀한 말씀 정리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이 내 옆에 이웃과 가족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음에 나의 모난부분과 변화해야될 부분들을 기도를 통해 나의 연약함을 더 알게 하셔서 그것들을 변화하기 위해 기도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여전히 부족한 자녀이지만 기도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내가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는 짐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위로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심에 누릴 수 있는 기도의 복임에 감사합니다 ❤️
저는 주로 밤에 자기전에 누워 영상을 틀어놓고 귀로 듣는데요..목사님 말씀을 선명하게 듣고 싶은데 bgm이 깔려있어 항상 아쉽습니다..ccm 좋죠..맘도 뭉클해지구요..그런데 목사님 말씀이 잘 안들리고 그 좋은 ccm이 시끄럽게 느껴집니다... 음악을 아주 작게 깔거나 말씀만 깨끗하게 들려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요한계시록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시선으로 불화를 바라보게 되어 상대의 심리의 뿌리를 보게되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게되고 그것을 못보고 화를 낸 저의 짧은 소견을 반성했습니다 복수하려다 더 큰 사랑을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제 마음의 근육을 단단히 단련하고 그릇을 키우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가족을 살피고 도와주겠습니다
유월절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수있다면 예수 님이 오실 필요 없지요 유대인 의 유월절이고 유대인 들의 할례이지 요 율법또한 유대인 에게 주신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의 몸 으로 다 이루셨지요 예수님의 성만찬의 의미는 옛날 유월절 과 틀리지요 속칭 하나님의교회 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님니다 이단입니다 그곳은 이단축에 도들지 못합니다. 성경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구원이 있습니다 목사나 어느 누구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가지도말고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