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 나머지 쓰레기 3왕자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은 싸패짓하면서 백성들을 강간, 살인, 약탈 온갖 짓 다 해도 봐줬음. 임란으로 인해 민심이 자기한테서 광해한테 가니 자식이 아니라 라이벌로 보게 됨. 인조 = 전쟁은 지가 망해서 아들이랑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감. 잡혀간 아들내외는 스스로 농사짓고 돈 벌어서 포로로 끌려간 조선백성들 사서 고향으로 보내주면서 민심 겟또다제★ 청의 문물까지 옆에서 보고 지냈으니 인조입장에선 자기보다 민심얻는 장남, 청나라의 지지를 받는 아들이 고까운거지. 영조 = 다 늙어서 얻은 후계자한테 너무 조바심냈음. 애를 애로 키워야지, 애한테 대입교육시키다 애 인성 버리고 자식 잃음. 애초에 부부관계라도 좋았으면 문제없는데 정실을 무고히 미워하다보니 정실(중전)을 어머니라고부르면서 효도하는 세자가 당연스레 미워진거지. 까다보니 그냥 존재자체가 밉살맞게 되서 까방권 상실이 된거고.
후대가 자신의 자식인 세종과 그 후손들이냐 적대세력(인목대비와 능양군 인조)들이냐의 차이 아닐까요? ㅎㅎ 선조에 의한 후계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트라우마로 ..그러면서 역모 고변만 올라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광해. 그 고변의 대표적인물이 이복동생이자 선조의 적자, 자신의 계모이자 영창의 생모인 어린 대비가 버티고 있는데 역모의 ㅇ자만 들어도 영창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같아요.
무리하게 궁궐을 지은 건 확실히 좋은 판단이라 볼 수 없지만 반역자와 반역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조리 벌하고 세상과 단절 시키고,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건 맞는 판단이라 봄 반역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어 있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인 게 맞고, 후금의 기세를 보고 명의 편을 안 든 광해군의 판단은 정말 대단함 그 땐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결과를 아는 미래 입장에선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음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고 결국 1만 이상의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반역은 딱히 실체는 없었고 명백히 무고로 드러난 사건에서조차도 무고죄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서 잘못된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반란이 난 건(인조반정) 수차례 물증과 구체적 정황이 보고되었음에도 보고를 묵살하다가 저항도 못해보고 몰락했죠 기본적으로 능력이나 판단력에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뭘 높이 평가해? 허거운날 궁궐 공사 지어대서 백성들 삶 피폐하게 만들었구만 그때 광해군은 특별 관청을 만들고 조도사라는 특별 관직을 만들어서 전국 각지에 파견함. 이들은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광해군의 명이라면서 백성들 수탈했음. 사르후 전투로 정예병 1만명이 전사하자 명나라가 위로금을 줬는데 그것마저 궁궐 만드는데 쓴게 광해군임 그리고 중립외교는 애초에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애초에 세치혀로 어떻게 나라를 보전함? 고려도 세 차례의 거란 침입을 막아낼 정도의 국력이 있었기에 송나라 요나라 여진족 사이에서 중립외교 한거지 조선마냥 허약한게 천하에 들통났어봐 중립외교? 니네가 뭔데 하면서 허거운날 요나라 여진족 처들어왔다 이게 실제로 고려 말 상황이었다. 여진족, 왜구, 북원, 홍건적 툭하면 왜적들 침입했지 이처럼 중립외교는 힘이 있어야 가능한거고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군대를 양성해야하고 그 군대를 양성하고 유지시켜려면 백성을 잘 먹여살려야했는데 그 백성을 아주 마른 오징어마냥 쥐어짠게 광해군이야
@@보고보고-x3q 즉위한 지 3개월만에 광해군은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 최초 시행한 임금입니다. 그뒤로 재위 15년간 경기도 지역의 대동법을 중지하거나 폐지한 적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흉년일 때나 대동미를 거두는 시기에 백성들에게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의견도 냈으며,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시행하는 조세개혁법이니만큼 대동법의 장점뿐만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경계심도 피력하며 전국 확대 시행에 반대했을 뿐입니다.
@@역덕후-z1y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맞죠. 저는 뒤를 이야기 한 것이고 님은 앞을 강조한 것이고, 솔직히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강조) 전혀 다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강조하는 좌파는 왜 만주국 관련자를 친일이라고 비난하는가? 둘다 만선사관인데? 이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죠.
너무 중화사상과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는 입장에서 설명하시네; 당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중립외교하면서 군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고 영창대군도 아사, 병사, 증살, 잿물까지 전인살해인지도 인조가 왕이 되고 나서 기록한 것을 보면 증살이 아니라 음식에 잿물을 넣어 죽게 했다고 남긴 것을 보면 증살이라는 너무나 잔인한 방식으로 광해군을 더욱 폭군으로 보이게 오해할 만한 내용을 다루시네요;
@@pittasdfasdf 어떤 말인지는 충분히 공감 저도 다 아는 이야기이긴 함 근데 저런 방송은 기본적으로 우리 같은 역사덕후들을 위한게 아니라 일반국민들 상대로 해야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춰야함 시청률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조금 더 전문적이고 역사적추론까지를 원하면 입맛에 맞는 유튭채널을 파야함 요즘은 그런 채널 많더라고요
0:07: 👑 광해군은 가족을 살해하고 역모를 짜는 등 충격적인 행동을 펼치며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일으켰다. 0:07: 1613년 3월경상도 문경새재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 0:20: 강도들이 상인들을 살해하고 수백냥을 약탈 7:09: 광해군의 가족을 살해하고 역모를 짜는 행동 9:50: 명나라의 군대를 요구하여 조선의 후궁과 싸울 수 있는 군대를 파견 10:13: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일으킨 광해군의 행동 10:18: 🏰 광해군의 궁궐 공사와 풍수질에 대한 이야기 10:18: 광해군이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궁궐 공사에 집착한다. 13:35: 궁궐 공사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대동법을 시행한다. 17:06: 광해군이 풍수질과 인왕산의 위협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18:23: 👑 광해군의 쿠데타와 인조의 왕위 차지 18:23: 광해군의 집착과 쿠데타 20:39: 인목대비의 등장과 쿠데타 완성 21:50: 쿠데타를 완성하기 위한 명분 22:44: 인조의 왕위 차지 23:07: 광해군과 인조의 연결 Recapped using Tammy AI
첩으로 와서 이미성장한 자식이 왕으로 있다면 그왕이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같이 동참 해야 두번째들어온 왕 부인으로서 제대로인듯 그러나 ㅡ 인목대비는 나이든 왕 자식을 낳아서 광해군을 시시비비 근처인을 동원하여 광해군 을 자극 함 결국은 ㅡㅡ아들 뜨겁게 쪄 죽임을 당하고 광해군도 좋지 못한 결과 였네요
광해는 세계정세를 잘 파악한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망해가는 명에 사대하는 당시 위정자들이 문제였지요 태종 세조는 광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똑바로 인식합시다 광해는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인조는 아들 며느리 손자들까지 싸그리 죽였고 숙종은 환국정치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광해는 너무도 아까운 임금이었습니다
영화 광해를 역사로 생각하지 마세요. 대동법도 광해군은 소극적이었고 김류와 같은 신하들 중심으로 이뤄진겁니다. 광해는 고변이 들어오면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왕 본인이 정쟁에 휘말린 정치적으로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단순히 태종, 숙종과 비교하며 사람을 죽였니 말았니 하는 것은 시대를 반영하지 않은 역사시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는 중앙집권체제에서 왕이 그 중심을 잡았냐는 것입니다. 광해는 그런 면에서 보면 실격입니다. 또한 광해가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다? 그것도 의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후대에 봤을 때 그렇지만 광해군 당시까지 중원의 패권은 명나라였습니다. 인조 때까지도 명과 청 어디가 새로운 제국이 될 것인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영원성 전투에서 홍태종은 크게 패퇴했죠. 결국 광해군은 당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자격 미달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공감 100% 말씀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 정초본원문을 국역한 역사학자겸 한문학자인 임승표 박사님께서 [광해군일기]를 완역한 뒤에 다른 실록에 비해 특히 주의하라는 메뉴얼을 남김. 1. 다른 실록과는 다르게 초초본의 기초사료(승정원일기, 시정기)의 90% 이상 산실 2. 다른 실록과는 다르게 턱없이 부족한 초초본을 메우기 위해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 3. 인조반정에 의하여 집권한 서인에 의하여 광해군일기가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이 상당 부분 작용하였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함 그러므로 "[광해군일기]는 사료 비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라고 [광해군일기]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국역한 임승표 박사님께서 친절하게 언질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계에서조차 [광해군일기]에 대한 검증은 커녕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실록이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인용하면 그대로 믿어라는 어처구니없는 요즘 광해군 억까 열풍에 그 도가 지나쳐서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남깁니다.
제가 따로 댓글을 달았는데 영창대군 증살설이 의심스럽습니다. 가짜뉴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직후에 유배지 영창대군을 관리하던 강화부사 정항이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반정의 대의명분이 폐모살제한 광해군을 응징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정항을 거열형에 처했어야 할텐데 정항이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는 건 정항이 유배지의 영창대군을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이를 광해군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해서 그 장계를 반정세력이 발견했을 가능성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네요.
@@역덕후-z1y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 영상에 따로 올린 댓글 덧붙입니다. 님께서 벌써 읽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대댓글 읽으실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덧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창대군 증살설이 사실일까요? '폐모살제'한 광해군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강화부사 정항이 처벌받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임금을 쫓아낸 어마어마한 일의 대의명분이기 때문에 반정세력 입장에서 강화부사 정항은 설령 실제로는 죄가 없더라도 죄를 만들어서라도 거열형에 처해야 할 인물인데 처벌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실관계는 하나뿐입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유배보내고 유배지를 관리하던 강화부사 정항에게 특별히 지시해서 영창대군에게 조석으로 맛난 음식 바치고 어린 대군이 춥지 않도록 구들장에 불을 때주었고 이를 광해군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한 경우죠. 영창대군 증살이라... 이게 가짜뉴스일 가능성 없나요? 시골집에서 온돌방 데우면 구들이 자글자글 끓어서 정말 뜨겁습니다.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 춥지 말라고 구들장 데운 걸 '증살'이니 뭐니 가짜뉴스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623년 반정 성공 직후에 정항을 문초해봤는데 정항이 영창대군을 조석으로 보살핀 문서가 나왔다면? 아무리 반정세력이 쿠데타를 성공시킨 직후였다고 해도 영창대군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 정항을 처벌할 수는 없었겠죠. 인목대비가 정항에게 고마움을 느껴서 정항 처벌을 강력히 반대했을 수도 있고요. 요즘 가짜뉴스 얼마나 많습니까? 조선시대에는 가짜뉴스가 없었으리라는 기대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2023년입니다.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안강현-u2e 이영상에 나오는 최태성 강사도 승자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 대한 입체적이고 교차적 검증없이 반정세력들이 만든 "광해군=폭군" 등식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답답했는데, 안강현님의 역사적 식견에 사이다처럼 마음이 탁 트이고 시원해졌습니다. 안강현님의 주장에 완전 동의하며 멀지 않은 시점에 신병주 교수님같은 분이 안강현님의 영창대군 증살설의 반전 가설을 채택한 논문이나 영상으로 접하기를 바랍니다.^^
같은 사실도 보는 관점이 다르거나 풀어나가고자 하는 목표가 다르면 이렇게 달라지나보네요. 저는 중립외교+실리적인 정치를 하고자 했으나 사대정신에 입각한 신하들에게 결국 밀린 분으로 배웠고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복동생 죽이고 계모 유폐시킨 것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조선 왕들 중에 더 한 행동을 한 사람도 있고(세조, 왕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연산군), 임진왜란 때 나라 버리고 아들 질투하는 정신나간 애비 대신해서 나라 수습한 등 공도 있고, 전체적인 상황과 다른 왕들과 비교해 봤을 때 광해군이 좀 안타깝기는 합니다.
애초에 인조애비가 조선 선조임금의 3대 쓰레기아들 임해, 순화, 정원군 중 하나임. 사도세자가 영조의 괴롭힘으로 광증의 발현으로 100명을 죽였는데 저 놈들은 1년에 100명씩 죽인 싸이코패스들임. 심지어 인조는 저런 싸패를 아비라고 왕위추존까지 함ㅋㄲㅋㄲ 100명 죽인걸로 욕먹는 사도가 보면 개억울할 듯
권력 싸움에 패륜이 어딨냐? 권력 싸움에서 꼴랑 형제 정도 죽인거는 양반아니냐 게다가 그 형제도 친형제도 아니고 이복형제아니야 유럽 중세를 봐라 아버지 죽이고 왕되고 친형 죽이고 왕되서 형수까지 내름하고 이런게 수두룩한데 누가 폐륜이라고 하냐? ㅋㅋ 그놈의 유교, 성리학 씹선비질 때문에 폐륜이니 뭐니 개소리하는거지 ㅋㅋㅋ
정신병자까진 아닌듯합니다 어떤왕이 역모를 꾸민다는데 넘어갑니까.. 그리고 인목대비는 단 한번도 광해를 아들이라 생각한적 없습니다. 광해는 자주 인목대비를 찾아 인사를 하러갔지만 받아 주지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망가진 궁궐재건이 무리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와서는 참 보기좋고 명은 조선이 도와줬어도 멸망 했을겁니다 일본과의 전쟁의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또전쟁이라뇨 그리고 무엇보다 그다음 왕이 인조라는걸 인조는 아들을 죽였고 광해의 반대정책인 친명배금 정책을 고집하다 또 전쟁을 나게했던 인물입니다 광해가 피를 묻혔지만 폭군까진 아닙니다
@@user-ml7vm3lc1y 표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암투에 의해 독살에 노출되었던걸 생각하면 안 미치는게 이상하죠...실제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를 열었던 윌리엄 1세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정확히는 실리외교, 중립외교죠 한쪽편을 드는듯 하면서도 명과 금의 상황을 이용하여 이리저리 재니 양국에서는 빡칠 수 밖에요...물론 당시 조선의 상황이 매우 힘든 형국이라 왕의 입장에서는 눈치를 살펴야하고 신료들의 반대도 고려해야 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하나 복구도 다되지 않은 땅에, 재정부족이라 모두가 반대했음에도 강행해서 고통을 안기고 그를 위해 북방의 군비까지 끌어썼다는 주장까지 있는데다 사르후 전투 이후 뒷처리도 개같이 하고 결국 이런저런 것들이 누적되어 반정의 빌미를 주게 된게 좋지 않다고 봐서요 그리고 광해군이 욕을 크게 먹지 않는 이유는 조선 최고의 양대 암군인 선조와 인조 사이에 끼어있었기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평가를 잘받은 편이라 봅니다 제 주관으로는 그렇습니다
파병은 하는게 맞기는 맞지 파병받았으면 해야되는것 국가의 신뢰 문제라서 문제는 그당시 명나라군이 몇일만에 전멸당해버렸음 조선군이 도착했을때 절반이 전멸당하고 숫자로도 그당시 금나라군이 월등히 앞서있엇고 8기군 기병만 6만이고 홈그라운드고 바로 보충이 가능했음 조선군은 1만명 조금 넘는 수준 학살당하는것은 100프로 확정 실제로 학살당했고 상당수는 항복해서 금나라군이 됬음
1. 즉위한 지 두달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의지를 갖고 선혜라는 키워드를 담은 비망기를 내림. 이미 광해군은 방납의 폐단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비망기에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선혜청이란 이름도 비망기를 통해 백성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면서 ‘무선일푼지혜(務宣一分之惠)’, 즉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務宣一分之惠]’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며 여기서의 은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은혜입니다. 2. 광해군이 비망기를 내린지 2개월 뒤에 광해군의 선혜를 시행하고자하는 의지에 화답하는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의정 이원익입니다. 경기지역에 대동법 실시를 제안하고 광해군이 바로 수락하여 전교를 내립니다. 3. 즉위한지 3년뒤에도 광해군은 이미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중이었지만, 대동법의 시행과정에서의 여러 잡음과 부작용을 줄이면서 확대 시행에 관심을 가지고 과거 시험 최종 전시에 대동법, 양전, 호패법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논술문제로 직접 출제할만큼 대동법에 진심인 왕이었습니다. 민생에 초점을 맞춘 과거의 책문 문제는 임란 전후 복구 사업으로 광해군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는 3가지 정책인 대동법, 양전, 호패법의 실시와도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