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님께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도,좌절하지 않고, 그가 지금 어떻게 또 아티스트의 길을 가고 있는지, 우리는 그의 학벌, 명성이 아닌 진짜로 그가 모든 껍질을 벗고, 어떻게 자신의 작품세계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모습을 지금 보고,듣고, 느끼고 있으며, 우리 한국인들중 진짜로 유진님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걸, 그가 시련의 세월을 통해 더 잘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팬들은 그가 꾸준히 연구하고 가는 길을 함께 가며, 응원하고, 그의 작품들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최고의 그를 향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ㅡ60대 할머니 팬이예요.❤
부럽다. 어릴적 피아노 시작했을때 이렇게 되고 싶었지. 누구나 클래식 음악을 배우는 과정에서 콩쿠르 나갈때 마다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본인 본연의 실력과 재능을 확인함을.발견 하게된다. 음악을 시작 할때 동기부여의 영향은 매우크다. 나의 동기부여는 옆집 부잣집 딸의 들리는 피아노 소리 였다. 단 한번도 배운적도 악보도 본적 없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입으로 불어서 치는 건반이 모자란 호스 아코디언 으로 치곤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형편이 어려워 끝내는 예고에서 교수님렛슨 사사 받는것을 접어야 했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피아노를 사랑한다. 처음 피아노건반을 보고 느낀것은 그냥 아름다웠다. 부모님께 감사하다
@@user-bj6z 음악성 없는데 국제 음악 대회에서 입상할까요? 지금은 옛날과 달리 한국인들 음악성도 뛰어납니다 주커만 정경화에 눌려서 동양인에 대한 열등감 높은듯 이프로그램 녹화도 1995 년 에 된거고 우리나라 한예종 만든 취지도 미국의 Conservatory 개념으로 만든겁니다 줄리아드처럼 ^^
천재는 재능은 뛰어나도 가난하고 둔재는 돈은 많지만 재주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하의 줄리어드라도 비지니스이고 그렇기에 돈이 있어야 돌아가니까 한국같은 나라에서 엄마가 돈으로 처발라 키운 꿈나무를 재주가 좀 떨어져도 할수없이 숱하게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고 그런 경우가 한국유학생이 열이면 아홉이었을테니 그 주커만이라는 교수가 그런 심한 발언을 했을 겝니다. 성악의 경우는 모르지만 기악의 경우 줄리어드 출신이라는 사람들 중에 사람이 손은 날아가게 놀리는데 막상 자기가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이야길 들은 일이 있읍니다. 물론 자기가 내는 소리를 전혀 모른다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대가들이 들었을 때 분명히 문제가 있었겠지요. 피아노같은 건반악기는 소리의 위치가 눈으로 찾을 수 있게 정해져 있으니까 다소 눈가림이 가능하지만 바이얼린의 경우 스스로가 손으로 짚어야 할 자리를 귀로 들어가며 찾아야 하니까 문제점이 들어나기가 쉬웠을겝니다.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일부 수긍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너무도 가난해서 종이에 그린 건반을 놓고 연습한 한 한국 아가씨가 기준이 엄청 까다로운 콩클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기립박수까지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이 소식을 들으니 희비가 엇갈리는군요.
태클이긴 합니다만, 그런 어려움을 이겨낸 아가씨가 듀오 공연에서 건반 문제있다고 파트너와 별 상의도 없이 무성의 하게 백스테이지로 나가더니, 그 뒤 사건에 대한 설명도 없이 프로그램을 건너 뛰고. 앵콜은 커녕 아무일 아닌듯이 넘어가려는 거에 참.... 관객은 한곡 한곡 들으려고 몇달을 기다렷는데 ㅋㅋ 코로나 시기라 딱히 투어도 없는 시기인데.. 걍 쌩하고 가버리니 ㅋㅋ 사과의 한 마디 없이. 잘못된 조율을 극장문제지만 나름 팬이라서 어렵게 간 공연장에 한마디 없이 공연끝내는거 보고 ㅋㅋㅋㅋㅋㅋㅋ
@@김김-x8f7f 그런 일도 있었군요. 참 유감스럽습니다. 편을 들겠다는 건 절대로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면서 댓글을 올립니다. 일반적으로 대가들은 악기에 조금만 이상이 보여도 연주를 거부합니다. 보통사람들은 모르지만 대가들은 잘못된 소리에 대단히 민감해서 조율은 물론이고 악기의 메인테넌스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대번에 알아차리고 그 스트레스를 이기기 못해 신경질적이 되는 것으로 압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급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연습도중 잘 안되면 지휘봉을 확 꺾어버리고 집으로 가버리곤 했다는 일화도 있고, 지휘자와 프리마돈나가 연습도중 으르렁거리는 일은 다반사라고 들었습니다. 70년대까지도 한국에 제대로 된 피아노라곤 단 두대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이화여대에 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어느 교회 (아니면 명동성당?)이었던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70년대에 어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한국에 연주여행을 왔었는데, 연주하기로 되어있는 시민회관에 있는 피아노를 미리 쳐보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I can't play" 하더랍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화여대에 있는 것을 날라다가 조율을 한 후 테스트해보라고 했더니 몇번 키를 두드려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마지못한 표정으로 "이만 하면 됬다" 하더랍니다. 여담이지만 한국이 오늘같이 남들도 다 알아주는 풍성한 나라가 된 것은 21세기 들어와서부터입니다. 한국 최초의 가수라고 할만한 윤심덕이 100년전에 했던 노래가 담긴 레코드를 듣고 쇳소리난다고 타박을 하는 어느 서울대학 출신 여자분에게 좀 심하게 핀잔을 준 일이 있습니다. 당시1920년대의 한국은 한글 맞춤법도 없던 시대였고 서양음악이란 자체가 전무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덕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음악이란 장르에 눈을 뜨게 된 것이고 땡가난뱅이 나라 조선에서 그 노래의 레코드판이 10만장이나 팔려나갔고 유성기가 그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답니다. 사람을 평할 때 그 사람이 살았던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배경을 빼놓고 말하면 옛날 사람들은 모두 무식한 돌팔이나 원시인으로 취급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조수미가 "밤의 여왕"이란 노래를 불렀을 때 세계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으로부터 "신이 창조한 목소리"라는 격찬을 받았을 만큼 장족의 발전을 한 한국의 음악이 있게 된 데는 선대 음악가들이 흘린 피눈물 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