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한 이지함선생이야말 로 진정한 이 시대가 원하 는 표상이다. 이순신장군또한 신분보다 능력을 먼저 살펴본 진인이 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것 이 분명하다. 그래도 심열 이란 사람을 잘만나 양인으 로, 선비로 자기뜻을 그나 마 펼칠수 있었을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엔 주인의 재량 것 노비도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 조선 사회였다 공노비 사노비가 조선 전체 인구 중 5,6% 정도이고 그 시대 세경을 받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이 외거 노비는 요즘 세상으로 치면 월급 받는 직장인이다 조선은 농경 사회이기에 평민이 가질수 있는 직업이 외거 노비 였다 외거노비의 비중이 조선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서기는 공노비 그러나 머리가 좋고 뛰어나면 주인의 재량 것 면천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 조선이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처가살이를 했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신사임당이라고 해서 5만원권 지폐 인물로 선정 되었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꽤 많았다 현모는 될지언정 양처는 아니라고 ㅋㅋ 조선 전기의 여성상과 후기의 여성상이 엄청 달랐기에 그런 모순이 일어난 것 조선이 유교를 수용하였으나 남녀 평등을 강조 하였으나 약간 여성의 입지가 더 높았다 재산 제사권 여자도 동등하게 받았다 시집을 가도 마찬가지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옛 세종 시대에 일본에 전파해 준 유교를 저희식데로 변화를 시켜왔고 임진 왜란을 겪고 그 나라에 통신사로 갔던 이들이 보고 느낀바를 왕에게 전하긴를 그 일본의 여자들은 우리나라의 여자들처럼 드세지도 않고 무릎꿇고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들더이다 이리 보고 하게됨 그 영향을 조금 받았고 우리나라 여자들도 저 일본 여자들처럼 온순하고 지배하면 않되겠냐고 ㅋㅋ 그러면서 나라의 국고를 체우기 위해 매관매직은 물론 그 전까지는 시행하지 않았던 열녀문에 벼슬 하사를 합니다 조선 전기에도 열녀문 제도가 있었기는 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았다
조선 전기의 여성상과 후기의 여성상이 엄청 달랐기에 그런 모순이 일어난 것 조선이 유교를 수용하면서 남녀 평등을 강조 하였으나 약간은 여성의 입지가 더 높았다 재산 제사권 여자도 동등하게 받았다 시집을 가도 마찬가지 그러나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옛 세종 시대에 일본에 전파해 준 유교를 저희식데로 변화를 시켜왔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이들이 그곳의 여자들을 보고 왕에게 이르기를 남편을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여자들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하나 둘 혜택을 지워 나갑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국고가 텅텅 비게 되었고 양반이나 관리에게 빼앗는다 이 양반들 자기것 뺏기고 좋겠어 일반 평민들이 가진 걸 고리대금처럼 빼앗아 부를 축적해 이때 이후로 매관매직 등등 온갖 부정으로 열녀문에 과거 출사 기회를 주면서 여자들에게 족쇄가 됩니다 재산 제사권도 모두 빼앗고 출가외인이란 말도 이때부터 생긴 말이네요 실제 조선은 그때 망했다 보는게 맞는 겁니다 조선의 유교가 아닌 일본의 유교를 따르고 제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저희 배 불리기에 혈안이 되는 실제 이순신으로 인해 7년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선 후기 시대는 일본의 식민지 국가나 다름 없었다네요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 그래서 1900년대 일제 식민 통치를 당한거죠
외세 에 나라가 풍전등화 인데 아버지 와 아들 아버지 와 며느리 와의 권력다툼 이리히여 조선 이 망했지 저 때나 지금이나 나라 걱정 민생 걱정보다 자신 들의 영달만 쫏는 위정자 들 지금의 국회 의원들 아니겠는가? 국회 의원 이면 친 국민 파 들 이지 권력 에 붙어 친 아무개 친 아무개 이르는 자들이 무슨 나라 와 국민 걱정 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