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수비하던 병력은 시위대였지 훈련대가 아니였습니다. 훈련대는 일본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부대란 이유로 배척당해 이미 해산하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시위대를 만들어 이들에게 궁궐 방어를 전담토록 했었습니다. 사변 당시 경복궁에는 시위대 1개 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졌을까? 그것은 그들의 부실한 속사정 때문입니다. 훈련대는 일본의 지원하에 충분한 무기를 보유하고 잘 훈련되어있었던 것에 반해, 창설된지 얼마 안되는 시위대는 훈련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무기 부족이 심각했습니다. 훈련대와 달리 일본이나 다른 열강들의 도움 없이 조선 조정의 자금만으로 양성된 부대였습니다. 총기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탄약 부족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시위대가 사용하는 무기 상당수는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일본군에게 빼앗기지 않을려고 경회루 앞 연못에 투기해버렸던 무기들을 수거해서 수리한 것들입니다. 총기는 어떻게 수리해서 쓴다고 해도 탄약은 다시 건져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훈련대의 탄약을 시위대에 보태도록 하면 되지 않았겠느냐 싶겠지만 당시 훈련대는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무라타13식 소총을 쓰고 있었고, 시위대가 사용한 소총은 레밍턴 롤링블록이라 탄약이 서로 호환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레밍턴 롤링블록은 이제 구식이라서 지방 군영에서나 쓰고 있었고 경군은 마우저를 사용하던 추세였습니다. 일본의 입김으로 무라타13식을 도입하기도 했구요. 한양 한가운데서 복무하는 시위대로선 레밍턴 롤링블록에 사용할 탄약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이리저리 부족한 탄약을 수집해봤지만 1개 대대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탄약을 지급해줄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광화문 일대에서 얼마간 교전을 벌이고 나서 시위대의 탄약은 고갈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시위대 병사들은 훈련대를 피해 달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낭인사무라이라고 하시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들은 낭인사무라이가 아니였고 실제 신분은 기자, 대학생, 군인 등으로 이루어진 우익집단들이었을 뿐 입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미우라의 단독 행동인것처럼 이야기 하시는데 그것 역시 잘못된 내용입니다. 미우라는 을미사변의 실행자였을뿐 그것의 기획자는 일본 정부였는데 왜 축소해서 이야기 하시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