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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후 조선은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까? 조선을 뒤바꾼 정조의 책임 

역사돋보기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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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се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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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536   
@user-zj1eu5oi1l
@user-zj1eu5oi1l 3 месяца назад
태종이 세종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청소를 했는지,,,,,,,,,
@user-lg4qw5xx5w
@user-lg4qw5xx5w 25 дней назад
ㅎ, ...결과적으로 세종이 혜택을 본 것은 맞지만 과연 그것이 세종을 위 해서였을까? 강고한 자신의 권력욕과 현시욕을 위한 명분 쌓기는 아닐런지, 인두겁을 쓰고 그 숱한 피를 뿌리고 중전 친가를 몰살시키다시피 한 결과가 세종이후 문종이 겨우 2년여만에 죽고 적장자 단종이 숙부인 수양에게 비참하게 죽어 갔으니 그의 명분은 망상에 싸인 소인베의 단견일 뿐이다. ...단종 사후 모든 조선의 왕은 수양의 핏줄로만 이어져 왔다. 즉 태종 세종의 핏줄도 방계 왕족일 뿐이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user-nw2gf9dn3t
@user-nw2gf9dn3t 3 месяца назад
전제왕조의 군주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됐을 때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상황을 정리해 놓는 것도 큰 업적이죠..그 중 가장 기본은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살아있는 것.. 정조는 그걸 못했고, 태종 이방원은 그걸 퍼펙트하게 해냈죠..
@kimttx
@kimttx 3 месяца назад
역모로 똑똑 왕손이 다 죽으니 머저리만 남아서 결국 망함
@kimttx
@kimttx 3 месяца назад
왕손이 무능하니 결국 세도정치로 대충 굴러갔는데 흥성대원군이 다 말아먹음
@stressbook9832
@stressbook9832 2 месяца назад
세종의 업적은 아버지 이방원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jsm9252
@jsm9252 2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승하당시 아들 순조가 불과 10살 어린나이였는데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자 세자가 된지 7개월만에 갑작스레 왕이된거죠. 결국 34년 즉위내내 안동김씨 세력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user-nm7pp7gc9n
@user-nm7pp7gc9n 2 месяца назад
그건 정조도 어쩔수 없었던 운명아닐까요? 확실한건 정조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고 조선을 개혁하려했던 군주임에는 틀림없죠. 정조의 꿈 또한 태종처럼 자ㄴ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기거하며 자신의 아들이 선정을 펼칠수 있게 뒤에서 도움을 주려했었죠. 하지만 그꿈은 실현되지 못했죠.
@chulido74
@chulido74 2 месяца назад
오류가 있는게 결과적으로 외척이 생긴 것이지 정조가 의도한 것은 아님.
@user-qy8yj1rr1g
@user-qy8yj1rr1g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가 아니었어도 조선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정조시대인 1700년대 후반에 서양은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그보다 200여 년 전인 1500년대 중반부터는 약 150년 간 진행된 과학혁명으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배출되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회를 만들어 토론과 함께 논문을 발표하면서 물리, 광학, 역학,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과 미적분학 등의 수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신문물과 신학문을 접하여 실학이 태동하기도 했지만 2천 년 전 서적인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을 버리지 못 하고 여전히 성리학에 집착하여 학생들에게 이들 구닥다리 교재만 밤낮으로 달달 외우게 하면서 서양과 같은 근본적인 교육개혁은 외면하였으니 그 후의 결과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kaiserthum
@kaiserthum 3 месяца назад
2천년전 서적을 버리지 못한건, 서양도 똑같아요. 서양도 플라톤 서적가지고 왈가왈부하면서 철학과 과학적 사고를 발달시킨겁니다. 그리고 조선 1개국 vs 서양 00개국 비교가 맞나요? 서양을 비교대상으로 하려면 동양이나 아시아를 비교대상으로 해야 맞습니다. 일본 서구화도 교육개혁이 있어서 일어난게 아니라, 반란 성공후 서구화가 일어난 후에 교육개혁이 일어난 겁니다. 전후가 달라요. 조선이 망한 가장 큰 원인은, 2개의 양요로 국방력이 소진되었을 때, 일본이 운요함으로 문을 땄고, 이후 겁박외교로 군대에 수도를 점령당해 국정이 좌지우지 당해서 끊임없이 방해와 견제당해 군대를 못 키웠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원인은, 내부에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가진 반란군인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서구화라는건, 일본의 케이스를 보면 20년 내에, 즉 1세대 내에 될 수 있는 것인데, 조선과 청은 그 반란세력이 다 진압당했던 것이 주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전복불가의 반란세력'은 국력을 소진하는데 일조하고요. 이는 다르게 말하면 일본은 반란이 성공할 정도로 사회의 안정성이 떨어져 변화했던 것이고, 조선과 청은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무미건조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임계점이 달랐던 것이지, 좋다 나쁘다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산업혁명은 서양에서도 오직 "영국"에서만 발생했던 특이한 사건이고, 영국을 중심으로 주변국이 그 영향을 받은 것이지, 서양 전체가 산업혁명을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octoberproj
@octoberproj 6 дней назад
그리스 로마 고전에는 플라톤만 있는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과학적 지식과 사고를 다루는 것들도 있고,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누스의 의학, 무엇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 있습니다. 과학혁명 당시 유럽은 이러한 고전의 재발견과 더불어, 인접한 아랍문명으로부터 전수된 대수학 등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발전시킬 토대가 마련된 상태였습니다. 사서삼경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유학적 지식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서양의 고전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규칙을 찾아내는 논리학과 추론의 전통에 바탕을 두지만, 동양의 고전은 단순히 '도덕서'이거나, 자연에서 관찰된 내용을 기록할 때도 장황하게 사실들만을 망라한 기록서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서양의 고전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론을 추구했던 반면, 동양의 고전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우표수집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건 맞지만, 무역, 금융을 비롯한 수공업 기술 발전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의과대학인 파도바 대학과 최초의 (근대적) 은행도 이탈리아 반도에서 나왔고요. 네덜란드에서 촉발된 상업의 급격한 발전이 전파되면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촉발시키게 된 겁니다. 게다가 상업과 무역의 발전은 이웃국가의 정세와 발전을 항상 주시하며 경계해야 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겁니다. 반면, 조선 후기 지배층은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혁명적 변화를 무시하거나 외면했습니다. 이는 상업과 교역을 천시했기 때문에 타국의 정세변화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급격히 서구화되는 동안에도 쇄국정책을 고집하다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을 겪으면서 그제서야 떠밀리듯 서구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죠. 청나라나 조선의 체제가 동시대 유럽국가들에 비해 안정돼 있던 것 역시, 자국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대비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타국보다는 국내 권력다툼에 몰두하게 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요약하면, 서구의 고전은 인간의 탐구정신을 증진시키는 자연철학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반면, 동양(중국)의 고전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제한하고 억제하는 데 중점을 둔 윤리철학에 근간을 뒀기 때문에, 고전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그리고 중국)의 체제는 이미 서구열강과 경쟁이 불가능했습니다.
@sineiraetstudio9444
@sineiraetstudio9444 6 дней назад
그리스 로마 고전에는 플라톤만 있는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과학적 지식과 사고를 다루는 것들도 있고,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누스의 의학, 무엇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 있습니다. 과학혁명 당시 유럽은 이러한 고전의 재발견과 더불어, 인접한 아랍문명으로부터 전수된 대수학 등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발전시킬 토대가 마련된 상태였습니다. 사서삼경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유학적 지식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서양의 고전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부터 새로운 규칙을 찾아내는 논리학과 추론의 전통에 바탕을 두지만, 동양의 고전은 단순히 '도덕서'이거나, 자연에서 관찰된 내용을 기록할 때도 장황하게 사실들만을 망라한 기록서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서양의 고전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론을 추구했던 반면, 동양의 고전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우표수집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건 맞지만, 무역, 금융을 비롯한 수공업 기술 발전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의과대학인 파도바 대학과 최초의 (근대적) 은행도 이탈리아 반도에서 나왔고요. 네덜란드에서 촉발된 상업의 급격한 발전이 전파되면서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촉발시키게 된 겁니다. 게다가 상업과 무역의 발전은 이웃국가의 정세와 발전을 항상 주시하며 경계해야 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겁니다. 반면, 조선 후기 지배층은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혁명적 변화를 무시하거나 외면했습니다. 이는 상업과 교역을 천시했기 때문에 타국의 정세변화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급격히 서구화되는 동안에도 쇄국정책을 고집하다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등을 겪으면서 그제서야 떠밀리듯 서구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죠. 청나라나 조선의 체제가 동시대 유럽국가들에 비해 안정돼 있던 것 역시, 자국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대비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타국보다는 국내 권력다툼에 몰두하게 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요약하면, 서구의 고전은 인간의 탐구정신을 증진시키는 자연철학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반면, 동양(중국)의 고전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제한하고 억제하는 데 중점을 둔 윤리철학에 근간을 뒀기 때문에, 고전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그리고 중국)의 체제는 이미 서구열강과 경쟁이 불가능했습니다.
@zootysus1440
@zootysus1440 3 месяца назад
세도정치를 열게 된 것이 단순히 정조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는 없죠. 어쩔수 없는 선택의 결과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할듯... 정조에게는 자녀가 너무 없었고, 형제들도 죽거나 귀양을 가서 일가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김조순에게 순조의 뒷배경이 되도록 할 수 밖에 없었음 (이복형제인 은전군은 역모에 휘말려 죽었고(정조가 살리려고 했지만 신하 반대가 거셈) , 또다른 이복형제인 은언군도 정쟁에 휘말려 귀양가 있어, 실질적으로 왕실의 남자어른이 전무한 상태였음 또 정조가 효의왕후 , 의빈성씨 외에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았는데 효의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의빈성씨 자녀들은 모두 요절해서, 수빈박씨가 궁궐에 들어올때까지 자녀가 한명도 없는 상태였고, 겨우 순조랑 공주 1명만 낳고 더 이상의 자녀가 없었음. 즉 순조에게는 숙부뻘이나 형제뻘 남자가 전무하다시피 한데다 어려서 누군가 뒤를 돌봐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고 정조도 40대 들어서면서 몸이 급격히 약해져 ( 눈이 침침해져 안경을 착용해야했고 치아도 흔들렸음) 자신이 오래살지 못할것을 예감했음. 그래서 순조의 후견자가 필요했던 것임. 김조순은 명문가+시파+유능+겸손함 으로 정조가 후사를 맡길 최적의 인물이었음.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한 이후 나대지 않고 막후에서 유능하게 정치적 역량을 펼친 당대의 좋은 신하로 불렸던 인물임. 김조순이 1832년 죽기 전까지 안동김씨가문이 그 전에 비해 영향력이 커진것은 맞지만 세도정치는 아니었고, 김조순 사후 아들과 조카뻘 때부터 정치 전면에 나선것임. 안동김씨의 진짜 세도정치는 철종시기임. 무엇보다 정조,순조,효명세자,헌종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너무 일찍 요절하거나 아파서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해 군주의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 컸고, 이것이 세도정치와 그 이후 쇄국정책으로 이어지면서 19세기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었다는 것임
@nabom2398
@nabom2398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렇죠 이런걸 실책이라고 하는건 결과론이고 결과론은 전 정말 비겁한 짓이라고 봅니다. 그 상황에서 더 나은 것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문제. 그리고 정조의 죽음은 의문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이걸 고려했을 때 정조 이후의 몰락이 정조 책임이란 것은 왕이 암살당해서 나라가 혼란해지니 암살당한게 책임이란 것과 뭐가 다른가요? 이 내용은 좀억지스럽습니다. 제 생각은 조선은 이미 두번은 난으로 기울대로 기울었고 그나마 영정조가 숨을 연장시켜 놓은 것 뿐이라 봅니다.
@Luca-45
@Luca-45 3 месяца назад
최고 권력자인 왕이 책임이 없으면 도대체 누구한테 책임이 있는건지?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안정적인 권력이양이 되지 않았고 더구나 그토록 경계하던 외척에게 맡김으로 세도정치의 길을 연 장본인 아닌가요? 공이 있다하여 과가 상쇄되는것이 아닙니다. 안정적 권력이양과 정조 자신의 정치철학이 잘 계승되고 국가발전의 연속성이 이어지는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stayy5
@stayy5 3 месяца назад
좋은 지적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정조의 실책을 꼽는다면, 유럽에선 산업혁명과 대혁명이 태동하고, 미국에선 심지어 민주국가가 성립하던 시기에, 청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세계사적 전환을 알아챌 수 있었고 심지어 일본은 그런 전환에 올라타려던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지원 류의 북학파는 배제하고 정약용 등 실학파 선의 등용에 그친 제한적 개혁, 심지어는 문체반정을 주창하는 등 세종대의 재현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세계사적/국제정치적 한계를 들 수 있겠죠. 당연히 누가 하더라도 그 이상 하기는 힘들었겠지만, 비가 와도, 비가 안 와도 왕의 잘못이어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백성과 신하 모두 세계를 볼 수 없었겠지만, 군주마저 세계를 보지 못 한 책임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정조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도 기대초자 할 수 없었으니까요.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3 месяца назад
19세기의 비극은, 근본적으로 세계사의 흐름 내지 천운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 운명론적이지만..... 순조가 나이 어린 상태로 즉위했다. 정조가 뒷처리를 잘못 해 놓고 세상을 떠났다 뭐 이런 건 그야말로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63년의 조선 민도(백성들의 사고 방식 수준)로는....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지 않고... 또다른 전주 이가가 왕이 되었어도 서양 세력에게 하루아침에 개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 특히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때, 가장 빠지기 쉬운 큰 오류 중 하나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백수십여년 전 내지 수십여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왜 신라 시대에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나?' 식의 몰아세우기 식으로 과거 인물들을 비판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심지어 세종이나 정조 못지 않게 '똑똑한' (당시 조선 사회에서 똑똑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유교 - 정확히 표현하면 주자학-성리학을 잘 안다는 뜻이었죠) 나이 먹은 인물이 왕위에 있었어도 조선이 개항하고 서양 세력과 교역하는 것은, 오늘날 지구촌 시대,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는 현재 상황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게 절대 아닙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조선이 다소 늦었지만(청, 일본보다 개항 시기가 늦었지요) 서양 세력의 함포 외교에 겁먹었든, 자발적으로 문을 열었던 개항했다 칩니다. 그런다고 해서 순탄하게 근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 당장 이웃나라 청나라를 보세요. 1842년 난징조약 결과 개항은 했지만, 그 후에 엄청나게 많은 파란... 갈등, 피바다를 방불하는 내전, 살육 등등이 벌어졌습니다. 태평천국군 진압 당시 청나라 만주족 팔기병- 관군과, 태평천국군은 워낙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서로간에 포로를 잡으면 즉결처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항복해봤자 살지 못하니까 더욱 거세게 저항했죠. 우리 조선도 보다 일찍 개항을 했다 하여 순탄하게 근대화를 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도정치만이 문제라기보다 19세기의 세계사적 흐름이 우리에게 불리했습니다. 근대화는, 서양 물건들 달랑 몇 가지 들여온다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 방법을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일 뿐입니다. 일례로, 한반도보다 훨씬 더 선진 유럽 세력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조선보다 일찍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던 오스만 투르크 대제국은 이리 저리 치이고.. 1차 세계 대전 때 줄을 잘못 서서 패전 후 공중 분해되어 버리죠... 오늘날 튀르키예(터키-투르크)의 영토는, 옛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일본은, 골든 타임을 정말 잘 활용했습니다. 1차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관심사가 중국 대륙에 집중되어 있고,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정신없을 때.. 1860년대에 기가 막히게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이 순순히 대권을 덴노에게 이양하여(대정봉환) 대규모의 내전을 방지했지요. 그리고 순식간에 전격적으로 위로부터의 급진적, 전면적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골든 타임을 여러 번 날려먹었습니다. 특히 갑신정변 실패 이후 1885년 일본-청 톈진조약으로 양쪽 군대가 한반도에서 떠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다시 들어올 때가지.... 청과 일본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그 시기 보다 체계화된 근대화가 이루어졌더라면... 하지만 민씨 척족들은 부정부패를 자행했고... 조병갑의 학정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죠..(조병갑이 정말 운 없는 것이, 조병갑보다 훨씬 더 부정부패한 이들이 조선 땅에 넘쳐났는데 하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워낙 대형 사건 유명한 사건이 터져서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유명해졌지요. 어떤 민씨 척족은 금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어서 고종에게 뇌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관련하여 2차적으로 미국, 영국은 극동 아시아에서 일본을 사냥개처럼 부려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지요. 그리하여 일본이 극동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어느 선까지는 묵인합니다.(나중에 일본이 그 선을 넘으려 하여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죠).... 운요호 사건 도발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군 군사 전문가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고.. 미국은 거중조정 약속을 저버리고 을사늑약 때 대한제국의 도움을 거부하죠. 헐버트 처럼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하는 여러 서양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죠. 결론 - 19세기 세도정치, 정조, 순조 문제를 떠나서 세계사적인 흐름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이 큰 불운입니다. 조선이 약해서라기 보다, 일본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죠.
@user-wv6nv5jo2p
@user-wv6nv5jo2p 3 месяца назад
왕이 후궁을 들여서라도 후사를 봐야지요 조선왕들은 종묘사직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사를 늦게 봤다는건 ..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더욱 더 분발? 했어야 했습니다
@dongkyuoh9964
@dongkyuoh9964 3 месяца назад
고등학교 시절 국사 배울 때 영정조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만 배우는데 저는 이 생각 했었어요. 정조가 외척 키워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조선은 1800년대 말아먹고 그 사이 일본은 메이지유신하고 서구화 되고... 결국 1900년대가 되자마자 조선은 일본에 먹혔죠. 우리나라는 역사의 밝은 면만 가르치고 어두운 면은 잘 가르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user-mk1md6jo5d
@user-mk1md6jo5d 3 месяца назад
백제,고구려멸망도내부의배신자때문에망한건데교과서에는당에게끝가지저항하다멸망한것처럼되어있음예식진이랑연남생의언급이없어~~~
@user-xe4ee1nv1s
@user-xe4ee1nv1s 3 месяца назад
우리나라 고등학교때까지 역사는 너무 편협된 시각으로 저술되었어요.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그야말로 정신승리 그시대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독립운동도 목적이 왕권복권을 위해서 였음 영정조시대야 말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또 왕권강화 쯧
@lemmy8284
@lemmy8284 3 месяца назад
@@user-mk1md6jo5d 예식진의 배신을 알게 된게 10년정도 밖에 안 됨.
@thaumazein1506
@thaumazein1506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가 노비해방을 공노비 일부 해방부터 시도했고 (충북 보은현 공노비 해방) 공노비 전원 해방을 준비헤 놓고 시행 직전 붕어하셨죠 사후 이듬해 1801년 준비된대로 공노비 해방했어요 그런데 사노비가 더 늘어요 그건 안동김씨들이 양민들을 빚 몇푼으로도 마구 사노비로 만들어 버린거죠 그들은 정조 재임기에도 노비해방을 결사반대한 세력들이에요 마치 미국의 남부 농장주들 같았어요 충북 보은현 공노비 해방 이후 근 100여년 만에 사노비가 해방되요 안동김씨 세도가 다 해소되고 나서야 노비해방이 완성이 된거죠 님아 19세기의 조선 몰락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60~80여년의 결과라는게 정설인데요 정답도 오답도 아닌 민씨탓. 이하응탓은 공개적으로 해도 정답인 안동김씨탓을 공개적으로 못하는건 뭘까요? 왜 현대에 이르러서 엉뚱한 정조탓으로 소급시키는 기인한 짓들을 하는걸까요?
@user-eq1pm5bb7c
@user-eq1pm5bb7c 3 месяца назад
일종의 한국사왜곡인데... ㅡ부끄럽다고 안가르치고 숨긴다고 없어지는것도 아닌데...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3 месяца назад
문체반정이 더 최악이죠. 국가소유의 잡서 뿐만 아니라 개인소유의 잡서까지 모두 모아서 불태웠는데요. 조선판 분서갱유. 잡서 즉 한학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아닌 책을 국가서적 뿐만 아니라 개인이 소유한 것까지 전부 모아서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수입까지 금지시켰는데요.
@user-hf9uk4fp4m
@user-hf9uk4fp4m 3 месяца назад
후계구도도 잘못했지만 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반대파 숙청이죠 물론 엄청난 피를 보지만 정조 시대 상황상 반대파 숙청은 필수였다고 생각듭니다. 태종 이방원과 세조가 피의 숙청을 한거도 그 이유죠 자신의 권력에 방해되는자를 제거하기 위함이죠 결국 순조 즉위하자마자 정순왕후가 권력을 틀어쥐고 신유박해 일으켜 정약용과 그외 신하들을 내쫓았죠 결국 순조와 정약용 둘 다 지켜주지 못함
@ojl307
@ojl307 3 месяца назад
순조와 비슷한 예로 숙종이 있죠. 13살인가 나이에 왕이 되었고, 그 어머니는 노론계열에 성격도 완고한 명성왕후가 있었음에도 외척이 설치지는 않았습니다. 숙종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부터 영특하기도 했고, 정조는 아들 순조도 자신과 같은 정치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었지만, 순조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고 봐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록 내용 보면 성인이 되서도 엄청 무기력하고, 정조를 닮았다고 하는 자신의 아들 효명세자에게 의지하는 모습도 보이고, 정조가 외척이 설치는 씨를 뿌린 것도 맞지만, 순조의 무능도 더 큰 몫을 했다..라는 생각이..
@user-pf3fp7hi3g
@user-pf3fp7hi3g 2 месяца назад
순조는 병을 달고 살았음.. 몸이 오랜동안 아프면 정신도 나약해져요.. 아들이 똑똑하고 영민하니 아들에게 의지못할 아비가 어디있겠음.. 대리청정 4년동안 치세를 보더라도 별다른 논란없이 조정 대신들간 큰 갈등도 없이 해이해진 공직사회를 기강잡은것만 봐도 싹이 할배를 빼다박았음.. 그리 신뢰하고 아끼던 아들이 요절하자 순조도 얼마못가 따라갔지
@Minerva908
@Minerva908 2 месяца назад
숙종은 순조와 좀 다른 케이스인게 원자임. 비록 효종이 둘째였다고는 하나 형이 죽은 상황에서 등극한 것이고 그 효종의 장자인 현종의 장자라서 정통성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언터쳐블이었음. 그래서 환국을 해도 신하들이 쓸려나가고 왕권이 강한 시절이었는데, 그 이후 인현왕후가 애가 없으니, 그래도 어떻게 비까지 올라갔다가 빈으로 떨어지긴 했어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그럭저럭 되었는데, 하필 영조가 무수리의 얼자... 경종부터 살짝 뿌려진 정통성 논란이 영조를 흔들었는데 영조는 오래 살아남아 버텼지만, 정조 역시 아들이 아닌 세손으로 등극해서 이게 또 약점이 된거죠. 그러다보니 영조는 수명으로, 정조는 똑똑함으로 승부하긴 했는데 세종의 똑똑함과는 세월도 다르고 환경도 달라서 고착화된 노론 소론의 상황을 물려받은 순조에게도 가혹한 상황.
@user-od1yi7zz5h
@user-od1yi7zz5h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사후 3년후 정약용의 애절양이 쓰였으니 정조사후 2년만에 수탈이 하도 심해 자신의 양물을 스스로 끊었고, 이 조각을들고 아내가 관가에가서 군역 수탈을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약용이 듣고 애절양을 지었지요. 죽은지 2년만에 수탈이 아주아주 극심하다는 것인데... 이는 정조 정치가 잦같다는 것이지요.
@UFO-119
@UFO-119 3 месяца назад
😊현시대와 당쟁은 비슷하네요. 양심없고 도덕적이지않은 범죄자들이 나랏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하는 대한민국
@Luca-45
@Luca-45 3 месяца назад
성군의 조건은 나라를 발전시키는데도 있지만 안정된 권력이양도 매우 중요하다. 결국 정조이후 세습정치가 이어졌고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user-rd2rz2tr2w
@user-rd2rz2tr2w 3 месяца назад
문체반정책으로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막았습니다.물론 대비와 수구 관리들이 있어 개혁이 어려웠지만.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3 месяца назад
당시 서양서적이 양반들 사이에서도 인기여서 일본처럼 "대번역시대"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기독교탄압을 안한 것이 아니니 일본처럼 근대화된 지식인 계층을 빨리 만들어냈으면 역사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user-iu2mq8hr1k
@user-iu2mq8hr1k 3 месяца назад
엌... 처음 알았어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초를 정조대왕이 했다니 ㅋㅋ 진짜 아이러니 하네요 ㅋㅋㅋ
@hyugi-papa
@hyugi-papa 3 месяца назад
엉터리 역사해석의 폐해가 바로 나타나네요. 그리 단정하는 건 비약입니다. 역사돋보기 채널우 역사를 너무 단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Inter-TARS
@Inter-TARS 3 месяца назад
​@@hyugi-papa민족주의에 빠져 역사를 미화하고, 위인은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해석하려드는 행태보다는 낫다고 봅니다만. 정조가 스스로 외척을 끌여들여 세도정치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은 사실입니다. 정조가 그 폐단을 예상했는지의 여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말입니다.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냥 김조순이 개같은거지.. 뭐그렇게까지 ㅋㅋ 정조가 의도한것도 아니고 그저 김조순이 가면을 잘썻을뿐.. 우리가 배울점은 이런 기회주의자에게 속지말자~^^ 영원한친구도 적도 없고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될수도
@KKK-xo3fb
@KKK-xo3fb 3 месяца назад
김조순은 아무문제없는사람임. 김조순이 죽고 다른 안동김씨가 문제였지
@usujdscr
@usujdscr 3 месяца назад
믿었던 조순씨가 뒷통수친게 ....
@user-fi6ct7ki8i
@user-fi6ct7ki8i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훌륭한 왕도 권력이 강한 왕도 아니었는데...그것은 결국 그의 능력이 그 정도였다는 것이고...정조의 시대는 그 선대 영조의 기운이 미쳤던 영조의 그림자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아주 저질 왕도 아니었지만 후대에 칭송 할 만한 왕은 더욱 아니었죠. 그런데 우리나라 특히 정치권에서는 정조를 너무 미화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왕은 이상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 권력자는 무능하여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만드는 것 입니다.
@Minerva908
@Minerva908 2 месяца назад
그 선대 영조부터 왕에겐 가장 취약점인 정통성 문제가 계속 따라다니다보니... 본인은 심지어 세자가 아닌 세손... 어떻게든 본인의 똑똑함으로 어찌저찌 고착화된 노론소론을 이끌어나갔다고는 하지만, 정통성의 문제는 항상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녔으니 서얼을 등용하고 개혁을 하려다가도 갑자기 급발진으로 문체반정을 하는등 정말 오락가락... 말이 좋아 개혁군주지 실제로 개혁이 된게 얼마나 있는지. 영조처럼 균역법이라도 하길 했나 ㅋㅋ
@user-bk3dw8el8j
@user-bk3dw8el8j 2 месяца назад
개혁군주라면 유교사상을 배척하고 부국강병이라도 햇어야햇는데 유교강화. 중국왕제사강화 문체반정 문효세자효절로인한 어린세자를 장인에게 맡기고간게참
@user-ue7ob2bf6s
@user-ue7ob2bf6s Месяц назад
@@user-bk3dw8el8j 유교사상을 배척해? ㅋㅋㅋ 조선을 부정하는 일인데 ㅋㅋ 그럼 조선은 정조 집권기 때 망했겠지.. 말로는 뭘 못합니까? 영정조 시대때도 왕권이 그리 강하지 못했어요... 유교를 부정하면 암살도 아니고 궁으로 쳐들어가 참살 당하고도 남았을 걸요? 유교사상을 배척하는 게 아니라 북학등을 제도권으로 포섭해야 됐겠죠.. 그리고 영정조 시대만 해도 송시열등의 그늘에서 많이 벗어났을 때임.. 유학 탓이 아님..
@user-dh4dg5fl8c
@user-dh4dg5fl8c 2 месяца назад
컨텐츠가 너무 좋은것같습니다
@user-mj2iy5nr1w
@user-mj2iy5nr1w 28 дней назад
이영님,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가 아니었습니다. 김조순은 정조의 6촌 형님이었어요, 외가쪽으로. 어린 아들을 자기 핏줄에게 맡긴 거였고, 김조순은 생전에 정조의 충신이었습니다. 김조순 사후, 그 아들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갔지요. 참고로, 저는 안동김씨입니다 ㅠ.ㅠ
@jonghoonkim8688
@jonghoonkim8688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의 운이 거기까지였다고 봐야…. 병자호란 때 망하고 주자학 버리고 다른 이념 탑재한 왕조가 출현 했음 어땠을까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상공업부흥시켰으면 일본에 무력하게 따이진않았을텐데 그놈의 사농공상
@ignisilluminati
@ignisilluminati 3 месяца назад
임진왜란때 이순신이 역성혁명 했어야 했음
@kaiserthum
@kaiserthum 3 месяца назад
@@user-ps1cp1fe9x 사농공상하고 조선멸망하고는 별 상관없어요.
@user-cm1dv2tc4u
@user-cm1dv2tc4u 3 месяца назад
주자학이 농경사회엔 딱 맞는 OS라 갖다 쓴 거지 주자학때문에 농경사회가 펼쳐진 게 아니라... 농경 중심 경제가 바뀌지 않는 한 주자학이고 실학이고 힘들었을듯..물론 주자학이 상업을 억압한 건 맞는데 경제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기도 어렵고 지리적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봐요.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kaiserthum 에그.. 능지가 좀... 유럽이 먼저 산업혁명 일어난이유가 장사때문임 ㅋㅋ 바다건너 무역이 얼마나 중요한데 ㅉㅉ 조선은 그걸 천박하게 여겼고.. 님은그냥 평생 글공부랑 농사만 지으세요^^
@user-wv6nv5jo2p
@user-wv6nv5jo2p 3 месяца назад
후계를 잘 세우는것이야말로 권력자의 최고 덕목중 하나
@user-wc1di9jh3y
@user-wc1di9jh3y 3 месяца назад
태종이 대단하긴해
@user-wk3dl6uw3v
@user-wk3dl6uw3v 3 месяца назад
애초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대기근 등의 사건 등을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한 채, 겨우겨우 버티다가 결국 정조 이후에 모래성 같은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봐야 함. 나는 어릴 때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왕조가 다른 나라들의 왕조들의 비해서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왕조가 오래 유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짓들을 계속 해왔다는 뜻임. 나는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훈구파를 물리치고 새로운 기득권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들끼리 서로 갈라져서 1~2백년동안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왕이 바뀔 때마다 기득 세력이 계속 바뀌는 것이 나라 발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조선' 이라는 나라가 유지되는 데에는 큰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함. 그러다가 결국 순조 때 김조순이 기득권 천하통일을 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망테크를 타게 된 거고.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3 месяца назад
19세기의 비극은, 근본적으로 세계사의 흐름 내지 천운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 운명론적이지만..... 순조가 나이 어린 상태로 즉위했다. 정조가 뒷처리를 잘못 해 놓고 세상을 떠났다 뭐 이런 건 그야말로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63년의 조선 민도(백성들의 사고 방식 수준)로는....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지 않고... 또다른 전주 이가가 왕이 되었어도 서양 세력에게 하루아침에 개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 특히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때, 가장 빠지기 쉬운 큰 오류 중 하나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백수십여년 전 내지 수십여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왜 신라 시대에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나?' 식의 몰아세우기 식으로 과거 인물들을 비판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심지어 세종이나 정조 못지 않게 '똑똑한' (당시 조선 사회에서 똑똑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유교 - 정확히 표현하면 주자학-성리학을 잘 안다는 뜻이었죠) 나이 먹은 인물이 왕위에 있었어도 조선이 개항하고 서양 세력과 교역하는 것은, 오늘날 지구촌 시대,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는 현재 상황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게 절대 아닙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조선이 다소 늦었지만(청, 일본보다 개항 시기가 늦었지요) 서양 세력의 함포 외교에 겁먹었든, 자발적으로 문을 열었던 개항했다 칩니다. 그런다고 해서 순탄하게 근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 당장 이웃나라 청나라를 보세요. 1842년 난징조약 결과 개항은 했지만, 그 후에 엄청나게 많은 파란... 갈등, 피바다를 방불하는 내전, 살육 등등이 벌어졌습니다. 태평천국군 진압 당시 청나라 만주족 팔기병- 관군과, 태평천국군은 워낙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서로간에 포로를 잡으면 즉결처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항복해봤자 살지 못하니까 더욱 거세게 저항했죠. 우리 조선도 보다 일찍 개항을 했다 하여 순탄하게 근대화를 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도정치만이 문제라기보다 19세기의 세계사적 흐름이 우리에게 불리했습니다. 근대화는, 서양 물건들 달랑 몇 가지 들여온다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 방법을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일 뿐입니다. 일례로, 한반도보다 훨씬 더 선진 유럽 세력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조선보다 일찍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던 오스만 투르크 대제국은 이리 저리 치이고.. 1차 세계 대전 때 줄을 잘못 서서 패전 후 공중 분해되어 버리죠... 오늘날 튀르키예(터키-투르크)의 영토는, 옛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일본은, 골든 타임을 정말 잘 활용했습니다. 1차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관심사가 중국 대륙에 집중되어 있고,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정신없을 때.. 1860년대에 기가 막히게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이 순순히 대권을 덴노에게 이양하여(대정봉환) 대규모의 내전을 방지했지요. 그리고 순식간에 전격적으로 위로부터의 급진적, 전면적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골든 타임을 여러 번 날려먹었습니다. 특히 갑신정변 실패 이후 1885년 일본-청 톈진조약으로 양쪽 군대가 한반도에서 떠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다시 들어올 때가지.... 청과 일본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그 시기 보다 체계화된 근대화가 이루어졌더라면... 하지만 민씨 척족들은 부정부패를 자행했고... 조병갑의 학정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죠..(조병갑이 정말 운 없는 것이, 조병갑보다 훨씬 더 부정부패한 이들이 조선 땅에 넘쳐났는데 하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워낙 대형 사건 유명한 사건이 터져서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유명해졌지요. 어떤 민씨 척족은 금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어서 고종에게 뇌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관련하여 2차적으로 미국, 영국은 극동 아시아에서 일본을 사냥개처럼 부려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지요. 그리하여 일본이 극동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어느 선까지는 묵인합니다.(나중에 일본이 그 선을 넘으려 하여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죠).... 운요호 사건 도발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군 군사 전문가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고.. 미국은 거중조정 약속을 저버리고 을사늑약 때 대한제국의 도움을 거부하죠. 헐버트 처럼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하는 여러 서양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죠. 결론 - 19세기 세도정치, 정조, 순조 문제를 떠나서 세계사적인 흐름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이 큰 불운입니다. 조선이 약해서라기 보다, 일본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죠.
@Jaguar-Hamm
@Jaguar-Hamm 3 месяца назад
중국 한국은 너무 중앙집권화 되어서 개혁이 성공 못했고 반면에 일본은 지방에서 시작한 메이지 유신이 대성공 했죠 지금은 한중일 전부 정부가 거대하고 국민들도 정부에 크게 의지합니다 무슨 일 생기면 정부보고 나서서 규제하라고 하죠 그덕에 셋다 혁신없이 성장률 꼬라박는 중이구요
@easeafe4re581
@easeafe4re581 2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때 기술자임그이 대영제국의 기술자보다 좋았음. 그만큼 전성기였지만 왕조국가의 특성상 왕이 약하면 하루아침에라 무너짐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2 месяца назад
@@easeafe4re581 정조 시대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에 제일 먼저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물건 몇 가지 좋은 것 만든다고 저절로 근대화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스마트폰 10000000 개를 갖다준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지요.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인프라가 없으면 스마트폰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2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 왕조 '500년' 할때, 500년 이라는 것에 강조를 두어 자랑스러워하면 세계사적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지구상에 5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들 넘쳐납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에서는 왕통(부계 전주 이씨 외에는 모계 혈통까지 반영함)이 바뀐 일이 여러 번 이었습니다. 유럽 왕조에서는 이 경우 왕조명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피가 흐르는 이가 왕위에 있는 이상 왕조명을 바꾸지 않았지요. 유럽 왕조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 철종 승하 후 고종이 즉위하는 것과 같은 경우 왕조명이 바뀝니다. 철종과 고종은 전혀 남남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철종의 혈통 속에는 효종의 왕비 덕수 장씨의 피가 흐르고, 고종의 혈통 속에는 인평대군의 부인의 피가 흐르니까요. 공통 조상은 이성계이지만, 왕통은 다르지요. 그러고 보면 실질적으로 조선은 1863년에 일단 막을 내린 셈입니다.
@user-xd4sx1xq7c
@user-xd4sx1xq7c 3 месяца назад
니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기냐 하냐? 정조는 북학파가 서구문물을 들여와 새로운 시대를열어 갔어야 했는데 그는 오히려 문체반정을 통해서 수구 꼴통의 길로 갔다.임진란을 통해서 화약무기의 효력을 알던 시대인데도 무예도보통지등이나 지어서 과거로 회기한 자다. 정조는 시대에 뒤떨어진 단순한 유학군주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only2sea
@only2sea Месяц назад
유시민이 김정은을 계몽군주라 하던데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뒤쥭박쥭 정조 돌려까기. (비꼼)
@user-wl1ml2mg4i
@user-wl1ml2mg4i 3 месяца назад
개혁을 하려면 피의 숙청은 필요하죠. 탕평은 현재까지도 않되고 있는게 사실이에요,
@Minerva908
@Minerva908 2 месяца назад
이미 할아버지부터 정통성의 논란이 있어왔는데, 그런 얼자를 왕으로 만들어준 세력을 숙청하기엔 너무 고착화되어버렸으니. 사실 탕평은 말이 좋아 탕평이지 현실적으로 송시열 이후 대가리 굵어버린 고착화된 신권을 출신도 미약한 왕이 어떻게 행합니까 ㅎㅎ 숙종이야 효종의 장자인 현종의 장자인 원자이기에 정통성에서는 언터쳐블이라 강력한 환국이 가능했지만 말이죠.
@sjy231
@sjy231 3 месяца назад
말같지 않은 억지네.. 보통 왕들은 명문가의 딸과 결혼시키는데 세자 혼인시킬때 김조순이 그렇게 세도정치를 할지 어떻게암?? 결과론적 억지지... 그냥 아들을 잘 못낳고 일찍죽은게 큰거지...
@jglee8665
@jglee8665 3 месяца назад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예견할지 몰랐던건 당연한거구 정조가 초창기 가장 염려하여 외척을 경계하여 언급한 홍인한 홍국영등 4명을 내쳤는데 결과적으로 정조 본인이 경계했던 외척의 세도정치를 열어준 것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언급한거죠...다양한 해석에 역사는 살아꿈틀대면서 현실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참고하고 이해하고 좋은것은 수용하고 나쁜것은 미리 방지하자는 거니깐요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3 месяца назад
19세기의 비극은, 근본적으로 세계사의 흐름 내지 천운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 운명론적이지만..... 순조가 나이 어린 상태로 즉위했다. 정조가 뒷처리를 잘못 해 놓고 세상을 떠났다 뭐 이런 건 그야말로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63년의 조선 민도(백성들의 사고 방식 수준)로는....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지 않고... 또다른 전주 이가가 왕이 되었어도 서양 세력에게 하루아침에 개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 특히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때, 가장 빠지기 쉬운 큰 오류 중 하나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백수십여년 전 내지 수십여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왜 신라 시대에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나?' 식의 몰아세우기 식으로 과거 인물들을 비판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심지어 세종이나 정조 못지 않게 '똑똑한' (당시 조선 사회에서 똑똑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유교 - 정확히 표현하면 주자학-성리학을 잘 안다는 뜻이었죠) 나이 먹은 인물이 왕위에 있었어도 조선이 개항하고 서양 세력과 교역하는 것은, 오늘날 지구촌 시대,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는 현재 상황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게 절대 아닙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조선이 다소 늦었지만(청, 일본보다 개항 시기가 늦었지요) 서양 세력의 함포 외교에 겁먹었든, 자발적으로 문을 열었던 개항했다 칩니다. 그런다고 해서 순탄하게 근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 당장 이웃나라 청나라를 보세요. 1842년 난징조약 결과 개항은 했지만, 그 후에 엄청나게 많은 파란... 갈등, 피바다를 방불하는 내전, 살육 등등이 벌어졌습니다. 태평천국군 진압 당시 청나라 만주족 팔기병- 관군과, 태평천국군은 워낙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서로간에 포로를 잡으면 즉결처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항복해봤자 살지 못하니까 더욱 거세게 저항했죠. 우리 조선도 보다 일찍 개항을 했다 하여 순탄하게 근대화를 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도정치만이 문제라기보다 19세기의 세계사적 흐름이 우리에게 불리했습니다. 근대화는, 서양 물건들 달랑 몇 가지 들여온다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용 방법을 모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일 뿐입니다. 일례로, 한반도보다 훨씬 더 선진 유럽 세력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조선보다 일찍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던 오스만 투르크 대제국은 이리 저리 치이고.. 1차 세계 대전 때 줄을 잘못 서서 패전 후 공중 분해되어 버리죠... 오늘날 튀르키예(터키-투르크)의 영토는, 옛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일본은, 골든 타임을 정말 잘 활용했습니다. 1차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관심사가 중국 대륙에 집중되어 있고,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정신없을 때.. 1860년대에 기가 막히게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이 순순히 대권을 덴노에게 이양하여(대정봉환) 대규모의 내전을 방지했지요. 그리고 순식간에 전격적으로 위로부터의 급진적, 전면적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골든 타임을 여러 번 날려먹었습니다. 특히 갑신정변 실패 이후 1885년 일본-청 톈진조약으로 양쪽 군대가 한반도에서 떠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다시 들어올 때가지.... 청과 일본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그 시기 보다 체계화된 근대화가 이루어졌더라면... 하지만 민씨 척족들은 부정부패를 자행했고... 조병갑의 학정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죠..(조병갑이 정말 운 없는 것이, 조병갑보다 훨씬 더 부정부패한 이들이 조선 땅에 넘쳐났는데 하필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워낙 대형 사건 유명한 사건이 터져서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유명해졌지요. 어떤 민씨 척족은 금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어서 고종에게 뇌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관련하여 2차적으로 미국, 영국은 극동 아시아에서 일본을 사냥개처럼 부려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지요. 그리하여 일본이 극동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어느 선까지는 묵인합니다.(나중에 일본이 그 선을 넘으려 하여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죠).... 운요호 사건 도발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미군 군사 전문가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고.. 미국은 거중조정 약속을 저버리고 을사늑약 때 대한제국의 도움을 거부하죠. 헐버트 처럼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하는 여러 서양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했죠. 결론 - 19세기 세도정치, 정조, 순조 문제를 떠나서 세계사적인 흐름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이 큰 불운입니다. 조선이 약해서라기 보다, 일본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죠.
@user-bc9de8hz6h
@user-bc9de8hz6h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래서 선대왕때는 충신이었던 신하가 다음에 어린 왕이 되어서 본인이 권력을 쥐면 역신으로 돌변하는 선례들이 많습니다ㅠㅠ 왕조정치의 한계죠!
@user-lo3yv3dn6g
@user-lo3yv3dn6g 7 дней назад
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
@user-uf8fd9vh4b
@user-uf8fd9vh4b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 왕들의 생산력이 양난 이후 전기에 비해서 팍 떨어지고(정종, 태종, 세종, 성종, 중종, 선조 등은 자녀가 '역사 기록에 남은 사람만 세 보아도' 최소 십수명 내지 최대 수십명씩 되었지요) 왕자들이 귀해진 것이 근친혼 유전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라, 고려에서는 대놓고 왕실 근친혼이 허용되었지요(고려는 차마 동복 남매까지는 혼인 안 했지요. 이복 남매 간은 혼인했어도) 조선은 겉으로는 엄격한 유교 국가여서 당연히 왕실 내 근친혼은 말도 안 되었지만, 정확하게 보면 부계 친족 (전주 이씨)근친혼 금지였지요. 따라서 성씨만 같은 전주 이씨가 아니면... 서로 공통 조상을 가진 왕과, 왕비끼리 얼마든지 결혼한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모계 혈연 등으로 해서 서로 촌수가 있는-같은 혈통으로 이어진 왕-왕비 부부가 있지요. 그 예로 연산군과, 연산군 부인 거창 신씨의 공통 조상(최소공배수인 셈)은 세종이었고 / 명종과 명종 비 심씨의 공통 조상은 심온이었습니다 /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공통 조상은 선조입니다. / 정조의 고조 할아버지인 현종의 부인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가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도 청풍 김씨로 김시묵(김우명의 손자의 손자)의 딸이었지요. 따라서 정조-효의왕후의 공통 조상이 청풍 김씨 김우명입니다. 예외도 있으니 일반화하기는 이르지만... 이러한 왕-왕비 간의 가까운 혈연 관계도 미심쩍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숙종이.... 자신과 신분이 매우 멀었던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영조가, 고려 조선 왕들 중 가장 오래 장수 83세까지 살았던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래서 남남북녀 하나 봅니다..
@jsm9252
@jsm9252 2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선조의 유일한 적녀 정명공주의 후손입니다
@user-bn1ch8ot7r
@user-bn1ch8ot7r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 정조는 고려로 치면 공민왕의 포지션이죠. 정조의 맏아들, 의빈 성씨의 소생 문효세자가 일찍 죽지 않고 정조의 뒤를 이었다면 세도정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axlose5115
@axlose5115 3 месяца назад
뭘해도 망할 나라 진작에 임진왜란 아니 병자호란 이후라도 뒤집어졌어야할 나라임. 세도정치가 없었다면 나라의 명운이 바꼇을까. 유교, 사대 큰 틀이 바뀌지 않았다면 서양 열강들 일본에 잡혀먹는거는 매한가지.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공민왕말년보단 낫지..
@netfice
@netfice 3 месяца назад
또 도배질 시작하네 ㅡㅡ
@user-zl4dz6ts5j
@user-zl4dz6ts5j 3 месяца назад
공민왕처럼 신하들을 이용만 해먹고 죽이는걸 계속 반복하진 않았습니다.
@user-ne7if1rq3e
@user-ne7if1rq3e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문화말살 세도정치의 기초를 딱고 외국서적을 불살랐던 조선탈레반의 터를 놓은 최악의 왕이죠
@Minerva908
@Minerva908 2 месяца назад
문체반정은 정말 최악의 정책...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산업혁명 시기에 조선에서는 정조가 서양함선을 내치고 문체반정으로 외국서적을 불태우는짓을 하고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그런왕을 개혁군주라 칭하고 쇄국정책으로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유발시킨 흥선대원군을 개혁정책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user-ue7ob2bf6s
@user-ue7ob2bf6s Месяц назад
@@user-nh1ks4cz4q 누가 잘못된 선입관을 가졌는지 모르겠네요.. 개혁이랑 개방은 같은 말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말이에요. 일례로 일본을 예로 들자면 이에야스의 쇄국정책과 기독교 박해가 개혁입니다.. 그 전 노부나가, 히데요시 시대엔 개화무역, 기독교 포용이 보수이자 구태였거든요.. 정조를 개방군주라 표현하는 이 아무도 없고, 흥선군을 개방정책을 폈다고 하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개방을 더 빨리 한다고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 없습니다.. 유럽의 제국 시대와 타 대륙 국가의 개화 스탠스를 분류해서 보면 개방 빨리 해 빨리 망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청이나 일본보다 빨리 개방할 수가 없는 위치입니다.. 거기다 당 시대의 조선기술의 한계까지 본다면 더더욱요.. 개인적 견해로 문체반정은 실정으로 보나, 남연군 묘 도굴까지 당한 상태에서 그대로 개화정책 추진했으면 당시 천민 계급을 제외한 양, 중, 상 모두 뒤집어 엎었을 겁니다.. 흥선군의 처부터 해서 다른 일가족까지 흥선군은 원래 서학과 오히려 거리가 가까웠던 인물입니다.. 자기 아버지이자 왕의 조부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용의자가 개화 협상 대상자였던 오페르트라는 걸 조선 천지 만인이 다 알았을 때인데.. 본인 감정도 감정이지만... 협상을 그대로 진행했다면, 충효를 국가의 대들보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회가 가만있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전지적 시점으로 본다면 오페르트와 젠킨스의 오판이 조선의 개화를 더 늦추는 계기가 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davidultra1080
@davidultra1080 3 месяца наза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정조가 통치 시스템을 잘 만들어도, 통치 역량이 부족한 순조가 잘 이끌고 갔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봅니다. 사실 절대권력자인 왕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정도 가능한 조선에서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죠. 정조는 극한 상황을 견디고 된 왕이지만, 순조는 뭐 그런 것 없이 어린나이에 떡 하니 왕이 되니, 뭐 이건 답이 거의 나오는 것 아닐까요? 엄청나게 영민한 것도 아니고, 뭐 개인의 한계라고 봅니다.
@user-tm5sr4ni7o
@user-tm5sr4ni7o Месяц назад
그나마 김조순이 안동김씨중엔 양반이었죠. 그래서 정조가 믿었을텐데 개인이 아무리 괜찮아도 집안이 안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면 이길수가 없죠 영상에 동의합니다 정조는 솔직히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들이 많죠. 강렬한 보수주의자이자 원칙론자로 진보를 가로막는 성향도 갖고 있었고요
@user-byuljeonnam
@user-byuljeonnam 3 месяца назад
대다수 왕조가 후기로 가면 왕손이 귀해져서 왕조의 쇠퇴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user-di9vh1xv5n
@user-di9vh1xv5n 3 месяца назад
스트리스로인한 유전적 열화 두번째는 직간접적 독약섭취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진작망했어야함
@Wannabe2023
@Wannabe2023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 원인이 한약으로 보고 있습니다. 절대 한약 많이 먹으면 안 됩니다. 어릴 적 부자집 아들들 한약 과다하게 먹다가 바보 된 얘들 꽤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약들이 최소한으로 처방되고 복용되어야 합니다.
@user-vg5hk5fl3s
@user-vg5hk5fl3s 3 месяца назад
보약과 운동부족 탓입니다. 보신과 후계를 위한다는 보약과 걷기 뛰기 기본도 안하는 운동 습관이 무정자증 유발.
@user-yw3bd4qr1d
@user-yw3bd4qr1d 3 месяца назад
맞아요 보약자체가 몸에 좋질 않습니다.. 한의학은 아직도 동의보감이니뭐니 조선시대때 개구리 잡아서 문에 걸어두면 병이 낫는다 하면서 무속신앙을 맹신하던 때 만들어진 걸 아직도 배우고있죠 뭐 현대의학이랑 통합해서 발전하고 있다라고 하고있긴한데 주변 한의학부생이나 한의사들한테 물어보면 얼마나 배우는게 말도안되고 엉망인지 아실겁니다 중요한 건 한약자체가 그때당시엔 더 비과학적이라 개개인한테 맞은 한약을 주기가 거의 불가능 했을것이며 한약은 오히려 간을 몹시 지치게 만듭니다 비타민 좋다고 초과다복용하면 오히려 간이 그걸해독하느라 몸에 부작용이 오는것처럼요
@user-sd8fe8ij7l
@user-sd8fe8ij7l 3 месяца назад
전형적인 유교마인드 개혁군주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3 месяца назад
다른 말로 유교탈레반.
@user-tm5sr4ni7o
@user-tm5sr4ni7o Месяц назад
홍국영이 딸이 아니라 여동생을 후궁으로 만들었는데 중간에 딸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네요 잘봤습니다
@user-hs7xn5rp3x
@user-hs7xn5rp3x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에 대해 항상 가졌던 의문입니다. 휼륭한 왕이라는데 사후 왜 조선이 급격하게 몰락했을까? 정조가 진짜 현군이었나? 문제가 있었던 왕으로 보이는데 주류 역사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네.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3 месяца назад
문체반정 조선판분서갱유.
@wolfk3893
@wolfk3893 3 месяца назад
단순 인사적인 문제보다는 중앙정치 시스템을 정조의 단독드리블에 상당히 의존하는 체제로 바꾼 것 지방관에 대한 지방의 견제력을 거세해버린 것 관료 출신지의 한양집중과 지방양반의 몰락 등등 시스템적 부분을 파야 의미가 있지 김조순 하나 기용한게 문제라는건 너무 얄팍한...
@stressbook9832
@stressbook9832 2 месяца назад
성빈 성씨(왕의 수청을 여러차례 거절)에게만 일편단심 민들레였던 것도 문제였죠. 왕이라면 종족 번식에 신경 썼어야...
@AA-dk5cw
@AA-dk5cw 2 месяца назад
그냥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모든 왕들은 싹다 개판임 상공업을 개무시 하니까 시장이 발달을 못해서 망한거지
@user-kt8yp5ho2y
@user-kt8yp5ho2y 3 месяца назад
거기다 정조는 외국의 서적을 수입하는것을 금지하여 외부정보가 자유롭게 유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과오를 저질렀죠. 박종인 땅과 역사에 자세히 나왔죠.
@user-ux9qg8et8s
@user-ux9qg8et8s 2 месяца назад
선조때 망했어야 했어...
@user-fz2uk1eq6p
@user-fz2uk1eq6p Месяц назад
우리는 기득권세력ㆍ상층부가 변화ㆍ변혁을 싫어해요... 그냥 안주하길 일본은 상층부가 변혁을 꿈꿨죠.... 막부타도 ㆍ대정봉환ㆍ메이지유신.... 영국ㆍ프랑스ㆍ독일도 우리는 지금도 보수수구들이 어떻게든 지들이 기득권을 놓치지 않을려구 하잔아요...
@zimzachomefashion6387
@zimzachomefashion6387 3 месяца назад
오~ 재밌네요
@user-od1yi7zz5h
@user-od1yi7zz5h 2 месяца назад
문체반정도 문제이고, 청나라 백과사전들을 수입하다가 혼자 몰래본 임금이 정조였죠
@seigolibra
@seigolibra 3 месяца назад
영정조 시대, 특히 정조가 사극을 통해서 어마어마하게 미화되어 있죠. 개혁정치니 실학이니 무슨 대단한 개혁을 한 것처럼 떠드는데 당시 세계가 발전했던 거에 비하면 성리학의 틀에서 못 벗어난 정말 미미하고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던 움직임에 불과했어요. 영정조 시대를 냉정하게 봐야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선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노노노 그래도 정조는 조선의 꼰대왕과 다르게 실학을 높이산면이 있음 물론 '그나마'의 수준인거지만...
@user-oe1tv2rm2j
@user-oe1tv2rm2j 3 месяца назад
덧셈 뺄셈도 못하던 나라에서 나누기 곱셈 하는 개혁이라면 인정해야지 뭐ㅋㅋㅋ 정조라는 개인은 명군이었음. 조선이란 나라 자체의 한계일뿐. 성리학 나라에서 성리학의 틀을 못벗어난걸 탓해야 함? 개혁이란 것도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제대로 하는 거지 페리 제독 오기전의 일본이 지혼자 알아서 메이지 유신 한것도 아니잖음. 세계사의 발전 흐름을 못따라간건 영정조의 잘못 보단 고립된 환경의 잘못임.
@user-dk9cs2rj4k
@user-dk9cs2rj4k 3 месяца назад
실학이란게 난학 처럼 퍼졌었냐 하면 정말 극소수의 양반가 서얼 몇몇이 모여서 토론 했던 정도라 이것도 좀 과대해석이 있음
@user-cp7re8in6d
@user-cp7re8in6d 3 месяца назад
냉정하고 자학적인건 달라요
@only2sea
@only2sea Месяц назад
​​@@user-ps1cp1fe9x실학을 오히려 죽인 왕 아닌가요? 어릴 때 국사 시간에 실학에 대해서 배우면 실학이란 게 있었던 걸 변명하듯이 자본주의 맹아처럼 말하고 그러나 현실은 뭔가 안타깝게 주류에 반영되지 않았다는데... 주어생략... 나중에 알고보니 왜 배척됐는지 그 수괴가 정조임.
@jameslee6794
@jameslee6794 14 дней назад
임진왜란 극복후 왕조를 무너트리는 민란이 필요했으나 워낙 양반이라는 기득권 튼튼해서 나라의 근본이 바뀌지않음. 솔직히 양반 상놈 구조를 없앤게 우리나라 스스로 한거 아니잖승. 외세에 의해서 충격을 받았으면 뭔가가 바뀌어야 했는데... 임튼 지금도 진정한 독립국가는 아니고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나마 안정적인거다.
@jimk6819
@jimk6819 3 месяца назад
동의합니다. 대단한 왕은 없고, 성종이 부국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요? 세종은 노비확대 정책, 영정조는 세계 과학발전의 흐름을 타지 못했음에도 휼륭한 임금? 의문입니다
@thelibrary5972
@thelibrary5972 2 месяца назад
인간이 미래를 바꿀려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jjystone
@jjystone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가 부흥군주? 허구아자 국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세종에서 시실상 끝닜다. 그 뒤의 역사는 그저 명과 청의 간섭에 굴종히는 속국 비슷하였다고 본다.
@TheThirdEYE637Shinhan
@TheThirdEYE637Shinhan 3 месяца назад
저런 세도정치가 흥선대원군이 등장하면서 철퇴를 맞는. 하지만 흥선도 경계했던 외척은 다시 민씨척신들이 등장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게된.. 태종이 그랬던것처럼 외척을 한번 살풀이를 해놓아야되는 왕조시대긴함 ㅋㅋ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3 месяца назад
전형적인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입니다. 조선이 망한 것은 돈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의 당백전으로 단기간에 600% 물가가 오릅니다. 당백전 폐지까지 매달 7.2% 물가가 오른 것인데 거기서 멈추지도 않고 청전(호전)을 유통시킵니다. 그것때문에 또다시 경제적 폐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청전(호전)을 폐지시킵니다. 이게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외국교수들은 이것을 조선사 500년동안 최대실수라고 합니다. 물론 애초에 대원군이 청전(호전)을 유통시킨것 부터가 잘못입니다. 조선의 상평통보에 비해 5분의 1 원재료가 들어가는 청나라 동전을 1:1로 만들어버린 대원군 정책이 누가봐도 잘못된 것이었지만 한순간 폐지가 더 큰 사단을 일으키죠. 저기서 조선이 망합니다.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세도정치의 주역이 흥선대원군이죠 세도정치란 왕이 아닌자가 정권을 잡는것인데 세도정치를 척결한게 아니라 쭉 이어갔죠 안동김씨 풍양조씨에서 흥선대원군으로 세도정치가 옮겨간것이죠 흥선대원군 때문에 고종의 왕권은 바닥이었죠 왕을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권력을 농단한 흥선대원군 안동김씨 풍양조씨들보다 더한게 흥선대원군이고 나라 완전히 말아 먹었죠
@user-me7xh5ml4o
@user-me7xh5ml4o 2 часа назад
사실 아들인 순조도 책임이 크죠. 자기가 친정할 수 있게 되었고 왕권도 강력한 편이었는데 정조같이 외척을 척결해버리고 세도정치를 끝낼 힘이 있었어요. 근데 무기력하게 정사를 놔버린게 세도정치를 고착화시킨 듯 합니다.
@user-eg7tz9qv6d
@user-eg7tz9qv6d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지 할아버지가 만들어논 국가 재정을 수원 신도시 만드는데 탕진함. 결코 좋은 임금이라 할수없음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죽은 사도세자 우상화한다고 능행을 자주 했는데 능행에는 수천명이 동원되는 사치스러운 행사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우상화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user-rc9rh6xz9u
@user-rc9rh6xz9u 23 дня назад
정조가지고 이럴게 아니다... 최악의 친일파인 고종에게는 욕을 못하면서 이완용에게는 욕을 함.. 고종은 친일파이고 최고의 욕을 먹어야하는 자인데..
@okjuyang77
@okjuyang77 3 месяца назад
이미.숙종때부터 나라가 기울었음. 외척이 강해져서 정치에 물을들여 제위의 선택권을 좌지우지. 태종은.정말 정사에대해 잘아는 왕이엿지. 사기를.읽으면 몰하나 왕조가.망하는 세도정치를 못막았는데... 역사는 반복된다.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왕권만 강하면 뭐하나요 나라가 발전하고 백성들이 잘 살아야죠 태종은 막강한 왕권으로 나라를 발전시킨게 아니라 퇴보 시켰죠
@user-yr4kq1rd7d
@user-yr4kq1rd7d 3 месяца назад
일본의 칼의 역사가 오히려 한수 위였던게 일본의 붕당?을 세키가하라 전투로 한번에 종식함 근데 조선은.. 붕당을 몇백년 끌고감...
@user-ol7wt1fn4j
@user-ol7wt1fn4j 13 дней назад
오늘 당장의 국정 실책도 그냥 보고있는데 무슨 말인지요?
@hyugi-papa
@hyugi-papa 3 месяца назад
역사의 전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선의를 가진 정책이 백성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악의를 가진 정책이 오히려 부국강병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당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서 해석을 하고 당시를 규정해야 합니다.
@user-oi3tx6lp8q
@user-oi3tx6lp8q 11 дней назад
정조는 한국사에서 가장 과대포장되고 미화된 대표적 인물이다
@huntersis1655
@huntersis1655 3 месяца назад
한국역사에서 가장거짓말이 심한곳 정조이후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진작 망했어야함
@mobinjul
@mobinjul 3 месяца назад
아들이 10살인데 본인이 곧 죽을상황이면 그나마 믿을사람한테 맞기는거 말고는 방법이 딱히 없을듯?
@user-kh8ul5xo3l
@user-kh8ul5xo3l 5 дней назад
자신만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해놓고 후계자가 충분히 자리 잡기도 전에 떠난 것이 문제였지
@bonjoure74
@bonjoure74 3 месяца назад
전 AI목소린줄. 목소리가 성우하셔도 되겠네요.
@Jun31719
@Jun31719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의 르네상스는 갖다 붙인거죠. 동일 시기에 서양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비교해보면 바로 답 나옵니다
@user-jj6ms2kl4m
@user-jj6ms2kl4m 3 месяца назад
왜란 두번으로 조선은 망해야됨 질기게감 왜놈 한테망함
@user-wr6cz2lt1z
@user-wr6cz2lt1z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건 정조의 책임이라기 보다 김조순이 똑똑했던 것입니다. 후대의 결과를 가지고 전대의 왕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의 이야기지요.
@user-gu5hr5yw3f
@user-gu5hr5yw3f 3 месяца назад
자기 아빠를 위한 정치는 하지말았어야지...
@dolphy8678
@dolphy8678 3 месяца назад
서학에 포용적으로 하고 실학자를 대거 등용했으면..... 정말 모르는 기적이 일어 났을지도.....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역시 무리네요.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명나라따인지 한참됐는데도 빨아댔으니.. 인조이후로 사실상 미래가 없다고봐도 무방 ㅆ선비꼰대질 개노답
@sungminkim6309
@sungminkim6309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왕!
@GrowStoneOnline
@GrowStoneOnline 3 месяца назад
김대중은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대통령!
@user-jp5we4gb2k
@user-jp5we4gb2k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얘기에 김대중이 왜 나와?​@@GrowStoneOnline
@GrowStoneOnline
@GrowStoneOnline 3 месяца назад
@@user-jp5we4gb2k 정조도 업적이 있지만 잘못 하나로 과대평가라고 하니까 김대중도 비슷한거 같아서
@parani1004
@parani1004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후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의 몰락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오고 결국 근대화에 실패 및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나비효과를 낳았군요.
@luciuscha2347
@luciuscha2347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에게는 재위 중엽 이후부턴 점점 상황이 따라주지 않은게 지병도 걷잡지 못하게 통치동력을 갉아먹었고, 자손도 너무 육성할 기회조차 가뭄수준이었다는 점. 더 안타까운건 끝내 조선 중후반기부터 고착화되어버린 성리학의 교조적인 틀을 깨지 못하였다는 점 등이 시너지가 되어 향후 조선의 남은 시간을 더 나락으로 밀어넣어 버렸다는 것은 이미 조선의 국운이 다해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었다는 것이죠. 따지고보면 영조가 생전에 타파하지 못한 리스크를 손자였던 정조가 죄다 떠안고 무언가 해보려 했지만 끝내 현실의 벽과 일신의 천운이 따라주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역사의 비애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user-le6mj3se3t
@user-le6mj3se3t 3 месяца назад
고려 황도의 표시는 지도 제작자들의 목숨을 건 센스 (혼일강리역대국도 1402년 완성)
@mungmoung1736
@mungmoung1736 3 месяца назад
재밌다
@user-bc9de8hz6h
@user-bc9de8hz6h 3 месяца назад
만약 김종서가 수양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죠^^
@user-tf6cj2fy1p
@user-tf6cj2fy1p 3 месяца назад
14:37 자기 딸이 아닌 여동생입니다. 잼있게 보고 있습니다
@raphaels.7814
@raphaels.7814 9 дней назад
기본적으로.조선의 시스템은 임란 후.퇴행적 구조. 변하질 못했으니..ㅉㅉ
@user-kj5xj9ex4y
@user-kj5xj9ex4y 3 месяца назад
이영 선생님 한국사 강사신가요?
@mugumahn3046
@mugumahn3046 3 месяца назад
충무공이 전쟁을 끝내고 피묻은 칼로 왕과 유생 3000명 을 참수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면 흠🐒🐒
@user-ue7ob2bf6s
@user-ue7ob2bf6s Месяц назад
역사전공자 아닌가요? 세도정치가 시작된 데에 대한 책임은 분명 영조가 크게 져야되는게 맞고, 김조순이 그 시작점이 되는 건 맞지만.. 김조순은 정조 재임시절에도 정조 사후에도 충신이자 능신이였어요... 문제는 김조순 사후부터 시작됩니다.. 이 영상만 보면 김조순이 역적이나 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user-ug8fj9co2v
@user-ug8fj9co2v Месяц назад
그런데 이 영상에 나오신 분 역사학자이신가요? 정조가 김씨 잘 못 등용했다고 바로 정조를 추궁하는 추임세... 그렇다면 고려 태조 왕건이 혼인정책으로 엄청난 내환을 격게 된 게 왕건이 죽일 놈이라는 논리아님? 논리의 비약이며 극히 주관적 역사관임.
@seagullchungang
@seagullchungang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는 서양 지식이나 서적 수집해서는 규장각에 쳐박아놓고 지만 봤음.. 그러니 조선 발전이없지
@user-us5ff5de3s
@user-us5ff5de3s 3 месяца назад
웃기고있네 지식을 계속 공유했음
@user-yk8dn3gb8b
@user-yk8dn3gb8b 3 месяца назад
참 그렇네요. 그렇게 척신들을 경계하고 조져 놓았는데, 마지막 선택이 안동김씨라니... 다만 정조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거 같아요. 아무도 어린왕의 사람이 아니라면 더 험악한 역사가 이어질지도 모르잖아요.
@yk2170
@yk2170 3 месяца назад
저도 이게 참 의문이면서도 궁금했었는뎅 재미있는 강의 감사합니다
@leepluvia9167
@leepluvia9167 Месяц назад
정조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왕권강화에만 몰두한건 영조와 다를바 없지요... 머리까지 좋아서 역사를 퇴행시킨 왕이라고 밖에 ...벽파의 몰락이 조선 양반의 몰락이었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몰락이었다.
@Smile_loop
@Smile_loop 3 месяца назад
세도정치도 안동김씨 대 까지는 나라가 그래도 안정적이였다고는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완전 개판…
@tofumode6170
@tofumode6170 3 месяца назад
뮨효세자만 병으로 떠나지만 않았어도 참 역사의 스노우볼이 무섭네요
@user-ps1cp1fe9x
@user-ps1cp1fe9x 3 месяца назад
역사에 만약은없다
@user-hr6kz4ji8c
@user-hr6kz4ji8c 3 месяца назад
ㅋㅋ 세자 왕 한명으로 바뀔 수 있는 나라가 아님ㅋㅋ 새로운 정치개혁을 해야하는데 한세대 두세대를 이어서 모든게 다 변해야하는 강력한 정치력이 필요함 근데 기득권이 순순히 하겠음?
@j.c.s7762
@j.c.s7762 3 месяца назад
​​​@@user-hr6kz4ji8c 동감 개혁은 기득권과의 싸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님 ㅇㅇ
@seigolibra
@seigolibra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은 세자 한 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 성리학을 박살내고 당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서구의 산업혁명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받아들여야 망국으로 가지 않고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건데 이런 건 이념으로 뭉친 세력이 필요한 거라서 말이죠.
@easeafe4re581
@easeafe4re581 3 месяца назад
​@@user-hr6kz4ji8c뭔 근거로 그리 말하죠?
@user-vw7rn8zy4i
@user-vw7rn8zy4i 29 дней назад
나는 늘 왜 조선조 말기에 갑자기 몰락했는가..에 궁금해왔었습니다. 많은 의견들이 있어서 더욱 도움이 되는군요.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든 최고지도자의 책임은 무한대입니다. 전제군주시절에만이 아니라 현대에까지도 최고책임자는 모든 책임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본 영상을 통해서 보는 정조의 인품은 꽤나 훌륭해서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업적에 비해서 테스테스테론도 적었던 거 같기도 하구요. 최근 매국노로 새로이 등극한 고종만 해도 후궁이 13명이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대체적으로 보면 조선조의 왕들은 문관들과 사돈을 맺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글자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체가 단단하지 않습니다. 즉, 무관들의 사돈을 맺었으면 단단한 후손을 보았을 것입니다. 대체 왕세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요절을 한단말입니까. 우리가 추앙하는 세종대왕만 해도 자손이 28명인가 합니다. 그 할아버지, 아버지는 무사입니다. 그런 체력을 타고 났으니 자손도 많이 낳고 기운이 좋아서 많은 업적을 남길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조는 군대의 쿠데타로 집권을 하여 500년간 늘 스스로 쿠데타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툭하면 역모로 다스렸지요. 그래서도 무신홀대 풍조가 생겼다고 봅니다. 무신은 아무리 잘 해도 당상관이 되지 못했지요. 조선조에서 가장 출세한 무신은 아마 김종서가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마는 현대에 와서 군출신 박정희대통령이 나라를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조선조의 무신홀대는 여러 면에서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었다고 봅니다. 즉, 조선조의 여러가지 문제는 문신우대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user-vl7jc3km7p
@user-vl7jc3km7p 10 дней назад
임진왜란때 도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갈 궁리만 했던 이연(선조)을 폐위시키고 정도전의 사상대로 우리나라식 입헌군주제를 열었어야함!! 이미 정조까지 갔을 땐 국력 및 국운이 다 한 상태임!!!
@user-gr3cj1jc1b
@user-gr3cj1jc1b 2 месяца назад
정순왕후를 살려둬서 그렇지 뭐
@user-im1qh5lx3h
@user-im1qh5lx3h 3 месяца назад
책팔이들이 살렸고 드라마가 절정을 찍었지
@user-LGtwins0827
@user-LGtwins0827 17 дней назад
조선이 개혁개방을 안해서 망했다는건 1차원적인... 일반인이 하는 착각과 짐작... 원인이 하도 많아서 ...ㅠ
@user-ip5uf1ie9q
@user-ip5uf1ie9q 3 месяца назад
어린 순조를 노론의 권세가에 장가 보내지 않았다면 단종과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었겠지. 정조 자신도 노론 벽파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태위태한 시기를 보냈는데. 마치 광개토대왕은 분열되어 힘이 약해진 중국대륙을 왜 정복하지 못했느냐고 한탄하는 꼴.
@dhhong221
@dhhong221 3 месяца назад
동의하기 어려운 의견이군요. 정조가 척신부터 제거했다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이죠. 홍인한, 정후겸, 홍국영은 모두 너무 까불어서 제거된 건데... 자기 어릴 때 하나의 붕당이 너무 힘이 쎄면 어떻게 되는 지를 똑똑히 봤기 때문에, 견제 세력이라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건 극히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그 뒤에 순조가 김조순을 전혀 컨트롤하지 못 할 것까지 미리 아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user-gl9he2dx8k
@user-gl9he2dx8k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의 임금중 태종,세종,세조가 최고의 임금들 아닌가? 모두 왕권이 최고였던시기가 이때였으니, 왕조국가에서 왕권이 가장 강한게 최고의 임금이다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태종은 조선의 온갖 악습을 다 만들어낸 피의 군주입니다 최악의 군주라고 봅니다
@user-ii7yj7dx6s
@user-ii7yj7dx6s 3 месяца назад
유독 화가난 인간들이 좀 보이는걸
@cube6808
@cube6808 3 месяца назад
김조순은 안동 김씨...정확히 신 안동 김씨, 구 안동 김씨와는 전혀 다른 가문입니다.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 인조 때 김자점,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등이 구 안동 김씨입니다. 신 안동 김씨 중에서도 서울 장동에 근거가 있다해서 장동 김씨라고도 불렸죠. 신과 구 정도는 구분해주셨으면 합니다.
@heyday183
@heyday183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의 실수 세종대왕때로 돌아 가고 싶었음 그리고 너무 똑똑해서 본인 사후 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림
@user-xu1mz9wd1n
@user-xu1mz9wd1n 3 месяца назад
좋은 내용
@all-in4673
@all-in4673 3 месяца назад
정조대왕 호칭/무슨일했나? 없는살림에 수원성건립?
@Life-bx1eb
@Life-bx1eb 3 месяца назад
최악의 세도정치는 여흥민씨 아니냐?
@user-nh1ks4cz4q
@user-nh1ks4cz4q 2 месяца назад
흥선대원군이지 왕을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국정농단하고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음
@user-pn5rg5wk1k
@user-pn5rg5wk1k 20 дней назад
제가 보기로, 정조는 조선왕조 역사의 마지막 성군입니다. 그 분은 왕업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던 왕이셨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중에 하나는 사람을 거의 함부로 학살하지 않은 것이라 말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훌륭한 인물의 업적을 높이면서 문화적으로 좋은 요소들을 퍼뜨린 것 또한 훌륭한 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조 임금이 잘못한 거라고는 딱 하나, 후계자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것 그 거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정조는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더 큰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dexter8820
@dexter8820 3 месяца назад
조선은 가난한 국가였습니다. 한반도가 감당할수 있는 인구수는 아마도 1천만명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조선 후기에 갈수록 전쟁이 없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2천만명 까지 늘어났습니다. 조선은 땅이 척박하고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워서 산은 민둥산이고 조선의 조정과 신민들은 성리학의 영향으로 근검절약으로 살아왔지만 조선이 감당할 인구가 너무 많았습니다.
@옥란-g8m
@옥란-g8m 2 месяца назад
제대로 우군들을 만들지 못했고 정순왕후책임이 많고 영조가 정순왕후를 들이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Далее
Sta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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