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댓글이나 욕설, 영상과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댓글은 경고 없이 삭제 또는 차단될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은 형무소와 수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 만큼 분량상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보도연맹 학살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보도연맹 학살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우리 현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사건으로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군의 만행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려고 생략을 많이 했기 때문이죠. 과거 구판 역사 교과서랑 지금의 교과서를 보면 천양지차입니다. 퇴임하기도 전인 대통령 사진을 교과서에 박아넣는 몰상식한 짓을 한 대단한 인간들이 지금 180석 권력을 쥐고 좌파 교육감들이 장악하고 있는 교육계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니까요.
6.25당시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르는 사건이 많았죠. 교도소에서 교도관이나 재소자를 대상으로 일어난 학살을 보니, 서울의대 부속병원에서는 인민군이 침입해서 국군부상자 위문차 남아있던 가족 심지어 정신병동까지 습격해 무차별 학살을 버렸던 사건도 생각나네요. 전쟁은 정말 끔찍한것 같습니다
전시에 흔히 자행되는 살인, 강도, 강간, 방화등등 수많은 범죄도 감당이 안되는데 수용자의 비중이 전체인구의 0.3% 이지만 전시에 석방 혹은 건물파괴등으로 범법자들이 사회에 나와 일으킬 혼란을 생각해보면 죄의 경중에 따라서 이송시키거나 반사회적이고 폭력성을 지니고있거나 경제사범의경우에는 사형집행시키는게 옳지않나싶기도 합니다.
근데 형무소에 있는 재소자를 위해 일반 시민들을 보호할 여력까지 차출 해서 그들을 지키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임. 이미 타인의 기본권을 해치는 행동을 하여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안 그래도 없는 힘을 나눠서 일반 대중 대신 그들을 지키는 건 좀.......
1년 5개월을 복역 후 순천교도소에서 20년도 9월에 출소한 사람입니다. 영상대로 주로 강력사범들 제외한 일반 및 경제 사범들은 법무부 장관의 명령이 각 교정기관에 하달이 되면 석방된다고 7급공무원인 교위 직급의 교도관분에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사실과 동일하네요. 강력사범들은 후방으로 이송시킨다는 영상 내용은 처음 듣는내용인데 일리는 있어보입니다.
4.3사건때 북한간첩들 남로당이 제주도에서 선전선동해서 제주도민 10명중 1명이 사망하고 빨갱이로 낙인이 찍혔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군에 지원을 해서 나라를 지키러갔고 이는 80년대~9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해병대로 입대해서 북한군에 맞서 싸웠어요 저는 4.3사건 유공자입니다 저희 외증조할아버지가 4.3으로 희생당하셨어요
정치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이용해먹으려는 정부와 무지함을 반공주의라는 사상아래 물들여 무고한 이들을 죽인 국민들은 제주도민들의 1/10을 죽이고 이후로도 제주도민=빨갱이 라는 논리로 제주도인에대한 마녀사냥과 온갖 차별과 멸시를 하고 결국에는 제주어(언어학) 제주사(역사학)등의 학술적 가치가 높은것들을 빠른속도로 소멸시켜버리고 생존자들은 자신의 출생, 언어 모든것을 숨기고 공포와 고통속에 살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을 위해 바다건너에 있는 전쟁터로 몸바쳐 싸우러가신분들..
@@탐라도민 2차대전 미국의 니세이부대 같은 케이스네요.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내 일본계들 격리 시키고 할 때, 명예 회복을 위해 입대해서 미국인으로서 제일 빡센 지역만 다 돌면서 전쟁 수행한 일본계2세 부대. 재미교포 김영옥 대령이 이끌었죠. 6.25전쟁 때도 참전하심.
@@soehojohn7645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왜곡한 사건.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때문에 광주 교도소 습격 사건은 한 때 극우 사이에서 무장폭동설로 왜곡하기 위한 근거 중 하나로 사용되었고, 역사에 무지한 일부 국민들도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으로 알고 있던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진상은 완전히 달랐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가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했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21. 전남도청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류영선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은 차례로 전남합수단에 불려가 '류영선이 류낙진을 구하기 위해 시민군을 선동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혐의와 관련하여 심문받았다. 한마디로 교도소 습격 기록은 같은 날 먼저 앞선 시각에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는 시위주동자가 멀쩡히 살아서 광주교도소를 습격해 계엄군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는, 누가보더라도 계엄군 측에서 날조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류영선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그외 시민군들이 광주 교도소를 습격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광주 교도소는 계엄군과 시민이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였다.
@@soehojohn7645 교무과장으로 근무했던 김근재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제가 당시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도소 주변에서 총격사건이 몇 번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시민군이나 학생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전연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2004년 3월 18일, 김근재 증언. 대한민국 육군 제31보병사단장과 정웅 장군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박준병 장군도 증언하길 "광주교도소를 21일 오후 2시 이전의 제31사단이나 23일 오후 7시 이후의 제20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을 때는 습격을 받은 사실이 한 번도 없다"라고 했다.국회 '광주청문회 회의록', 제21호, 1988년 12월 21일, 박준병 정웅 증언
@@soehojohn7645 교도소 앞 300미터 전방까지 시위대가 진출했던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걸로 습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300미터 전방은 바로 인터체인지로 연결되는 도로이기 때문이다. 광주교도소는 담양군, 곡성군, 여수시, 순천시 쪽으로 빠져나가는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광주 동부인터체인지가 연결되는 길목이어서 앞, 좌, 우는 물론 두쪽으로 국도와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리는 교통로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요충지다. 당초 동명동에 자리 잡고 있던 광주교도소가 1960년대에 추진된 개발과 동시에 광주광역시에 의해 이곳 문흥동으로 이전해 올 때는 담양, 곡성, 순천, 여수 방면으로 향하는 겨우 2차선 비포장 국도만이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시민군은 광주항쟁의 도내 확산을 위해 차량을 이용하여 이 교도소 앞과 옆길을 거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와 국도로 진입하려 했다. 여기에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한 것이다. 시민군이 대응사격을 했지만 빈약한 카빈이나 M1 소총으로는 M16 소총이나 기관총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같은 교전을 놓고 계엄군 측은 폭도들이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를 습격했기 때문에 부득이 교전이 벌어졌다고 발표했다.
@@soehojohn7645 당시 교도소 교무과장과 육군 제31보병사단장 정웅 장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박준병 장군의 교도소는 습격받은 바 없다는 증언을 비롯하여 시민군의 교도소 내 침입이 발생 사실 자체가 없는데 교도소 문서를 불태웠다느니 하는 소리는 사실무근이고 소설입니다.
유죄를 벌하는 것보다 무죄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나 범행은 워낙 많아서 그들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무죄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유죄 선고를 하고, 혹시 사형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시민들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든 말든 상관 없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호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시민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어떠한 안전도 다 끝일 것입니다. - 존 애덤스
범죄자들은 전시상황이 되면 소계.양계.소멸작전 3단계로 진행되지만 마지막단계인 소멸작전은 중범죄자와 정치범수형자를 대상으로 말그대로 소멸 시키는 것이다. 평시에도 사회에 크나큰 손실을 입힌 자들이기에 전시상황이 되면 적에게 동조하여 더 큰 피해를 줄 대상자들 임으로 즉결처형을 하는 것이다.
형무소를 보니, 전쟁이 나면 문화재 같은 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런 것도 당연히 지금으로서는 메뉴얼이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전시 상황의 재소자들 메뉴얼도 제대로 안되있던 상황이였는지라 문화재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 그 부분이 궁금하고, 동물원도 전시에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이것도 그 당시에는 메뉴얼 같은 게 따로 없었는지라, 개전 초기에는 사육사들이 대피를 못해서 그대로 서울에서 발이 묶여버렸는데(다행이도 인민군들이 살려놓아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니 동물과 사육사 다 멀쩡하게 있었다고 함), 이거랑 관련되서는 시설 파괴시 탈출하여 사람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맹수들을 살처분 하는 거 외에는 다른 메뉴얼이 딱히 없더라고요.
@@kimhunv 전 님이 생각하는 인권 좋아하는분에 속할것같은데 섬에 고립시켜 그들만의 사회만드는건 일반인을 위해 필요하다생각합니다. 솔직히 정도를넘어선 반사회적사람들을 무작정 사형시키기엔 대형사고 일으킬까겁나고 (예- 어차피 잡히면 사형인데 집단살해하고 자살하잔 마인드) 복역후 사회에 돌아간다면 또 나쁜짓할게 뻔한놈들이니(갱생불가) 걍 섬에서 걍 고립하는게 사회를 위해서 젤 좋은 선택같아요
@@kimonelight 그런데 저 당시 어쩔 수가 없었는게 그 때는 주민등록번호 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음.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음? 게다가 지금은 공산주의가 실패한 엉터리 사상이란걸 알지만 그 때는 오히려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파급력이 커서 현혹되기 딱 좋은 상황이란걸 고려하면 달리 방법이 없었음.
후송 해주고 보살피고를 못한 사실만으로 끝났으면 당시 정부의 선택을 욕하는 사람이 정부 역량으로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거라고 비판받을 일이나, 문제는 후송과 보살핌이 없었다는 사실을 넘어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박탈한 사실이 추가되었다는 점입니다. 보살핌과 후송없이 방치했다고 비판합니까? 목숨을 빼앗은 것에 비판의 화살이 가는거지. 일반 민간인과 재소자의 형평성을 예로 드는 것도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년형 이하 잡범 재소자까지 모조리 처형한 이상 이들은 사형수와는 받은 형량이 전혀 다른데도 똑같이 처형당한점, 사형수가 아닌데도 각자도생이라도 할 기회가 있는 민간인과 달리 각자도생의 기회도 박탈당하고 국가로부터 확정된 죽음까지 부여받음으로 인해 2중으로 형평성에 안 맞습니다. 부족한 민간인 보호를 형평성의 기준으로 삼을거면 '사형수와 강력범은 즉시처형, 경범죄자는 보호 없이 완전히 방치후 전후 형집행, 민간인은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보호'를 기준 삼아야지. 당장 '절도범과 사형수 둘다 처형하는 경우'와 '조기석방된 절도범과 민간인' 중 형평성에 더 안 맞는 것은 명백히 전자고요.
한국 경찰의 공권력은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위법하는행위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직임했던 87-88년(5공말기)까지만해도 형사들이 직접 고문까지하거나 민주화 운동 대상자들을 무자비로 체포하기도했고, 진압중에 곤봉으로 후려치기도 했으니까요. 80년대야 이정도인데 진짜 전시상황중인 1950-1953년이라면 말할것도 없었겠죠 ㅠ
우리군도 준비를 하던 상태였습니다. 안그래도 공비소탕한지 2년도 채 안되고 아직도 저 남ㅉ고이선 시끌하던 무렵이엇으니까! 문제는 준비여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상태엿지요! 당시까지도 식량자급 없었고 제대로된 공업기반마저 전무 했습니다. 비상상태 1개월 넘어가자 병사들 먹일 군량조차 부족 했지요! 그래도 버티다가 6월 하순이 되자 비상을 풀고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냅니다. 겉으로는 농번기때 일손을 도우란 것이엇지만 실은 너희들에게 줄 쌀이 없으니 고향가서 좀 먹고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비참한 일이죠! 그래서 보내놧더니 일주일도 안됮 너쟁 터진 겁니다. 여러사람들이 왜 병사들을 대기도 아니고 시골로 보냈냐고 당시 정부를 욕하지만 데리고 있어봐야 먹일 수도 없는데 어쩌잔 겁니까!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임진왜란 입니다. 왜란터지기 1년도 전부터 왜에 심상치 않은 행동이 보인다며 무기를 점고하고 산성을 수축하고 군사훈련을 하는등 대비를 했지만, 이때 가장 큰 반대가 터져나온건 그 잘난 유생들이 아니라 백성들이었습니다. 안그래도 힘든데 자꾸 공역시켜서 농사지를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우성 이었던 겁니다. 지방 각지에서 이런 장계가 날아드니 선조는 뭐하나 제대로 성취해보지도 못하고 GG칩니다. 그나마 임진왜란이나 6.25에서 이순신이나 김종오 같은 이들이 사력을 다해 준비한 값을 톡톡히 보기도 했지만 결국 같잖은 준비로는 한 방에 훅간다는 것을 배운 겁니다.
원인은 조금 다릅니다만.. 아이티 대지진때문에 교도소가 파괴되서 재소자들이 죄다 탈옥을 해서 아이티 치안이 더욱 엉망이 됐다지요. 그런점에서 봤을떄, 재차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한이 충분히 죄수들을 사면조건으로 프락치로 활용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러시아가 그런 방법을 쓰고있지요.
지금 전시되면 형기가 짧으면 그냥 다 풀어주고 사형수나 극악 사범은 솔까 군에서 그냥 알아서 처리하게 된다! 전시가 되면 일반적인 사법 시스템이나 3권분립 이딴거 없음! 계엄령 선포되고 모든 범죄는 군사재판으로 열리고 중대 범죄면 해당 지역 지휘관이 즉결처분 가능함! 이걸 무슨 피해자 인냥 포장하는건 그냥 헛소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