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n6231 소현세자가 이뻐서 청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을 장악하고 싶어서이죠. 몽골, 준가르제국(신장), 티벳(시장)등 청나라에 병합된 나라가 한 둘이 아닙니다. 조선이 티벳이나 사라진 준가르제국의 꼴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당시 청나라에서 광해군을 정말 마음이 어질고 유능한 군주라고 칭송하면서 광해군을 찾았지만 인조와 신하넘들은 광해군을 숨겼음..숨겨진 역사지만 광해군이 물러난 뒤 광해군 복위를 위한 민란이 수도없이 일어났었고 병자호란 때 군인들읏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청나라 기병들을 보자마자 전부다 도망쳐 버림..
@@civilize 인조실록 인조 2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이 쑥대밭이 된 후 좌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 (중략) 《광해일기(光海日記)》와 《시정기(時政記)》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는 10분의 1일도 못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북인의 주도하에 실록이 편찬되어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며 서인 주도하에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현종실록은 남인의 주도로 편찬되어 남인에 대해 불리하면 빼거나 일부러 잘못되게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서인들이 주장해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을 다시 만들 정도로 조선 당대에도 실록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광해군일기는 이괄의 난으로 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들인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산실되었습니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가 40분의 1도 못된다"는 보고나 "검열 김광현이 시정기와 일기를 강화에 옮겨 두는 임무를 받은 뒤에 미처 실어 나르지 못하여 죄다 산실되었다."는 계사 및 "갑자년 변란 때 많은 문서들이 산일되었는데, 춘추관 서리 홍덕린이 광해군대 시정기 75권과 승정원일기 26권 등을 겨우 건져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찬수청을 설치하고 일기 편찬의 기초 사료들이 유실된 상황에서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이처럼 다른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를 중심으로 편찬하지 못하고 사대부가의 개인 야사와 문집까지 동원해서 광해군일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다른 실록처럼 무오류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허점과 함정이 많은 기록물입니다.
광해군이 재위시절 워낙 또라이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인조반정 초기에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는데 설사 청나라에서 그와 핫라인이 있었다 한들 청나라가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해군을 복위시킬 일도 없거니와 만에하나 그가 복귀했다고 해도 조선최초의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실드칠 인간이 없기로서니 똥오줌은 좀 구분합시다
서인들의 농간에 옥좌에서 내려온 불운의 왕 임진왜란을 전장터에서 겪으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느끼고 청과의 전쟁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대북파와 서인세력의 권력 다툼에 사이에서 희생양 인목대비와 영창군의 패륜적 사건은 왕의 추종세력의 정적 제거 음모이지 광해군의 주도한 사건은 아닌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건 인조반정 선조와 함께 조선 최악의 임금으로 평가 받는 인조 광해군이 계속 집권 했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복하여 성군을 잃은 것일까? 우리 역사는 유독 만일이란 가정을 많이 불러 일으킨다 그건 잘못된 길로 자주 들어섰다는 뜻인데 이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도 그 중 하나일듯 싶다
1에서 100까지 있을때 90까지는 광해군이 만들고 나머지 10을 인조가 만들어서 병자호란이 일어난거죠... 광해는 전혀 중립외교도 민생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자시절때는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선조의 각종 행동,그리고 본인의 출신 위치에 대한 컴플렉스가 너무 심해서 집권하고나선 연산군에 버금가는 폭군이었습니다...
@@박동민-h6b 광해군은 단 1도 상관이 없는데 뭔소리인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後金)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였다
@@박동민-h6b 전쟁의 전개 12월 2일 청나라 홍타이지(태종)는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청나라 군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여 한양 외곽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항전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출병 요청에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명으로 가는데 그에게 밀지를 내림 가서 소극적으로 도와 주는 척 하다가 적당한때 청에 내통하라 함 이에 강홍립은 아예 투항 해버림. 그래서 광해군 재위기간 청은 조선 침략 안함. 인조 반정이후 투항한 강홍립에게 조선 침략 명함. 뭘 제대로 아는 광해군 이었음.
광해군이 제주유배를 4년 했다는건 저도 처음 들어봅니다..추사유배지는 유명하지만 광해유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다수라고 봅니다..광해군유배지를 복원하여 한을 달래주는 것이 역사를 위해서도 제주도를 위해서도 좋을 듯합니다.광해군 유배지가 비석하나만 있다는 것은 제주도민의 치욕입니다.
유배 온 광해군의 백성생활기 영화화해도 될 듯. 아직 궁궐생활에 익숙해 왕실의 자부심을 놓치못하는 허당 끼 있는 광해군... 영문도 모른체 제주 관아로 파견되어 평생을 한 죄인의 수발드는 운명을 맞이하는 나인...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 나가야하는 광해군과, 왕이건 뭐건 영감이라 부르는 왈가닥 나인과의 티키타카 케미.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은 가까워지고 속깊은 이야기까지 꺼내게 되는데.. 한 때 최고권력을 누렸던 인물과 집안을 대신해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나가는 나인과의 감동적인 우정스토리. 주연 : 이병헌, 천우희
정말로 안타깝기 그지 없는 왕...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그런 사이라지만 광해군 본인이 죽이고 싶어했을까, 이이첨 이 새끼는 그냥... 그리고, 반정을 광해군이 진압을 했다면? 반정이 있기 전 여러차례 반정의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를 수차례 받았는데 하... ㅠㅠㅠ 그리고 마지막 이괄이란 작자가 광해군의 편에 섰다면...
@@임순자-f8f ㅋㅋ 인조 찌라시 조성시대 가장 믿을수 있는게 사관들이 기록한거다 광해때 궁궐 몇개 만들 었는지 검색이나 해보세요 그 궁궐 만들때 얼마나 많은 인원 돈이 들어가는지도 영화 광해가.아주 광빠 많이 만들었네 명청 싸움에 강홍립 청나라 투항? 야 투항한 사람 대다수 죽었어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