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이 자석으로 모우는게 힘들고 양도적음 한중일이 사철로 검을 만들었지만 일본만 저급했음ㅋㅋ철을 완전히 제조하기위해선 2500도가 돼야하지만 현대 기술이고 1500도 정도 되면 불순물을 제거할수 있는데 한국중국은 도자기를 1500도로 올릴수있는 기술이 있었지만 일본은 그기술이 없어서 토기를 쓰던 민족이였음 단순히 철광석이 없어서 칼이 잘부러졌다는 바보같은 소리임ㅋㅂㄱ
@@user-gj9ki6nm9g 무기라는거에 아예 관심없어서 모르나본데, 갑옷이란걸 만들고 나서는 검은 더이상 못썼단다. 사무라이도 정신 나가지 않은이상 일본도를 전장에서 않썼고. 쓰질않으니깐 불필요한 장비에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은것 뿐이지. 3세기 후부터 검에 R&D 투자하는건 요즘시대로 따지면 권총에다 투자해서 전쟁에다 쓰는거랑 똑같다. ㅂㅅ짓 하는거지. 로마시대부터 집채만한 돌들이 날라다니고 처음나온 총이랑 비견되는 석궁도 쓰고 그랬는데 검도 따지고있네 ㅎ 그리고 일본도 활을 더 많이 썼단다. 조총있기전에는 사무라이는 말타고 활쏘는걸로 알려져 있고 활을 못쏘는 놈이나 일본도 휘두른다고 전해지고. 역사를 어디서 배운거냐
국뽕아.. 개소리 그만해라.. 뭐 일본검술이 한국검술 참고하고.. 명나라 청나라 황제가 한국검술 부러워 했다고? 진짜 개소리네.. 조선중기 즉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한국 무술 자체가 완전 실전되서 남아 있는게 전혀 없던 상태였는데.. 있지도 않는 무술과 검술을 부러워 했다고? 무예도보통지는 조선말 정조떄 나왔고.. 사라진 무술 복원했다는데.. 극히 일부만 했거덩..
좋은 내용이네요....요즘, 일본 배들이 잘 쪼개지고, 잠수함,군함 등 파손이 잘되는 것을 보니, 원래 제철기술이 그 정도였군요....'도요타'도 중국 철강을 써서, 자국 철강연합이 소송걸었다던데... 그런 일본에 빨대 꽂았던 선진국들....찬밥 '일본'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는군요....
@@bbking4099 그런것 치고는 어거지로 강도 끌어올리고 위력자체도 원자재를 생각하면 상당한 편이긴 했는데 근본적인 강도때문에 미술품 이상의 가치는 없었죠 일빠들이 하는 소리는 일본도는 언제나 뛰어났다는 소린데 그나마 정상적으로 한반도와 교류했던 12세기 이전의 물건 이면 모를까 12세기 이후로는 왜구때문에 아예 철은 팔지를 않았고 남만선에서 사왔다는 철강은 죄다 철포(화승총)만드는데 쓰고 에도막부시작하고나서는 도검수지령에(무기허가제도) 쇄국정책을 펼쳐서 공식적으로는 철 수입도 안하고 일본도 수요가 극단적으로 줄어서 양질의 일본도가 있었을수가 없는데 무조건 좋다고 하는 것들이 문제임 애초에 일본법상으로도 강가에서 사철 긁어모아서 전통방식으로만 제작한걸 일본도로 인정한다고 나오는데 ㅋㅋ 외국에서 사온 철로 만든게 어떻게 일본도가 됨
@벌교 딱총꼬막 ㅋㅋㅋ 아직도 수입했다고 착각하는놈들 있네 이에야스가 막부 세우고 쇄국정책 펼쳤다고 ㅋㅋㅋ 여말선초에는 명이고 조선이고 팔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져서 전국시대부터 왜란 이전까지는 조선이고 명이고 남만이고 존나게 사들인건 맞아 근데 그냥 그 이후로는 문 닫았다고 마사무네는 ㅋㅋ 도검장인 본인이 살던 13세기때 만든거나 유명하지 후손들의 경우는 11자루 사면 10자루가 짝퉁이라는 소리가 일본에 남아있을정도로 에도시대때 짝퉁검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물건임 내가 까는건 에도막부 이전의 물건들을 까는게 아님 그전에는 내전이건 전쟁이건 계속 했으니까 고품질의 철을 사야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무기의 품질이 유지가 됬음 문제는 여러 기록에도 17세기이후 에도막부때는 팔러 오는놈도 사는놈도 별로 없었지만 전국시대처럼 백만석 수십만석 영주가 있는게 아니라 잘해야 만석 2만석짜리 지방 번주들만 있어서 얘네 사무라이 봉급 주는데도 간당간당거렸고 굳이 품질을 유지해야할 이유도 없었음 애초에 에도시대는 허락맡은 사무라이들만 일본도 소지하고 다닐수 있게 했던 시대임 공급도 수요도 한정되 있던 시대지 ㅋㅋㅋ 근데도 일본도 스고이 에도시대때도 일본도의 품질은 무조건 스고이데수웅 이러는거냐?? ㅋㅋ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데 외국산 철들도 파는놈들이 팔아야 파는거지 살놈들이 살돈 있다고 살수 있었으니 샀다가 되는게 아님 명나라는 올타임 해금령 내렸던 나라고 특히 일본은 입조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했고 본인들부터 안감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수십년에 한번 갔던 통신사를 제외하고는 무역+외교자체를 일본과 금지하던 나라임 유일하게 허락된건 한양과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서 거래를 허락한정도임 이게 니가말한 외국에서 수입한 철의 전부임 수요보다 공급이 적어서 존나게 비싸게 팔려나갔다는거지 조선시세가 존나 낮았어도 남만선은 머스킷인가 네덜란드배에서 수입했던 타네가시마 영주가 대충 1520~30년대쯤인가 갈레온 첨저선 수평맞추던 배 밑 선창에 두던 녹슨 똥철덩어리(물론 사철보다는 제대로 정련된 물건이라 소금기 먹어서 똥철이라는소리) 수입한거고 일본 전국시대 기록보면 뎃포(일본조총)만드는데 화약의 폭발력을 일본사철로 만든 뎃포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서 남만철 전량을 뎃포 만드는데 썼다고 어느 기록을 보건 나옴 니가 좋아하는 일본 기록에 ㅋㅋㅋ 그러니까 답변해 보라고 니 뇌피셜 말고 에도시대 이후로 제대로 된 일본도 실물 유물이 어디 있는지 자료나 한번 가져와봐 ㅋㅋ 찐따 쉙이 처음부터 에도시대이후는 병신이라고 단정지어놓고 이전시대는 나쁘지 않았다고 못박아놓은상태에서 까준건데 그냥 일본도 나쁘다고 풀발기해서 빼애액 거리면서 말같지도 않은 댓글 다네 ㅋㅋㅋ 그래서 명나라가 팔았다는 기록은??? 없잖아??? 공식적으로 해금령 펼쳐서 바로 코앞인 조선도 사신 걸어서 가는거 따라가서 물건 사고 팔았는데 명나라가 망할때까지 쌍방손절한 일본이요??? ㅋㅋㅋㅋ
원래가 불을 다루는 기술이 낮아 온도를 높이지 못하니 도자기도 제대로 굽지 못해서, 나무조각 파서 밥그릇이라구 손에들구 숟가락도 없이 나무가지 꺾어들구 어구적 거리던 놈들인데 숟가락도 못만들던 불다루는 기술로 검을 만들어봤자 불순물이 많아 죄다 쉽게 부러졌겠지.. 어쩌다 실수로 깨끗하게 나온게 한자루 있으면 명검이랍시구 아까워서 사용은 못하고 밤낮으로 칼날만 손질하구..쯧쯧..
백강(백제 백마강)전투에서 800척의 일본전함을 타고 백제를 구원하러온 백제왕자 풍의 일본군대....일본군사들이 백강하구에서 신라와 당나라군대를 맞아 싸웠는데..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하였음.. 그 돌아간 일본군대는..--- 언젠가는 신라군대가 가야의 강철검으로 무장하여 일본을 치러 올것이니 준비 하고 준비하자~~!! --- 라는 일본고대 시조도 있음.. ㅡ 그들 일본은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대가 고려전함을 타고 일본에 상륙하는것을 극히 두려워 하여..고쿠리(고려군대귀신) 모쿠리( 몽골군대귀신) 나온다~~!! 라는 말에... 울던애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무서운귀신으로 일본국민을 새뇌를 시켜왔다.. 지금도 울고 말안듣는 어린애들 어르는데 -- 고쿠리 모쿠리 나온다...아이고 무서워라~!! 이렇게 애들을 다루는 일본문화다.
그때의 고대일본의 본국인 백제멸망에 대한 신라와 중국에 대한 원한이 일본의 국가기본이 되었고 수천년 내려오면서 국민정서로 굳어진게 혐한정서 인것이다. 백제 풍왕자가 백제탈환회복에 실패하고 임종하면서 남긴 유언이... --- 너희는 언젠가는 힘을 길러서 일본의 본국 백제를 잃어버린 원한을 갚아라~~!! 한반도를 정벌하라~~!! -- 라고 유언했는데... 그것이 일본의 기본정책이 되었고..수천년이 흐른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그 역사적 연유도 모른체... 혐한정서에 발담그고 사는것이다. 그저 전통문화로 굳어진 상황.
정확히는 고품질의 철을 만드는 재료나 기술이 부족해 대륙의 검술(주로 날 달린 둔기류에 가까운 무기 스타일)을 따라할 수 없어서(쉽게 부러짐) 선택한 게 베기 특화입니다 그래서 임진 왜란 때 사무라이들의 전국시대에 발달한 베기 특화 검술에 적응이 안된 조선 군인들이 많이 당황해서 밀렸다는 설도 있어요(검을 맞댈 수가 없으니 손목 같은 약점만을 얍실하게 베는 왜인스런 검술 대륙식은 정식으로 검을 겨루는 방식이니 얍실한 수에 당황) 그러나 역시 한국인의 빠른 적응 방식으로 대응책을 마련 후에는 점점 밀리는 상황이 발생 뭐 그렇답니다
@@KhanIamwhoIam 창이 싼 가요? 혹시 끝에만 금속으로된 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건 오늘날의 장식용이지 실전에서 쓰면 금방 부러지는데요 기본적으로 봉 내부에도 철심이 박혀 있어야합니다 철은 창이 더 많이 듭니다 단지 검이 제련을 더 많이 하는 것이고 일본 무사들이 왜도를 선호한 것도 패용이 쉽고 단가 비싼게 뽀대나니깐 예전부터 기사나 사무라이들은 폼생폼사
진검 수련하면서 겪은 일화를 소개하자면 제가 예전에 다니던 검도장에서 고단자들만 니스가 가득 칠해져서 가검화 된 진검으로 수련한 적이 있습니다. 니스만 두껍게 칠해져 있을 뿐 검의 내구성은 일본검의 제련방식을 따라서 만든것이었죠. 본을 수련할때 검신과 검신이 부딪힐 수 밖에 없는데 그럴경우 이가 나갑니다. 한 번은 그 나간 이에 부딪힌적이 있는데 그 칼이 부러져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맞지도 않았는데 튀어나갔죠. 다행이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이후 위험성 때문에 회원들은 진검수련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얘기를 드리고자 하는 이유는 일본도가 실제로 내구성이 그다지 좋지않다는 것이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사무라이 활극은 말그대로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입니다. 제가 겪은 일본도는 아름답지만 너무 허구였습니다.
나는 미용가위를 만듭니다. 제가 한평생 쇠를 갈아보고 날을 세우는 일을 연구했지만 일본의 쇠에 대한 평가는 요즘 국뽕 이슈에 젖어 외면당하는것 같네요. 제가 접한 일본의 단조 기술과 특수강 인프라는 솔직히 넘사벽 입니다. 우리는 정신차려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났다고 떠들어봐야 일본이 콧웃음치는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진심 저는 일본에 기술을 넘기위해 한평생 노력했고 기술적인 잠재력과 실력은 제가 인정받지만 우리나라에 현실은 처참합니다. 광을칠때쓰는 광약과 천쪼가리도 일본에 품질은넘사벽 입니다. 부디 자만하지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맏은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요.🙇♂️ 없는 살림에 명맥이 끊어진 인프라를 이어가는 숨은 장인들께 고개숙여 진심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존경할만한 분이시군요 이 영상은 지나친 국뽕으로 보는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의 가위가 질이 좋은건 일본제철에서 질좋은 강철을 공급해왔기 때문입니다 가위에 적합한 고속공구강이나 스텐레스말이죠 20세기에는요 그랬지요 요즘은 포스코 제철이 더 기술이 좋답니다 단 개인이 포스코의 질좋은 강철을 구하긴 어렵고 가위용으로 적합한 스텐레스는 돈이 안되니까 안만드는것일 뿐 아닐까요? 가위를 만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재질을 뛰어넘는 제품이 나올수는 없지 않을까요
연병장과 연무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습한 기병 장교로서, 나는 일본의 검술 교습 방식이 영국 육군의 방식보다 훨씬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말에서 내린 상태의 실제 전투에 대해서는 일본의 양손검술이 유럽의 모든 검술보다 뛰어나다. 울퉁불퉁한 땅, 언덕 사면, 그밖의 장애물이 많은 지형, 또는 뒤섞여 싸우는 난전에서 일본 검술은 많은 이점을 가진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원하는 방식으로 적을 빨리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카타나의 검신은 길이가 26인치 전후로 상당히 짧은 편인데, 이는 사용자에게 뛰어난 기동성(freedom of movement)을 가져다준다. 보병전에서 세이버 같은 긴 칼과 칼집을 다루기가 끔찍하게 성가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라면 특히 더하다. 카타나의 검신은 세이버보다 짧지만 칼자루는 더 길다. 이 검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공격거리가 짧다는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긴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내리치는 강한 타격(crushing blow)이 가능하다. 그리고 일본식 검술 훈련은 양손을 모두 단련시키는데[27], 검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양손잡이를 상대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 것이다. 여기에 서양식 군도보다 근접전에 특화된 카타나의 특성이 더해지기 때문에 카타나야말로 목숨을 건 실전에서 최고의 칼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F. J. Norman, 『The Fighting Man of Japan』, 1905
@@user-sx5jm8dndm2 우리나라는 패망하는 시절의 로마처럼 정예강병 부족으로 무기의 기술전환을 격던 시기였습니다. 강병은 부족하고 점차적으로 군의 감축화가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검술보다는 원거리 공격 위주로 변환되던 시기였죠. 좋은 철 좋은 검 만들어봤자 칼 들고 맞붙으면 우리나라 군대가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user-qk3nd6dq2s 제 사부께서는 궁은 팔꿈치로 당기고 등으로 버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단전과 발은 무겁게 팔꿈치를 부드럽게 줌손을 태산 밀듯 하고 깍지손을 호랑이 꼬리 잡듯 하라 셨습니다. 워낙 강탄궁을 잡으신 것도 있으시겠지만 팔힘으로만 당기셔 그런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백여년 넘게 큰 전쟁이 없었고, 뭣보다 화약의 무서움을 알기에 화약과 화포 기술 발달을 막았습니다. 긴 평화속에 군사를 늘리지 않고 줄였으며, 평상시엔 농사를 짓도록 고향에 돌려 보냈고, 새로 군졸을 뽑을 생각은 없고 군필로 대신했죠. 율곡 이이는 학자이기도 했지만, 정신수련도 공을 들인 도인이였습니다. 예진력으로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이고, 이것이 받아들여 졌다면 그토록 처참히 깨지진 않았겠죠. 무능한 임금에 적인 당파가 옳은 소리 하면 일부러라도 거짓을 얘기하는 신하들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거죠. 그때 왜국에 다녀왔던 김 성일....거꾸로 김 일성..... 묘하단 말야..... 이놈이 거짓 조언만 안했어도..... 진짜, 바다의 이 순신 육지의 의병장들 아녔으면 조선은 먹혔음.... 항상 어려울때 나라를 일으키는건 힘없는 서민들 이었습니다. 선조가 신하들에게 휘둘리지만 않았어도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사는 막았을건데
@@user-ko3eu8mb6d 고등학교 때는 기억 안 나고요. 현재 고고학계의 다수설에 따르면, 고조선이 철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일러도 B.C. 5세기입니다. 일단 극단적으로 BC 499년으로 잡아 보죠. 고조선 건국 년도를 B.C. 2333년으로 잡으면 BC 108년에 멸망할 때까지, 고조선 역사 2225년 중에서 철기를 쓴 것은 겨우 391년밖에 안 됩니다. 그것 마저도 철기를 흔히 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는 원삼국시대인 백제 무령왕 때도 만들었습니다. 무령왕이 만들어 열도의 '남제왕(한자만 보면 남동생 왕)'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선물로 보낸 청동 거울도 있고 무령왕릉에서도 청동 거울이 나왔습니다. 참고로 저는 식민사학, 환단고기, 동부공정, 모두 거부합니다. 참고 자료 = m.blog.naver.com/eunayoon715/220786418853
칼과 관련된 영상을 시리즈로 만들고 있었는데... 재밌는 내용이네요. 사실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자면... 1. 일본의 제철 기술은 한국이 전해줬다. 2. 일본의 제철 기술은 조선이나 중국보다 뒤쳐졌다.(철의 품질도 한 몫) 3. 그러나 칼 제작 기술과 검법은 일본이 두 나라를 압도했다. 4. 조선은 화포와 활의 발달로 칼을 등한시 했다. 5. 그래서 조선과 명 두 나라는 일본도를 수입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6. 현재 한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 자국의 검법은 물론 칼 유물도 대부분 유실된 상태. 7. 일본은 칼의 나라 답게 많은 칼 유물들을 비롯해 유수한 검법을 계승&발전 시켜나가는 중. *과거야 어찌 됐건 현재 자국의 문화를 잘 보존해 나가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야겠네요.
사실 임란 초기에 조선군이 연전연패를 한 것은, 조총의 위력보다는 조선 전기 200년 평화 동안, 조선군이 완전히 형해화 수준으로 몰락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싸움을 하기 전에 조선군은 이미 패잔병 수준이었으니까요. 그것에 비해 일본군은 풍신수길이 전국을 천하통일한 당시 최강의 군사력이었음. 즉, 조총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임. 애시당초 전쟁 시작 전에 진 게임이었음. 조선은 대포의 나라였음. 대포가 조총에 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임. 그러나 대포를 가졌다한들, 이미 패잔병 수준의 조선군으로서는 당시 무엇을 해도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함. 사실 조선의 조정도 이미 조총의 존재를 알았음. 명을 통해 들어온 것도 있고, 임란 이전에 이미 대마도주가 조총을 조선의 조정에 바치면서, 일본의 침략을 알렸었음. 그러나 조선 조정은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것임. 습한 날씨와 장전해서 발사하기까지의 시간 등을 고려해 볼 때, 조선활의 위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게다가 대포의 위력을 감안하면, 조총의 위력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오판이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그것은 잘 훈련된 조선군이 준비돼 있을 때만 적합한 이야기임. 조선 초기에 조선군이 연전연패한 것은 조선전기 200년 평화 시기 동안 조선군이 완전 몰락한 것에 비추면 매우 당연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이 전쟁에 대응하여 점차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조선의 힘이라고 봐야 함. 전국 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군사력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 중 하나였음. 그리고 한반도에 출전한 일본군대 외에도, 총군사력의 1/3 정도가 일본에 잔류해 있었음. 이런 강력한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결국 정복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조선의 잠재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던 거임. 이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함.
조선의 잠재력은 바로 백성들의 잠재력이죠. 나라가 위태해지자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승병들. 남자들뿐 아니라 여인들도 가지가지 방법으로 싸운것을 보면 이 나라는 백성들이 지켜온 백성들의 나라인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밥그릇 싸움은 좀 그만하고 말입니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쉽게 밀렸던 이유 첫번째는 일본 침략군의 병력수를 너무 적게 예상한 겁니다. 1~2만 수준으로 대비했었는데 15만 이상이 와버렸죠. 동래성, 부산진성에 모두 정예장수를 파견해 놓았지만 병력차가 너무 심하게 나서 뚫린 겁니다. 두번째는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 때문이죠. 전란이 생기면 수도에서 장군을 파견하고 지방에서는 군사들을 소집해서 부대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부산이 너무 일찍 뚫리니까 각 부대에 지휘관이 없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파견되는 조선 장군들보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더 빠르니까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병사들이 흩어져서 그냥 땅을 빼앗겼던 겁니다. 이 병사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의병이 됩니다. 제승방략을 만든 이일 장군 조차도 상주전투에서 오합지졸로 모인 병력이 와해되어 일본군에 쉽게 패합니다. 그나마 제승방략 대로 정상적으로 꾸려진 신립의 부대도 패배하면서 제승방략 제도는 쓰레기였음이 판명됩니다. 기존에 조총이 두려워서 일본군에 졌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죠. 조선은 천자총통 부터 승자총통까지 다양한 규격의 화포를 운용하던 나라인데 그까짓 소구경 조총의 위력은 우습죠.
애휴 너무도 고통스러운 우리 선조 정치는 최악 이엇지요 그것도 설명 하여 주시지요 오또게 조선의 정부의 모든것이 중국에 보고 대엇는지요 현재는 우리 과학기술이 실시간 중국에 보고 하고 잇는듯한 모습 너무도 아니 우리보다 먼저 그들이 시제품을 내노아 선점 하려 하는 능력 기각 막힘니다 오또게 우리가 개발하고 잇는것을 그들이 알고 먼저 엉터리지만 먼저 내노을수가 있는지 참으로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다 하지 안을수 없지요 lcd tv 내주고 이젠 중국도 oled에 눈을 떠서 그것을 개발 완성 하려고 노력 하고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oled 재품 재조 판매로 얻는 수익이 얼마나 지속 댈까요 하는 물음이 생기지요 1~3~5년 정도 우리가 제조 판매 하고 중국에 넘겨야 할가요 현 더높은 티비 개발해도 특별희 얻는 이익이 없지요 더 높은 능력의 티비 개발하면 oled tv와 가격경쟁을 해서 이겨야 하는대 말이지요 즉 가격이 같던가 더 싸야 경쟁력이 생긴다는것이지요 헌대 중국은 자채에 노애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지요 중국 국민이라 하나 민족으로 따지면 어떤 민족은 노애 같은 삶을 살고 어떤 민족은 지배 하며 살지요 그 노애민족을 오또개 이길수가 있나요 거의 이길대쯤 우리 기술이 또 방출 똑같은 시제품이 나와 판매 댈것인대요 중국의 기술이 높아 질수록 더 빠르게 우리 기술이 실시간 제조 대겟지요 즉 우리가 개발한 모든것이 바로 중국에 넘어가 바로 중국에서 재조 판매 대고 있겟지요 차라리 그때 부터는 개발비를 중국에서 받고 개발하여 주는 것이 이익이 대겟지요 개발비라도 건져야 하니까요
칼도 대포도 군함도 더 잘 만들었고 사령관들의 지략도 열배의 적군을 무찌를 만큼 최고수준이었지만 그것은 그때뿐이고 그 후 수백년을 공자왈,맹자왈 또는 "충신 불사이군"하다가 기관총과 신형 군함, 대포를 앞세운 강포한 외적에게 나라를 잃었으니~과거에 찬란한 문화와 기술에 자신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국이나 국제정세에 어두우면 안될것 입니다/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잘은 모르지만, 이도류라고해서 무슨 도법이나 무슨 검파벌라고 생각했는데 ᆢ예비용으로 두개를 차고 다닌것은 이도류, 세개를 차고 다니면 삼도류라고 하는 모양인데 ᆢ 암튼 별것 아닌것을 잘 포장하거나 , 의미를 부여해서 대단한 것처럼 만드는데는 대단한 나라가 일본인것은 틀림없는듯. 이제 그 실체가 까발라져 가는것을 보면 조작ㆍ은폐ㆍ 미화에 특화된 나라라는 것.
@@user-wu7tw3ot4y 정확하게 아는분 드디어 나타나심..ㅋㅋㅋㅋㅋ 이도류 삼도류..ㅋㅋㅋㅋ 바람의 검심 보믄 다 나오는데.. 미야모토무사시나.. 미야모토 무사시가 검술의 달인인줄 아는 바보도 있드만요..ㅎㅎ 실전의 달인인데.. 승리를 위해서 예나도가 필여ㅛ없다.는..기회와찰나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국뽕참 유치하다.. 우열을 가리고있네 문화로 그리고 중국 역사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위력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현대에서의 일본도는 스페인의 레이피어처럼 일본도 감성 자체를 좋아하는거지 다만 한반도에서 일본의 철기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건 팩트임 근데 이게 무슨의미가 있는지 결국 문화적인 영향은 주고받는것인데 이걸로 우열을 가리는게 참 한심할 따름
카타나..ㅋㅋㅋ 일본 애니가 환상을 삼어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카타나가 대단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 많죠. 사무라이도 환상에 빠져서 키도 작아서 칼을 길게 만들어진 거고 칼도 질 낮은 철광석들로만 만들어서 너무 잘 부러졌고, 괜찮은 명검이라고 하는 칼도 이 다 빠져서 몇번 싸우고 나면 그냥 버리고, 아쉽지만 조선은 칼을 만드는 방법이 모두 실전 되어서 지금 만드는 방법을 모르죠. 일본이 하는 방식이 조선 칼을 만드는 힌트가 될 뿐.....아직도 계속 찾고 있죠.
그래서 당시 일본에게 근접전 개털려서 조선내에서도 일본으로부터 전문적인 검술,창술을 배우고 일본도가 당대 으뜸이라고 함? 그리고 애초에 칼은 단순히 한종류만 있는게 아닌 상황과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어서 상황과 용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칼을 쓰기 위해 길이가 다른 여러종류의 칼을 차고 다녔고 그건 유럽 기사들도 마찬가지임.
세종때에도 제대로 대마도 하나 점령하지 못해서 수백명병력 잃고 털려서 병력대 병력으로 제대로 이기지 못하자 결국 대마도가 식량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대마도를 포위해서 대마도가 식량이 없어서 항복을 받아내는 식으로밖에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게 조선의 국력이였는데. 헛소리 하고있네.
임진왜란때 조선군과 일본군의 검술차이가 엄청 큰건 사실입니다,,,그래서 임란 이후 우리도 일본군의 검술을 많이 참고했었구요,,현대에도 검도를 배운 사람과 일반인의 차이는 넘사벽이니까 그것이 전쟁이었다면 더더욱 차이가 컸겠죠,,,칼의 강도는 당연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서 발달했지만 그것을 다루는 검술과 훈련이 전혀 안되어있었죠
라기보단 리치차이가 컸던게 더 클겁니다 카타나는 못해도 70cm이상은 됬는데 세종때 기록을 보면 문종이 근위병들을 불시에 검문했을때 원래 60cm는 되야할 환도가 그것조차도 귀찮다고 날을 빼버리거나 짧게 잘라놓고 근무를 서서 국문을 당했을정도였기에 1차적으로 리치 차이가 있었고 2차적으로가 님이 말씀하신 근접전에대한 훈련도가 적었다는 부분일겁니다 원래 조선초기 세종,문종대까지는 무관시험에 마상창술과 검술등이 포함되었는데 후의 세조가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죄다 없애고 궁술과 기마궁술에대한 시험만 남겨서 실질적으로는 개인역량에만 기대는 형태가 되어 실제 단병접전에서는 님이 말씀하신대로 이기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이 산에 들어가서 활을 쏘면서 기습을 통해 기세를 꺾는 방식으로 몰아내기 시작했죠
애초에 검이 전쟁에 많이 쓰였다고 착각하는게 문제임. 진짜 전쟁은 검으로 싸울수가 없음. 진형짓고 보병, 궁수, 석궁수쓰는데 무슨 쿵푸 영화도 아니고 어떤 미친놈이 검뽑고 ㅈㄹ을 함? 대열이 갖춰진 군대단위 상대하는데 손에 쥔게 검이면 그게 카타나든 식칼이든 그냥 칼이다. 남 몸냄새나맡는 영역안에나 휘두를수 있는 최단거리 호신용 무기다. 전쟁을 이미 다 이긴후에나 농락한다고 검뽑고 후퇴하는 놈들 찔러죽인거지 (게임으로 치면 상대가 너무 쉬워서 총치우고 칼로 찔러죽이는거랑 똑같음). 가죽 갑옷만 입혀도 현대식 검이 날로 베는건 힘들다. 실제로는 창도끼나 엄창나게 긴 창 (2-4.5 미터의 전봇대 수준), 활, 석궁, 조총, 이런걸로 싸웠다. 군대를 다녀왔고 어떻게든 권총과 소총을 사용해봤다면 권총이 얼마나 ㅂㅅ같은 무기인지 바로 알수있다 (살상 사거리는 소총의 최단거리의 반, 위력은 반의반 정도, 명중률은 비교자체가 안됨. 설마 명중했더라도 적군이 케블러만 입어도 대가리샷 아니면 절대 안죽음). 차라리 권총 한자루에 권총 탄창 3개 받느니 30알 소총 탄창 하나 더 받는게 낫다고 생각할수있을것이다. 검 이 딱 권총 수준이다
조선의 철강기술이 일본보다 낫다는건 인정. 하지만 칼에 대한 주제로 쭉 갈것이지 거북선과 화포를 예로 든건 의아함. 거북선은 철강보다 '조선'기술이고 화포는 흔히 철로 만들었다고 착각하지만 주 재료는 '구리'(황동). 일본도 보다 우리 칼이 우수하다는 영상은 달갑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일본장수와 우리가 맞붙었을 때 대부분 우리가 졌습니다. 칼의 강도나 싸움실력보다 중요했던게 무기의 길이였는데, 일본도가 우리나라 칼 보다 길어 간극조절이 잘 안되 낭패를 겪었다고 해요. 카더라로 철강기술이 우리가 위이니 조선의 장수가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잘못된 정보는 별로네요.
@@user-pg2bb4tt8v 총통: 재질 청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포(砲))] 청동 합금을 사용해서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 철로 주조된 대포에 비해 청동제 대포가 더 안정적이다. 위력과 신뢰성이 우수했던 나폴레옹포도 청동제 대포다. 강철제 대포를 양산하는 것은 근대에나 가능했으므로, 유럽도 19세기 중반까지 철제 대포 뿐만 아니라 청동 대포를 계속 사용했다. [출처: 나무위키]
다들 일본 장인정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일을 대를 이어 한다는건 자칫 훌륭한 전통인 것으로 미화될수있고 일본 역시 대외적으로 이렇게 홍보해오고 있죠. 하지만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오래전부터 일본의 하류층들이 상류층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에 불과합니다. 한국처럼 과거를 통해 신분상승을 꽤하는 제도도 없었고 오직 부모의 하잖은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며 생계를 꾸릴수밖에 없도록 만든것이 오늘날 장인정신으로 포장되어 이어오고 있는거죠. 그래서 정치인들도 장인정신이란 명분으로 자기지역에서 대대로 의원직을 자식들에게 자연스럽게 물려주며 해먹는거죠. 일본의 전통이란 것은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국민들을 우민화시키기 위한 장치들이 많습니다. 이에 반발하지 못하고 순응하며 ㅂㅅ같이 살아온 것이 일본 국민들이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한 자민당 독재는 계속될겁니다. 그리고 서서히 썪어가며 주저 앉겠죠. 솔까 일본엔 미래도 희망도 없는것이 현실입니다. 이 모든건 정치인도 일왕도 아닌 일본 국민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입니다. 정치에 관심없는 국민들은 자신보다 어리석은 자의 지배를 받게된다는 대표적인 예가 니뽄인거죠. 사요나라!
장인정신 문화가 신분제도의 변천사를 따라 발전한 건 맞는데, 그 뒷부분을 좀 말아먹으셨네. 일본의 장인문화는 신성성에 기원을 두고 있음.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지고 사회가 차츰 변해갈 때쯤에는 사무라이나 고위층을 대상으로 일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에 그 '하찮은 일'의 질이 낮으면 집안 전체가 곤란해짐. 이게 가업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성성이 깎이고, 사회가 변하며 장인들의 위치 또한 변했기 때문에 이에 정부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의 예우를 해줌. 그러다 도쿠가와 집권 이후 나라가 안정되면서 장인들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이게 지금까지 이어져 '장인정신'이 된 것. 그리고 신분상승을 꽤하는 제도가 없다는 것도 사실 큰 의미는 없다고 봄. 과거제 자체가 난이도가 극악이었기도 하고, 옛 중국처럼(?) 능력을 인정받아 용인들에게 등용되면 무사계급이 될 수 있었고, 공명첩처럼 무사와 계급을 거래하기도 했음. 그 외에는 뭐... 결혼 정도?
사무라이가 찬 두개의 칼 중 하나는 할복용이라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자주 부러지는 칼때문 에 예비용으로 차고 다닌거군요 역쉬 일본인들은 별것도 아닌걸 과대포장하는데 일가견이 있네요.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역사가 고증한 한국의 검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져도된다는개 기쁩니다. 하기야 고구려의 철기군의 위력이 대단했다는데 우리는 여태 그 자랑스런 철강기술을 잊고 부정하고 잊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유교문화 전파되면서 무를 하찮게 여기며 서서히 잊혔던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벌어진 왜란때에 왜병들에게 백병전에서 매우 약세를 보여줬다는 조선왕조실록의 역사기록들을 면 이런 해석은 정확하지 못한것 같군요. 실제 전투기록에서도 왜군을 우습게 보고 덤볐던 조선의 맹장들은 하나같이 참패를 면하지 못했고, 왜군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여 전투에서 승리를 얻어낸 장수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중국의 요소수 생산 문제를 진작에 롯데가 제일 먼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관련 기업은 롯데정밀화학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부에 보고하고 건의하여 요소수 생산을 확장, 유지해야 함에도 그들은 중국과 생산중단, 감산을 맞추었습니다. 롯데 진짜 무책임한 기업입니다.
팩트부터 말하면 일본도가 환도보다 몇십배는 뛰어남. 또한 검술도 일본이 더 진보됨. 애초에 조선의 주무기는 활이였고 칼은 그냥 보조무기 정도였기에 환도를 발전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음. 하지만 애니에서 나오는 씹구라도 있는데, 보통 칼이 칼을 가르거나 갑옷도 베어버리는건데 이건 불가능함. 철이 어떻게 강도가 똑같은 철을 벰? 또한 갑옷은 망치질로 구부리고 담금질까지 했기에 칼로 갑옷이나 철을 베는것은 불가능했음. (여기서 말하는 갑옷은 중세의 풀-플레이트 아머와 현대 및 근대의 방탄모 등을 말함) 검도가 실전성 없는 스포츠로 묘사되는데 절대 아니며 검도는 실전성이 있는 검술의 한 종류임. 사람 하기에 달렸지만 수련하면 다른 검술과 충분히 맞붙을 수 있음. (보통 다른 검술과의 승패는 검술, 무기의 종류보단 어떤 사람이 더 실력있나에 달림)
국뽕 채널이라지만 틀린게 많네요 일본도가 잘 부러진다는 오해는 전국시대 전까지입니다 전국시대 전엔 사철로 만들다보니 검의 강도가 떨어졌지만 전국시대 후 포르투칼에서 강철을 사들여 강도는 충분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록보면 조선군 손목 발목이 모두 잘려나갔다 라고 하는거보면 예리함은 충분했습니다 칼 두개는 대부분 정통적으로 엤날에 그랬으니 같이 찬겁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검끼리 부딪히고 뼈에 무딪히면 롱소드도 부러집니다 한국 환도는 한손검에 짧았어요 조선은 근접전을 싫어했으니까요 그렇게 잘 부러지는 검에 단병접전에서 조선군은 튼튼한 환도 가지고 왜 털렸을까요? 롱소드 vs 일본도 이것만 보고 일본도가 구리다는분들.... 애초에 사용 목적이 달랐어요 풀플레이트 아머착용한 서양은 검이 두껍고 양날에 넓죠 공격 방식도 걸어서 넘어뜨려 찌르거나 관절부위 공격 반격에 집중되있어요 일본은 대부분 경장갑이였습니다 찌르기 보단 베는 일이 많아 베기에 집중됬도 곡도로 변해갔죠 애초에 vs 놀이는 되게 객관적인거라 맹신하면 안되요 애초에 베다가 칼이 구부러 졌다 는건 대부분 사용자문제이지 칼의 문제는 미미합니다 특히 현대 공법으로 만든 검도 잘못 베면 이 나가고 부러집니다 사무라이 싸움 법에 태클 거는데 롱소드 검술만 봐도 빗겨내서 찌르기 걸어서 넘어뜨려 찌르기가 많아요 아무리 일본이 경갑으로 무장했다지만 갑옷은 갑옷입니다 나무나 철판은 못 베요 그건 롱소드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전국시대 무기의 의해 발생한 사상자 통계 보면 주로 활 창 조총이 피해를 많이 줬지 칼은 그렇게 많지 안았어요
지나 가다가 적습니다. 칼 같은 무기는 강도가 중요하기는 한데 너무 강하기만 하면 오히려 충격에 부러집니다. 칼은 사용하는 철의 순도, 탄소 조절(열 조절과 두드리는 방법), 단조 방법, 열처리 방법에 따라 품질이 들쭉날쭉합니다. 강도와 탄성이라는 모순된 성질을 조화시기키 위해 단조할 때 여러 번 접거나, 차등 열처리(흙 같은 것을 다르게 입히는 등)를 하죠.
이래서 한국이 진거지 사실 조선 초기때까지만해도 당시의 명은 그렇게까지 압도적으로 강하진 않았음 근데 갈수록 유교질 하며 쓸모없는 글공부만해서 실리적인것을 못챙겼지 반면일본은 전국시대로 서로 전쟁을 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려면 기술이 좋아져야해서 실질적인것들이 일본에서 대접받으면서 조선이 일본에게 진 이유임 솔직히 조선때 잘했다면 만주도먹고 지금도 일본보다 강했겠지
그거 거짓입니다 칼을 두개씩 들고 다닌 이유는 그 두 검 길이가 서로 다릅니다 즉 상황과 장소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이가 다른 검 두자루를 차고 다닌거죠 하나는 일반 카타나고 다른 하나는 와키자시로 일반 카타나보다 좀 짧습니다 주로 좁은 공간 및 실내에서 사용합니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허상...... (조선의 무딘 생선칼) 실전 생활에서..... 진짜 많이 쓰이는...... 어판,어류상인들이..... 선호하는 진짜 많이 쓰는 칼은...... 날만 날카로운...... 일본식 생선회칼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내구성과 강도가 무척세서..... 칼을 버리지않고 오래동안 사용할수있고..... 날카로운 날이 쓰다보면..... 금세 무뎌지면 ..... 그때그때 ...... 날을 갈아서 쓰는 투박한 ..... 조선 무쇠칼을...... 자르고 쳐내고 베고하는 ...... 생선집에선 가장 많이 쓴다는 사실....... 칼날의 예리함은..... 갈기만하면..... 생기는 것이고 ..... 이 예리한 칼날의 성능을..... 일본도의 우수함으로 포장했고..... 여기에, 장인장신이란..... 그럴듯한 신비의 스토리로 포장해서..... 온갖 일본 만화와 애니,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가공되고 포장되면서..... 대단하고 신비로운 일본도의 신화로 탄생한다. 예리함으로만 따진다면..... 면도칼보다 더 예리한칼날은 없다. 그러나, 면도칼은 몇번 못쓴다. 더군다나, 면도칼은 살을 ..... 베는용도로 쓰일때만 유리하지....... 매일같이..... 몸집이 큰 고기나 ..... 큰 생선들을.... 쳐내는..... 잘라내는 용도로는..... 날보다는 강도(내구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일식집의.... 일본식 생선회칼은 생선살을 얇게 베어내는 용도로만 쓰지...... 매일 매일 ..... 생선들을 쳐내 판매하는....... 전쟁같은 어시장 생선좌판에선 ...... 날은 무디지만..... 언제든 갈아쓰는 무식한 조선 무쇠칼을 쓰는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일본 사무라이들이나...... 자신들 존재를 부각시키고 실제 개인칼싸움 용도로는..... 신변보호,경호용 또는 일방적인 용도로 사용했지..... 조선의 무사들이나.... 칼들도 실제 자신의 신변보호나 경호용으로 많이 쓰였지...... 실제 다수 무리들이 집단으로 싸우는 실제전쟁에선 칼의 용도나 효용성은 극히 미미했다. 실제 전쟁에선..... 활이나 창 같은 것들이 주로 쓰였다. 그래서, 조선에선.... 칼이 .... 그렇게 강조되거나 부각되지않은 것이고..... 문화 또한, 무보다 문을 더 숭상했던 영향도 컸지만.... 조선에서 칼은 무기로서는..... 보조용도의 무기로 취급했다. 하지만, 일본은..... 독특한 문화이자 계급으로서...... 무(칼)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사무라이 계급이 존재했고...... 이런 독특하고 특이한 (칼이 권력이 되는)문화로 인해........ 일본도의 신화와 칼을 만드는 장인의 스토리등...... 이야기와 포장이 가미되면서..... 외부인이 볼때..... 신비로운 대단한 일본의 사무라이 스토리와 같이 연출되면서...... 일본도의 환상과 신비로움이 만들어진것이고...... 이런 문화적 포장과, 홍보도 ...... 근대 서양을 향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양은 아시아 문화와 별다를것없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를 신비롭게 본것이고..... 오히려 아시아가 아니라..... 서양(유럽)에서 동양으로 역으로 전해지는...... 신비하고 특이한.... 일본 사무라이 선호.... 문화현상이 생긴것이다. 단지,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칼을 어떻게 보았는가하는...... 문화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