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우리 역사 스토리텔링쇼 #벌거벗은한국사 00:00 광해군의 숨겨진 이야기 00:44 임진왜란, 세자가 된 광해군 04:57 광해군, 혼란의 조선을 수습하다 10:20 아들 광해군을 질투한 선조 16:53 세자 광해군 또다른 위기에 봉착하다! 20:00 가까스로 왕이 된 광해군 22:33 불안함에 친형을 겨눈 광해군 24:51 돌아섰던 민심을 사로잡다
선조는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쩌는 인간이었고, 또한 쏘시오패스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참 고달펐을 것이다. 임란에 공이 큰 광해군, 이순신, 류성룡 등을 절대 칭찬하지 않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들 또한 다 죽여 후환을 없앤 인물이었다.
@@user-sy6qp1fw8e 가장 크게는 이순신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원균같은 놈한테는 공을 인정하면서 이순신한테는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죠. 도원수 권율 공신 책봉때도 피하는 전술 사용했다고 칠량해전에서 원균 내몰아서 죽에만들었다면서 1등공신에 포함안시키려고 버르다가 결국 5년 뒤에나 포함시켰죠. 셀수도 없어요! 그래서 결국 잠석해버린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쯧. 모르면 공부를 하세요 공부를
아닙니다. 영창대군을 지지한 사족은 소북중에서도 유당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동인이 분화되기도 전부터 광해를 세자로 하라고 주창했었습니다.(이거 때문에 정철이 팽당하고.) 그렇기때문에 광해정권 초기에는 서인과 남인 그리고 대북의 연립정권이였고 여기에 소북도 참여했습니다. 오직 유당(탁소북)만이 끝까지 영창을 지지하다가 숙청되죠. 사실 영창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미 전쟁 영웅 타이틀 하나때문에 사족들이 눈길하나 주지 않았고요.
@@user-hy2kr8bc9f 그래서 광해군 집권 이후에 영창을 광해의 라이벌로 인식한건 대북 뿐이었지 나머지는 유당마저 정리된 상황에서 굳이 영창을 지지할 이유는 없었죠. 먼곳에 유배하고 나중에 죽이자는 상소가 빗발칠때 죽여도 되는걸 대북이 충동질 하자 바로 죽이는데 쓸데없이 너무 일찍 죽였습니다.(어차피 서인 남인도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서면 죽이자고 상소를 올렸을겁니다.
@@user-hy2kr8bc9f 명분상 그럴 확율은 희박합니다 이미 세자가 광해군으로 영창대군 탄생 이전부터 확정된 상황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일찍 죽거나 사도세자 양녕대군 처럼 세자의 신분으로막장으로 살거나 하지 않는한) 당시 유교적 가법 제도상으로도 본부인에게 자식이 없어서 서자나 양자로 종통을 이을 후계자로 삼았으면 나중에 본부인이 자식을 낳더라도 이를 무를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 유당도 세자를 바꾸자는 소리는 공식적으로 입밖으로 꺼내질 못했습니다. 그 말 나오는 순간 역적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록이 정확하게 신뢰할수 있는지가 의문인데 현재의 해석은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경계해서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사주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만 문제는 여기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우선 영창대군을 죽음을 집행했던 강화부사 정항이 반정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반정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어떤 진상조사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의문입니다. 진정으로 광해군의 폐륜을 조사하고 반정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진상조사는 필수인데 그것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북이 영창대군의 죽음을 사주하였다라고 하는데 이이첨은 몰라도 정인홍은 되려 더 반대였습니다. 정인홍은 폐모살제에 적극 반대했습니다. 헌데 반정세력들은 정인홍이 폐모살제에 적극 나섰다라고 둘러 쒸웁니다.
@@Jabberblabla 광해의 해결책은 매관매직이었음. 궁궐 짓는데 필요한 것을 지원하고 벼슬을 얻은 자들이 있다 연은도정(蓮恩都正) 응호(應虎)에게 가자하였는데, 영건 도감에 철 5백 근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庶人) 이현룡(李見龍)도 철을 내었다는 이유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영건 도감에 터·돌·재목·철·포·곡식 등을 내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을 얻는 자들이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심지어 생선·소금·젓갈을 바치고서 등급을 뛰어넘어 높은 벼슬에 오른 자도 있었다.
@@kmh624 광해군은 우리가 중립외교와 대동법 때문에 성군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폭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파괴된 궁궐을 복구하는 공사를 지시했는데 이게 문제는 너무 과했습니다.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아예 증축을 명했을 정도에요. 이로 인해 농번기에 강제로 차출당한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부족한 재정을 메꾼다고 매관매직까지 일삼았어요. 형인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건 유명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강제로 서궁에 가둔 건 유명하며(이건 현대 기준으로도 패륜이다)증거도 없이 몇몇 신하들을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가족까지 멸문지화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권신들을 관리하지 않아 붕당간의 경계가 깨졌죠. 심지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대동법 시행도 정작 광해군 본인은 반대했으며 광해군은 말년에 한 궁녀와 주색잡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폭군의 모든 걸 다 갖춘 셈이었습니다
@@phdogy 조선 중기처럼 꽉 막힌 시대가 비교적 아닐 뿐이지 명분으로 따지면 더 취약함 왜냐 우리는 신진사대부다 고려 권문세족 따위랑 다르다를 내세웠는데 결국은 썩은 건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왕조 극초기면 더욱 혼란스러워야 맞는데 그렇지 않았음 그냥 광해는 만만했던 거고 태종은 무서워 죽겠던 거지 세상살이 답을 내고 끼워맞추기의 연속임
선조, 인조, 고종은 군으로 내리고 광해는 조, 종으로 올려야 합니다 선조 -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 황폐화 인조 -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국토 황폐화 고종 - 40년 동안 일본에 국권 뺐김(제일 개xx) 한국사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저시기에 한민족을 노예로 데려가기도 하고 재미로 죽여버리기도 하고 여자들을 셀수 없이 강간한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다시는 역사에 저런 지도자가 나오면 안됩니다. 너무 많은 선량한 민중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광해는 폭군이자 암군이 맞습니다. 선조가 임란 7년동안 찌질한 모습을 보였지만 임란에서 양위파동을 이르킨것 정도를 빼면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애초에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진 개폐급라인에서 나온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한(대여진 외교, 대동법등) 뛰어난 행정가가 선좁니다. 7년못한걸로 30년을 잘한것을 못했다고 할 수없죠. 명암이 분명한 군주였을 뿐이지. 인조도 선조와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인조는 선조처럼 재평가 할 부분이 적고 전반적으로 암군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한게 없는것도 아니고 광해에게 선조때문에 분조장 온거라는 프레임으로 커버쳐준다면 인조에게도 광해가 박살낸 내치와 인재플에 대해서 두둔해줄수 있습니다. 광해가 망쳐버린 조선의 내치를 정상화 시킨 사람이 인조거든요. 물론 호란에 대해서는 변명에 여지가 거의 없지만요.(광해때문에 군사력을 키울수 없었다도 정묘호란까지이지 병자호란은 논외.) 고종도 방법론이 잘못됬을뿐 노력은 열심히 했습니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싸운사람이 고종이니까요. 방법론과 방향성, 외교적 실패등으로 실패한 군주지 무기력한 군주는 아니였습니다. 사실 광해군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평가된 왕일뿐이지 왕 광해는 강경하게 보면 연산보다도 아랩니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말할만한게 존재하지 않는 왕이 광햅니다. 조선을 망친건 세조/연산군-중종-(인종)-명종라인(사실상 조선을 정체시킨 라인)/광해군/인조/숙종/순조/고종입니다.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장 인터넷에서 물고빠는 정조보다 업적이 우월한게 선조인데 뭔 개소리를 이렇게 ㅋㅋㅋ 궁궐 짓는다고 서북방면 군량미 죄다 삥땅치고, 방납으로 돈 빼돌려야하니까 이원익과 김육이 그렇게 주장하는 대동법을 다 죽일 기세로 반대하고, 명황제가 임진란 참전 백성들과 유족들 주라고 보낸 은도 다 빼돌려서 한푼도 나눠주지 않은 광해가 성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니가 물고 빠는건 광해가 아니라 이병헌이예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고 했는데, 수신은 그렇다쳐도 가정 하나 재대로 못 이끌면서 왕 노릇하는게 화가 납니다. 믈론 가정을 잘 이끌어 가는 것만으로 위인이라 할 정도로 쉬운 일이 절대 아니지만, 수백수천 종류의 사람들과 이햐관계를 짊어져야 할 왕좌에 비하면 그나마 쉬운 일이 잖아요
왕자리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해산물 많이 먹고 80살 까지 천수를 누리며 마음은 쬐끔 불편했겠지만 암튼 오래토록 살다가 죽었다. ㅋㅋㅋ 그동안 육지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나라에게 굴욕 당하는 중이었고 인조 모지리가 삽질 중이었다. ㅎㅎㅎ 광해군 형과 동생은 사이코패스 였고 기분 나쁘면 민간인을 맘대로 죽였고 부녀자들을 겁탈..암튼 조선왕조는 이때 망했어야 했는데...성리학 기득권들이 절대 놓지 않았지. 현재 기득권들도 똑같은 세력들.😢😢
광해가 명나라에 군사를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14년이라는 세월때문이 아닐까요? 광해군 입장에선 명나라가 망했으면하는 심사가 더 간절했을 수 도 있겠다 싶습니다. 명석한 왕이 폭군이되어가는 과정 또한 강력한 왕권의 기틀을 못잡은 탓이겠지요. 불안하니까...
만일 선조가 한10년정도 더 살아서 영창대군이 10세가 넘어갈 상황이었다면 선조는 분명 세자교체를 하려고 했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선조의 세자교체행위에 대해서 피바람 나는 당쟁이 이어질수밖에 없습니다. 사도세자의 경우 비록 사후 그 아들로 왕위가 계승되었지만 정조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존재했고 실제로도 정조 즉위초기 암살위기가 몇번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영창대군이 장성해갈 경우 광해군은 정조보다는 월등히 왕위계승에 위험한 사항에 처해질것이 분명합니다.
@@Jabberblabla 일단 왕으로서의 기본인 내치도 못한게 광해고 내치로는 한국역사상 상위권에 있는 선조나 딱 평균수준으로 한 인조에게 비빌 껀덕지가 없습니다. 단지 인조는 외치부분에서는 심각한 부분이었습니다. 선조는 솔직히 외치도 크게 깔게없음. 이외에 선조-광해-인조모두 인성 문제를 지녔습니다. 선조가 이부분이 굉장히 강조되죠. 그러면 광해가 15년동안 한게 뭔가요??? 1.일부 소북(탁북만)을 제외하면 모든 당파의 지지를 받아 강한왕권을 가졌으면서 쓸데없는 옥사로 양반층 지지를 잃고, 극단적 유교 강경파이자 원론파인 대북(친명도 아닌 숭명파이다.)주도의 정치로 외교정책 망쳤다. (영창대군계 숙청에 대한 비판이 아님. 영창대군계 숙청은 당연한거임.) 2.무리한 토목공사로 "전쟁 영웅"이라는 특수성으로 가진 민심을 스스로 날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3.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런 외교정책을 주장한 광해는(정작 대북 때문에 국가 외교노선은 친명배금 노선이었다.)전쟁이 날 수도 있다면서 군비를 빼먹으며 궁궐을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4.사실 외교도 좋게 보장해서 중립이지 그냥 이도저도 아닌 외교정책이다.(현재 중립외교론은 거의 들어가는 추세이다. 이중외교와 같은 말을 더쓴다.) 이 이도저도 아닌 정책으로 자신의 친위대(대북)랑 싸우게된다. 5.개혁군주라는 사람이 서얼 차별 금지해달라는 거에 대해서 힘으로 찍어누르는 행보를 보였다. 지도 서얼이면서... 6.대동법 덕분에 개혁군주라는 소리를 듣지만 사실 선조때 이전부터 나왔던 것으로 선조때 논의되다가 광해때 실행된거 였다. 심지어 왕권에 ㅁㅊㄴ이었던 광해는 중국황제가 조공을 받는 것 처럼 나도 공물 받고 싶다고 대동법에 반대했으며 정치척인 교환으로 실행시켜주었다. 사실 대동법의 확산및 법안가동은 인조정권이 해낸 결과물이다. 7.전쟁 끝나고 양전, 인구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것도 안한(인조즉위 직후 실행함.) 사람이 내치에서 받을 +점수는 없음. 8.지가 키운 사냥개인 이이첨에게 역으로 끌려다녔으며 김개시에게도 흔들리는 전형적인 꼭두각시형 군주였다. 선조는 인간성이 문제가 있는 군왕으로 왕의 그릇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괜히 목릉성세가 아니다. 인조는 난세에 범인이 민족주의에 빠저 권력을 잡으면 생기는 일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광해는 한 개인으로서 똑똑했지만 정치 능력이 전무하였으며 연산군 마냥 왕권 강화에 ㅁㅊ놈이었다.
@@SWLEE-dj1kk 대동법의 기틀은 선조가 이미 재위말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았고, 광해는 경기도에만 실시하는 것도 부정적이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시한겁니다. 그나마도 6개월만에 폐지해버리려는걸 이원익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 막아섭니다 조세제도를 새로 시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는 별개로 광해가 대동법 자체를 싫어해서 안하려고 온갖 발악을 떤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방납으로 돈 벌던 세력이 대북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미국에 사대하는것이랑 같습니다. 조선이란 이름도 명의 윤허를 받은 이름이라 고조선 후기 위만조선의 이름을 따서 조선이 됩니다. 참고로 고려도 송나라에 사대하였습니다. 어이 없는건 송나라가 거란에 패배해 거란에게 물자를 바쳤지만 고려는 거란에 뻑유를 날리죠 왜냐면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를 멸한게 거란이니까요
광해군이 영창대군에 대한 아무런 견제의식없시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영창대군이 자라나면서 영창대군을 끼고 도는 정치세력이 성장할 가능성은? 다른 유튜브에 영창대군의 사주를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5GK1ex9ZxdA.html 그렇다면 언젠가는 영창대군이 광해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k_dori0105 광해군은 대동법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한 달만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비망기에 대동법의 뜻을 펼치고 두달 뒤 최초 시행하고 대동법을 꾸준히 경기도 지역에 실시하고 심지어 과거 대과에 논술 문제로 직접 출제했으며 폐위되기 불과 16개월 전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광해군의 신하라 할 수 있는 북인 인사가 대동미를 징수한 기록까지 있습니다. 광해 6년의 기록 한 줄 '경솔하게 동시에 실시할 수 없다'만 가지고 그 이외 광해군이 대동법에 진심이었던 많은 행적과 흔적을 덮을 수 없습니다.
@@user-od5me6li5f 세제개혁의지를 가지고 선혜법[=대동법]을 주체적으로 추진했던 개혁군주 광해군의 업적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꼬투리잡아 폭군취급하는 요즘 트렌드는 왜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름님처럼 역사 인사이트를 갖고 계신 분을 보니 가뭄의 단비같습니다.
@@likeaflower44 대동법은 광해군이 시작하고 추진한 업적이 맞습니다. 1. 즉위한 지 2개월만에 "선혜"라는 키워드를 담은 비망기를 내림. 이미 광해군은 방납의 폐단을 요목조목 지적하며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비망기에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선혜청이란 이름도 백성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면서 '무선일푼지혜(務宣一分之惠)', 즉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며 여기서의 은혜는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은혜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광해군의 비망기에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