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포격때 강원도 전차부대및 다련장 진지이탈했다. 선제타격한다고..지금와서 말하지만 6개월 넘게 진지 버리고 산골자기에 숨어서 적진지에 포탄사격준비다했었고 8군단 특공 뿐아니라 군단장 지시사항으로 탄조립까지 완료되었고 통신부대 제 2진지 통신망 확인 및 전방부대 돌격준비까지했었다. 그때 아무도 힘들단말안했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간부랑 병사싸운다고?ㅋㅋ 지라마라 둘다 눈돌아간 상태였고 서로존중하며 야전에서 6개월동안 숨어서 숙박했고 밥도 연기난다고 못하게 해서 주변 부대에서 비닐에 먹었다. 그때? 부모님께 연락조자 할 시간없었다. 그래도 우린 최선을 다했다. 130미리 다련장 탄조립ㅋㅋ 맨손으로 했고 사격진지에숨어서 하루8시간씩 사격 연습했다. 36발 실탄 조립 장전준비였고 명령떨어지는순간 전쟁시작이었다. 이때 ㅋㅋ병사고 간부고 하나였다. 불만조차없었고 불안하지조차않았다. 그냥 내가 해야할것만보였다.
@@chfg5762 제 개인적인 생각에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것에대한 제 생각을 풀어보자면 아마 옛 남성우월주의때문일수도 있고(우린 너흴 지키기위해 희생하고 대단하며 우리가 없으면 너희는 위험해진다) 혹은 주변국가인 일본과 중국이 남성이 주로 군대를가며 얻어지는 사회적인 입지다짐이나 효율성과 성차별역시나 존재하여 그리 행한것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여성 역시 본인이 국가를 위한 의무를 하고싶지만 나라에서 부르지않앗으니 안간다 라는식의 의견이 나오고있는것같은데. 그것만 해도 발전한것같아요 '여자는 애낳잖아요' 보단 났죠...
여하간 경찰,소방관,군인 등 사람의 목숨이 개인의 능력에 좌지우지하듯 맡겨지는 일은. 절대로 양성평등이니 나도하고싶은데 왜못하게 하냐 차별이냐. 이딴 말에 휘둘리면 안된다고 봅니다. 자꾸 천조국은 어쩌구하며 미국이랑 빗대어 말하는분들 몇분 계신대.미국은 경찰 소방관 군인 할것없이 특정직업이 하고싶으면 양성모두 그직업에 알맞게 준비된 사람만 뽑습니다. 말그대로 체력이필요하면 양성모두 턱걸이몇개 팔굽혔다펴기 몇개 윗몸일으키기 몇개. 똑같아요.. 그걸 수행할 수 있는 사람만 뽑기때문이죠.. 그런말들을 뱉는 많은 여성분들도 그런점은 좀 입감하고 알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라 보구요.. 그래도 가고싶다 싶으면 행정업무든 사무업무든 여러분야로 뽑으니 글로 알아보시던가. 혹은 제 댓글처럼. 입대는 하대. 간호부대 혹은 입대가 아니어도 나라에 헌신하고싶다면 남자들 예비군 민방위 받을때 만이라도 나와서 구호법...cpr,붕대감는법 등 방독면이라던가 기본적인 전쟁시 따른 교육이수없이 피난에서라도 혹은 후방에서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면으로 배웟으면 하네요
댓글 하나 하나씩 읽어보니 정말 눈물나네. 나도 저때 제대한지 6개월 차였던 예비역이었는데 저 뉴스 보고 정말 화가 나서 나라에서 소집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저때 당시 복무 중이었으면 아마 88년에서 92년생 사이였을 것 같은데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들에게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시 경기도 북부 양주에서 군복무중이었습니다 군에서 천안함과 연평도를 모두 겪었는데요 영상에도 나왔듯 연평도 사건때는 정말 전쟁하는줄 알았네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알았지만 정말로 휴전선을 넘어 황해도 토벌 계획이 실행 직전까지 갔었더라고요..몇일간 단독군장에 총기 휴대하고 다녔고 전투화도 못벗고 침상에서 가취침했던게 생각나네요.. 전쟁은 나면 안되지만 저당시 상황에선 욱해가지고 밀고 올라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기도 했었는데요 피할수 없었다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각오로 응징하고 토벌했을 겁니다 천안함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터라 연평도까지 터지니 개인적으로 정말 많이 빡쳐있는 상태였습니다 두려움보다는 분노와 빡침이 더 컸었고 애국심이 확 샘솟더라고요 미국이 적극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전쟁했겠군요.. 당시 북괴뢰군의 도발로 인해 전사한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 민간인 2분과 천안함 46분의 명복을 빕니다.. 🇰🇷
잊을 수 없는 날 입니다. 2010.11.23 그날은 저의 스무번째 생일이기도 했으니까요. 대학 강의실에서 들었던 속보 소식은 참담함 그 자체였던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 저는 해병대에 입대하고 최전방 강화도에서 근무 했습니다. 분노로 시작된 결정이였지만 시간이 가면서 느꼈던 점은 전쟁이란 절대 일어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였지요. 후배로써 연평도에서 순직하신 선배해병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전방에서 고생중인 우리 해병들, 국군장병들 너무 감사합니다. 더 강한 힘으로 전쟁억제력을 유지해주세요! 부탁합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네요, 당시 연평도에 있었던 해병대원입니다. 당시 영상에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장비도 열악하였지만 당시 너무 화가 났던 기억이 나네요, 보병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당하고만 있던게 너무 분하였지만, 전쟁을 피한 덕에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생하고 계신 장병분들 감사합니다.
연평도때 우리가 강하게 대응했으면 북한한테 이렇게 개무시는 안당했을거야 판문점 도끼만행때만해도 미국 무시하고 우리군이 올라가서 북한 초소 때려부실때 북한애들 다 도망갔다 북한은 항상 우리가 뭘 할수가 없으니까 계속 도발하는거야 연평도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되지만 또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제발 강하게 나가자 언제까지 질질 끌려 다니냐?
세월호를 비난하는것은 아니지만 목숨잃었던 아이들보다 이때 연평해전때 천안암때 목숨잃은 군인들께 보상을 더 해야하는것같습니다....이때 이병때 훈련받고 저는 공수훈련을 마치고 소청도로 부대이동 했다가 다시 기존부대로 왔습니다 그때 전사하신 연평도 두 해병님들 정말 가슴아팠습니다..
그...연평해전이랑 천안함 목숨잃은 군인에게 보상을 더 해줘야 하는건 공감을 합니다만 세월호를 굳이 꺼내실 이유가 있나 싶긴 하네요. 설마 특정 극성 유튜버들처럼 시체팔이한다 라고 생각하시진 않을 거라 믿어요. 별개의 사건이고 별개의 보상이 존재할 뿐 누가 그때보다 못 받고 더 받았니 하며 비교하는건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으면 그 유가족분들께서 소송을 하던 뭐 성명서를 내든 하셨을테니 그런거를 공유하면서 지지해 주시고 하시는 방향이 더 건설적일거라 생각되어 추천드립니다
@@Cathorn 두일모두 엄청난 비극이죠 나라를위한 목숨을 값으로 매길수도없죠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군인이였기에 그런생각이들었나봅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죄하겠습니다 저는 세월호의 이야기를 빗대서 말하고싶었던게 아니고 조금더 헌신한 군인들을 위한 내용을 언급한것입니다 시체팔이 이런 생각은 일도없습니다만 제말은 세월호 아이들의 목숨값이 너무과했다가 아니라 말그대로 군인들의 헌신한 목숨값이 너무도 적다입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단순한 제 의견일뿐입니다 연평해전을 보고 너무 속상했던 기억이 선명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사건 당시에 육군에서 군복무중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 현역 및 예비군 동원 연차 안에 있었던 남성들은 그 당시 전면전이 되면 본인이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분명히 느꼈었습니다. 마냥 두려울 것만 같은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비장함과 결의 같은 것도 솟아 오르더라구요. 다행이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그 경험을 한 당시의 현역과 예비역들은 사후세계를 경험해봤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갖고 있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경험처럼, 당시 실탄을 지급 받고 1주일 정도를 전시준비태세를하고 진짜 전쟁을 기다리며 불안과 공포속에서 유서도 작성하고 전투 상황 및 본인이 전사하고 난 후의 상황 등을 수 없이 상상해 본 것을 통해 마치 참전했던 것 처럼 왜곡된 기억이 있습니다. 정도가 약한 PTSD 같은 것 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8-90년대 생 남성들이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갖게 된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일단 육군 특히 북한군과 마주하는 최전방에 근무했던 사람들이나 이렇게 연평도 포격 서해교전 천안함등등 경험했던 사람들은 보수적일수 밖에 없음...저역시 저때 군에 있진 않았지만 예전에 김대중 햇볕정책때 gop에서 바로앞 gp교전을 목도했던 사람이라...북한의 실상모습을 모습을 알고 완전 보수화되었죠...
보수보수 하는데 보수는 힘으로 밀어붙이자는거임 진보는 햊빛정책으로(성공은못함ㅠㅡ) 서서히 밖으로나오게 하는정책 솔직히 정확한 답은없슴 진보래도 북한 절대싫어함 그냥접근 방식만다름 다만 외국전문가들은 문화적으로 북한이 무너지는게 최고라고함 지나가는말에 빼박이란 말이있는데 대한민국이 그런형국임 진짜 노답임 힘으로하자니 피해가너무크고 평화로하자니 열불터지고 ㅠㅡ 그냥 김정은 급사하길
10년 군번인데 이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막 자대배치 받고 생활관 막내생활 시작 할 때 였고 부대는 강원도지역 공병대대 완전무장에 얼굴은 검게 위장을 하였고 교대로 근무만스며 그렇게 쪽잠을자며 전시준비태세였고 정말 이상했던건 내가 예상한 분위기와는 달리 각소대 분위기는 엄청 차분하고 희생당한 해병대원의 뉴스를보며 분노하며 당장이라도 북괴와 싸울 수 있을것만같은 오묘한 감정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이 그려졌고 중대장은 바뀔거라 하였다 무서웟지만 그렇게 큰 두려움의 감정은 아니였던것같다 전역이다가오는 병장마저도 그때 만큼은 정말 진지하게 의기투합하며 전쟁을 준비하며 대기했던 기억이난다. 본지 며칠안된 선임들 분대원들이였지만 그 짧은 기간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전우애를 느꼈달까.. 그날의 사건 후 전쟁이 발발하지않고 일상으로 돌아갔을땐 다시 악마들이 되어있었지만 아직도 그때 분대장이 진지한눈으로 겁나냐? 했던게 떠오르네 전쟁나면 선임새끼들 다 쏴죽일거라 생각하곤 했었는데 막상 전쟁나면 그게 또 아니게 되더라싶었다
이때 포병부대에 있었던 예비역입니다. 아 지금은 민방위고요 이 때 어느정도였냐면 전방에 있던 부대들은 내일 당장이라도 개전할 수 있도록 화포에 포탄적재 완료하고 뒤에 차량에 포탄 전부 실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명령하달되는 순간 DMZ에서 지뢰가 터지든 말든 무조건 북진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전쟁을 하면 안되지만 이 때 당시 대부분의 장병들은 차라리 전쟁해서 저것들 눕히고 뒷일 생각하자고 할 정도 였습니다.
저날 저는 대구에 있는 전투비행단 소속 병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군과 민간인이 적 공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이 돌았던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화력의 부대였다는 자부심과 분노가 함께 섞여서 적의 선제타격 대상이라는 두려움은 1도 없이 출격만을 대기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에 참 긴장되고 힘든 순간이었지만, 모두가 애국심으로 한뜻이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포격 다음날 아침 헬기타고(승무원이었움) 연평도 날아갔는데 민가지역은 못들어갔지만 K9자주포 갱도주변에 파편 어마무시했고 군용렉스턴 다 박살나있고 막사 화장실 주저앉고 진짜 생난리였음. 그당시 우리해병대원들은 여기저기 계속 뛰어다니고.. 저사건으로 나의 안보관은 확실하게 확립되었움
천안함, 연평도, 김정1 사망 다 격은 09군번 병사출신 부사관으로 6포병여단 에서 근무했었는데 저때는 전쟁 무섭다 보다는 이번기회에 밀어버리자 라는 분위기가 더 컷죠 무섭기도 했었고 대대 이탈해서 전쟁 발발시 이용하는 사격진지에 처음 가서 대기해본터라 긴장도 많이 했었던게 기억납니다. 현역분들 고생많습니다. 다만 끌려오신게 맞긴 하지만 군대에서 얻어가는게 더 많으니 긍정적으로 군생활 하셔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진군!
사회 나와서 첫번째 근로자의 날 대전 현충원에 갔었습니다. 그 곳 문광욱 일병님의 묘소에, "동생이 가지고 놀던 물건입니다.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라고 쓰여진 큐브가 있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차마 오래 있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서정우 하사님, 문광욱 일병님 뿐만 아니라, 연평해전에서 전사하신 여섯 분과 초계임무 중 전사하신 천안함 마흔 여섯 장병분들, 그리고 그들을 직접 구하겠다고 뛰어드신 한주호 준위님까지, 모두모두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바다는 이 분들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아직도 주적이 수십명 죽인 북한이라고 생각하시나 ? 불법체류자로 들어온놈들까지 400 백만명 이상에 중국놈들이 건설현장에서 95%이상 다장악해서 1인당 하루 20 만원씩 돈다벌어가고 그돈다 중국으로 외화반출에 도심에는 가게 한집건너 하나가 중국 마라탕집으로 바뀌는데 인종교체 당하며 일자리 다뺏기고 자영업자들도 하루 36 명씩 자살하는 마당에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번 더 전쟁이나 나라를 뺏겨 지배당해봐야 뭐가 더 중요한지 알게 된다 너무 배가 불렀어
연평도에서 근무하고 있는 해병입니다 이렇게 선임분들께서 연평도 멀리 나아가 한국을 지켜주셔서 저희가 조금은 편안히 지내고있습니다 매일 근무에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이 ‘오늘도 전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겠다’ 그와 동시에 더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이바지 해야겠다는 맘을 갖고 임합니다 해병대 서북도서, 1•2사단 , 9여단 뿐만 아닌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군 장병 다들 고생많으십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더라도 지켜낼 수 있는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잘 자랐네 우리는 북한을 혐오하지도 지역갈등을 심화시킬 생각도 없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우리는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국민들을 위해 모든 경우의 수와 위험요소를 선제 제거해야한다.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이 나지 않는것이다. 그러기 위해 압도적인 국방력 또는 외교를 통한 문제해결이 있는데 우리는 근 20년 가까이 외교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된다는것을 몸소 느껴왔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압도적인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연평도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의 몇몇 군사시설을 공습으로 파괴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북한도 함부로 덤볐다간 자기들도 피본다는 생각을 하고 군사 도발 옵션을 선택할때 좀더 신중해졌을 겁니다. 연평도 포격 이전에 있었던 천안함 폭침 사건때 즉각적으로 북한에 국지적으로 군사적 보복을 감행했었다면 연평도 포격전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우리 군이나 미군이나 이런 국지적 도발에 대응한 보복 응징 계획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작계는 전면전을 가정한 것들이였지요. 연평도 도발 이후에서야 국지전 대응 메뉴얼이 만들어 진 것으로 압니다.
10군번으로 연천에서 취사병 복무중이였는데 그때 메뉴가 두부조림이였음.... 두부 썰고 있는데 취사이모가 어머어머 하면서 빨리 티비보라고 해서 나갔더니 연평도가 개박살이 났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음 벙쪄서 이게 뭐지? 진짠가? 하고 담배피면서 어떻게 해야되냐 후임들이랑 얘기하고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울리더니 전부 총 찾아가고 전투식량 보관하는 1종 창고와 탄약고에 간부들이 존나 뛰어다니고 난리가 났었음 멸공 피아식별띠도 나눠주고 날 세운 대검까지 그날 저녁에 준비 시키는데 진짜 무서웠음.... 중대장이 소대원들 모아놓고 나도 전쟁을 안해봐서 두렵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밖엔 우리 가족이 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다들 무섭겠지만 훈련한대로만 하자며 조금만 고생하자는 말에 진짜 뭉클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때 우리나라 현역분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다시 한번 군인분들께 존경을 표하게되네요 현역 장병분들은 대부분 20대 초 어린 청년들입니다 .. 전우가 전사해서 분노하더라도 실제 전쟁의 공포 앞에선 20살의 청년에겐 .. 인간이라면 ..너무나도 큰 공포입니다 .. 하지만 언제 두려웠냐는듯 맞서싸울겁니다 .. 적군 앞에선 한치의 두려운 모습도 보이지않을것이고 내 등 뒤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총성조차 안들릴수있도록 목숨 걸고 싸울것임을 다 알고있습니다 .. 두려워도 두렵지않아도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
이때 군생활중이였는데 이제막 상병달고.... 진지공사 나갔다가 갑자기 비상이 울렸고 뉴스를 보니 연평도가 폭격 당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섬에서 연기가 나는 뉴스를요 그러면서 전군 완전무장 되었고 군장적재까지 했었습니다 말그대로 출발 하면 바로갈수있게 준비를 한것이지요 이때 진짜 전쟁이 나는구나 했습니다. 새벽12시까지 대기하다가 생활관으로 다시 집결하라고 하더니 침낭만풀고 군복 입고 총기를 안고 취침 하라 했습니다. 그리곤 그뒤론 완전군장 풀고 한달동안 단독군장 생활 했습니다. 그때당시 김정은 욕 엄청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이땅을 지켜주시는 후배분들 감사합니다.
내가 저때... 고등학교 시절.. 진짜 세상이 무섭게만 느껴졌거든 그런데 연평도에 있는 해병대의 용감한 자주포 대원모습보고.. 이게 진짜 군인이군아 멋진모습에 해병대를 동경했다.. 그덕에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구했다 나도 군대들어가서 용기를 내고 저 형처럼 용기내서 싸워야지 심정으로 해병대에 입대하려했으나 좀처럼 쉬운일은 아니였기에 떨어져서 1년후 나는 평범한 땅개트리를 탔지.. 2014년 6월9일 논산훈련소 들어가 자대배치 받았더니 22사단이였다 하필 임병장 사건이 터진후였고.. 같은 훈련소 동기들과 거의 최전방에 배치받았고 음... 그곳에 생활 절반은 정상과 비정상이였다 22사단에서 살아서 전역하고자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빌었지 비정상이 많았기에 부당함이 컸어도 암묵적으로 불만을 참고 군대생활을 무사히 전역했지.. 나는 지금도 내마음속은 주적을 용서할 마음따위 버린지 고딩시절이였다
난 09 10월 군번인데 아직도 기억난다 막 물상병 달아서 기분좋았던 시절, 눈 치우러 나갔다가 급하게 다 복귀하라 해서 뉴스를 봤다. 그 다음은 내 예상과 달랐다. 장난기 많고 사건사고가 많던 우리 소대는, 풀 군장을 준비한 상태로 위장을 했다. 놀랍도록 단 한 마디 말 없이 침묵으로 준비했고 분노가 느껴졌다. 땅에 떨어진건 처음이였으니까. 그런 진지한 모습들은 처음 본 거라 낯설기도 했다 ㄹㅇ.. 분명 전시때는 다들 다를거라 생각한다. 모두 고생했다. 또한, 지금 나라 지키는 후배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2010년은 연평도 포격사건도 그렇고 천안함 침몰 사건도 그렇고.... 우리 국군 장병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군의 국지도발로 부터 이 국토를 지키다가 산화 하셨던 해네요...... 개인적으로 2002년 8월 29일 한창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을 때 또 다른 어느 곳은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였고 당시 우리 해군 장병분들과 간부 분들의 목숨 건 결사항전이 있었기에 북한군의 야욕을 꺾고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면서도 그 분들의 희생에 마음이 경건해지네요
대본쓰신분 미필이거나 군대를 글로만 배우셨나 전쟁나도 우려하던일 안생김; 본인 보직 장비는 허구한날 정비하고 저때 최전방 운전병으로 있었는데 일반병사들은 매일 철책 수비할때 실탄 수류탄받고 경계함. 무슨 총알받는다고 상관을 쏨ㅋㅋㅋㅋ 그리고 저때 전쟁이 실제로 난다면 다같이 싸우다 뒤지자 마인드였음
2015년 서부전선포격사건때는 정말 전쟁나는줄 알았습니다. 연평도에 이어서 두번째로 우리나라 영토에 포격한 일이고 그 달에 DMZ 목함지뢰로 육군 하사 두명이 중상이 있었던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반드시 그냥 안넘어갈줄 알았는데 계획된 포격으로 인해서 우리측 사상자가 단 한명도 없었고 뭐 흐지부지 또 협상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제2 연평 해전 일어났을때 GOP근무 중 이었습니다 월드컵때.. 전 소초 상황병 제외하고 전원 전 초소에 배치되고 암구호 숙지철저히 하고 수하 했을때 암구호 모르는 거수자는 그냥 쏘라고 해서 정말 긴장 하며 밤이 지나가길 바랬었죠.. 북에서는 대남방송으로 백배 천배 보복 하겠다고 그 특유의 말투로...밤에 들으니 으스스 했었는데..계속 듣다보니 오기가 생겨 내려오기만 해봐 바로 죽여 버릴 거다 라는 생각으로 버텼네요..그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군복무할 당시 진짜 전쟁준비 했죠.... 요즘 장병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실탄받고 대검 착검하고 a급 전투 물자 받으면서 최소한 괴뢰군 5명은 죽이고 죽자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비장한 마음이었습니다.... 항상 국가안위를 위해 고생하는 국군 장병들 화이팅입니다!!
당시 남양주서 근무, 우연하게 작전실 갔다가 티비에 포격뉴스 나오는데 실내에 있던 장교 및 병사들 5초간 정적 그리고 10초 후 전화 폭주, 전 병사 영내 대기 및 외출자 즉시 복귀, 탄약고에서 탄약 및 고폭탄 전부 분출하고 연대 차량 전체 연병장 올려서 도열하고 동원령 떨어지면 퇴계원에 예비군 받으러 전 수송병 차량에서 3일간 대기 했네요 한달간 전투복 입고 단독군장 상태 대기 진짜 전쟁나는줄 휴..
전입간지 한달도 안된 이등병이 대대 ATT 2일차 점심 먹고 행군 시작하자 마자 멈추라더니.. 연평도에 포격전이 일어났다면서 전쟁 난다며 ㅈ댔다를 반복하던 3소대장.. 자기 소대에 가서나 떠들지... 그러고 몇분뒤 육공에 타고 복귀할때 솔직히 진짜 쫄렸음... 짬도 안되는데 이 상황이 현실인가 했음. 복귀해서 유서 쓸때 진짜 전쟁나나 했다.
진짜로 전쟁 직전까지 갔었죠. 평택에 있는 주한미군 물자랑 장비들 파주로 전개되는 상황이었고 전방 부대들의 포병부대들은 모두 전진배치, 전진배치할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북한과 가까운 포병부대는 24시간 북한 조준해놓고 무한대기 상황이었습니다. 후방인 공군도 군장 착용하고 근무 섰을 정도니…
이스라엘 처럼 욕 뒤지게 먹었을듯. 중동전쟁때 군사적 도발을 군사적 침략으로 대응을 해서 골란고원 뺏었을때 국제사회가 시리아편 들어줌. 아무리 총쏴도 탱크 밀고 들어가는 것은 선 넘음. 3배 4배의 포격으로 대응을해도 경계선 침범은 에바임. 한국도 북진했으면 진짜 국제사회에서 제재 당했을듯.
천안함과 연평도 두 사건을 철원 어느 GP에서 겪은 사람입니다. 두 사건 모두 저에겐 죽음을 떠올리게 했었죠. 전쟁이 나면 북한 방사포만으로도 GP가 있는 전방에선 살아남기 힘들거라는게 병사들 사이의 정론(?)이었거든요ㅋㅋ 군에선 그런 얘기 일절 안했지만 워낙 긴장되는 사건들을 겪는 부대라 저희끼린 그런 얘길 자주 했습니다. 당시에 북진을 했다면 딴건 다 모르겠고 지금 침대에 누워서 이 영상을 보진 못했을것 같습니닺
당시 포항 훈련단에 있었는데 아마 공수 기초 훈련 중에 소식을 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격훈련이 앞당겨지고 연평도 지원자도 따로 뽑고 다음날엔 유서 낭독도 했네요 매우 무거운 분위기에 정말 전쟁이 시작되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한파도 일찍 와서 매우 춥고 어두운 겨울의 시작으로 기억이 남았네요
말년중사 때 포대장님 생일이라 행보관님과 케잌사러 잠깐 나왔는데 TV에서 연평도에 포탄 400여발 낙하 뉴스가 나오고 헐레벌떡 대대에 들어가보니 자주포 버슬렛 열고 포탄 적재하고 탄약 전투식량 불출하고 친구들 부모님 계속 휴대폰에 전화 오고 준비태세 걸렸던거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네 ㅋㅋㅋ
이 당시에 직업군인으로 충주 비행장에서 근무했었어요 . 24시간 비상대기에 모두 현장 근무실 대기. 밤 10시인가? 기지방송으로 총기불출하라고 하는데 진짜 군생활 5년하면서 저때 처음 경험해봄. 아 기지생활하는 공군인데 이밤중에 총기불출하고 단독군장차라고?… 아 전쟁나는구나, 여기서 탄약만 불출하면 진짜 터지는거구나 했었는데 .. 분위기는 곧 탄약 불출하라고 방송할거같았는데 다행이 그다음날까지 조용하더군요.. 라인안 활주로에선 F16들 4대씩 편대로 밤새뜨고내리고… 그때 전투기들 다뜨고나면 그 잠깐 조용한 밤하늘에 그렇게 밝고 고요한 보름달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저때 진짜 살벌했었어요.. 천안함, 김정일 죽은건 쨉도안됨. 이젠 20대의 청춘의 기억으로 남고 어느새 30중반으로 일상에서 정신없이 살고있네요 저당시에 저뿐만 아니라 현역으로 근무했던 분들 모두 너무 자랑스럽네요
전쟁이 터지는 것을 무서워 할게 아니라 전쟁이 터져도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해야죠, 저도 저 때 현역 장병이었는데 내심 두려워 하기도 했지만 지긋 지긋한 북한의 도발을 두번 다시는 안일어나게 해버리고 싶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국가 답지도 않은 괴뢰국의 도발에 산화 되신 군장병,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위로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이때 수방사에서 복무했습니다. 전방은 아니었지만.. 총기 항시 휴대, 대검 착검, 피아식별띠 항시 착용, 전투복과 전투화 항시 착용, 증가초소4개소 추가 운용, 근무 제외한 모든 시간 전투 모의훈련, 병사 휴가 전면 통제, 간부 교대로 주둔지 주둔.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네요. 아직까지 대선 후보 1순위는 국방과 안보관입니다.
그때 강원도 춘천에서 육군으로 군무했습니다. 연평도 포격하기 전날 당직근무를 서서 포격당일 취침중이였는데, 포격했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환복하고 지하벙커로 뛰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애국심이 투철하지도 않았고 친구랑 전쟁나면 도망간다고 농담하고 그랬었는데, 그때는 두려움보단 이상하게 전쟁나면 반드시 이기겠단 생각 뿐이었네요. 지금 근무하는 후배들도 동일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감사한 마음 가지고 두발 뻗고 잡니다.
군번 10-13277 당시 5사단 105미리 포병대대 관측장교였습니다. 당직근무 시간이 가까워 졌기에 슬슬 준비하려던 차에 실제 상황이라며 지휘통제실에서 방송이 나오고 급한대로 티비를 켜니 뉴스속보가 나오더군요. 바로 대응사격 출동하였고, 전 포반원들은 즉각대응사격 준비를 완료한 채 사격 명령만 기다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1월 말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에 약 3주간 퇴근 및 개인정비 없이 포상에서 덜덜 떨면서 너죽고 나죽자 하는 전쟁상황의 긴장감과 연속된 근무상황의 피로 누적과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 또한 두려웠으나 함께하는 전우들이 있었기에 포대원들 부모님께 연락하라고 핸드폰도 빌려주고 서로 힘내고 조금만 참자고 버텼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북진 했다면 결국엔 우리가 승리하였겠지만 저를 포함한 청춘을 바친 전우들과의 헤어짐의 슬픔 또한 짊어졌어야겠지요.
나도 연평도때 복무중이었음. 철원 육군 K-9 부대라서 진짜 까딱하면 포 쏴올리겠다는 분위기였음. k-9 하나에 포탄 51발 장약 풀로 채우고 k10에 100발 넘게 싣고 부대에 있는 포탄 장약 신관 뇌관 싸그리 모아서 트럭에 다 실었음. 근데 저때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던게 그전에 천안함 때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아마 부대원 대부분이 이제는 진짜 포탄 쏟아부어서 더 이상 도발하지 못하게 막아야한다라는 의견이 팽배했음. 그때 사수였는데 사격버튼을 누르지 못한게 천추의 한임.
저 육군 17사 100연대 3대대 출신입니다. 10년군번으로 이때 갓 일병땐데, 신병위로휴가도 연기되었습니다. 정보병이라, 지통실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해병2사전우들께서 상황발생시 대처하시는 모습에 감명 받았습니다. 전군 진돗개 하나로 정말 전쟁 직전 이었고, 해병2사와 연계하여 상황회의도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전쟁에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나라 지키는 후배님께 항상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
북진은 커녕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우리 어떻게 하냐고 물었던 게 우리나라 장군들인데요... 오죽하면 미군이 어이없어 했을까요? 10년도 1월군번으로 이때 호국이 준비하다 급하게 뛰어올라가 군장싸고 단독군장에 위장하고 YTN만 시청하고 있던 때가 생각납니다. 유서쓰고 그런거까진 안했지만 2011년이 되자 갑자기 태극기랑 사단기 뒤에 서서 사진 찍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그때 그 사진이 죽으면 보낼 사진이라고 하더군요. 하여튼 그때 이후로 군생활도 많이 바뀐게 사실입니다. 사실 북진은 이때보다 1994년 북핵위기때가 골든타임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나 중국도 그때당시의 미국을 막을 수는없었을 테니까요.
20100810군번임 당시 나는 k9포병이였고 자대받고 이등병 쯤에 첫 훈련이 호국훈련임 진짜 당시 자대가자마자 몇달뒤 조온나큰 훈련이였음 마지막날 훈련쯤이였나 훈련중에 사단장왔다고 잠시대기하라함 한3시간기다렸나 포대장이 실제상황이라 무전때림 바로 부대 복귀하자마자 탄 48발인가 다 실고 신관장입 다 해놓고 진짜 실제상황이라고 무전때리면 쏘라함 우리부대가 김포쪽이여서 강화도랑 바로 앞임 다행이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큰 훈련 마치고 또훈련하는느낌이였음 그뒤로 6개월마다 우리는 강화도로 컨테이너 생활하면서 자주포 몰고 파견나가고 없던 맨바닥에 포상 진지 다 마대에 흙퍼서 구축하고 맨날 샤워하다말고 자다말고 팬티만입고 비상떠서 헬멧쓰고 자주포로 뛰어나가고 정신차려보니까 전역날이다가옴 전역날까지 화스트페이스 걸림 군생활나름좀 힘들었나봄 10년이 지났는데도 가끔씩 군대꿈꾸는거 그래도 나름 포반장까지 상도 여러개받고 같이고생한 우리 부대원들하고 좋은추억이였음 생각해보면 남들하고 다른군생활한거같기도하고... 지금은 꿈같지만 벌써 35살임 우리국군 생각보다 쎄다고생각함 우리국군장병들응원합니당 ❤
그때 저도 철원에 있었습니다. 자대가 포병이라서 철책에 있지는 못했지만은요. 당시에 포병부대는 포대원들이 개인화기탄 지급받고 탄약차에 포탄 적재하고 비문 파기 준비도 했었죠. 그때 다들 했던 말이 어제 유서 작성 했는데 낙장불입이라 다시쓰기에는 뭣하지만은 만약 죽어서 환생하게 되면은 이미 통일이 되어서 편하게 살거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