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www.ytnscience.... 바람처럼 빠르고 강하다. 우리의 전통 활, 각궁.동이민족,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었을 정도로 오천 년 역사 속 활은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짧기에 더 탄력적이고 강한 우리의 활, 각궁.그 어느 나라의 활보다 강하고 우수했다. 활은 곧 생활이자 국운을 좌우했던 무기였으나 정신수양의 도구이기...
@@주지약 그것은 이기지 못할 센활을 사용하기 때문이고, 활이 세다보니 어깨를 넣어 팔뚝과 몸을 일자로 한 자세로 활을 쏘게 되어 충격을 많이 받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올바른 방법과 과정을 거쳐서 활쏘기를 해야 몸을 상하지 않고 아니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소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각궁은 워낙 우수하게 잘 만들어 놓은 활이라 보통 많이 사용하는 카본소재 개량궁보다 충력이 훨씬 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민족이 활을 좋아하게 된이유는 제가 볼때 다름 아닌 북방민족들과의 수많은 전투 때문인거 같습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한반도 위쪽으로는 전부 기병이 중심인 유목민들이 살고 있어고 그들과 전쟁을 하는데 칼처럼 짧고 접근전을 해야 되는 병과는 정말 최악의 상성이 였을 겁니다. 기동력이 빠르고 활을 주로 사용하는 유목민 군대를 상대하려다보니 당연히 좀처럼 만주쪽으로 진출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구요. 그러다 보니 군대를 출동시켜서 땅을 점령 하는 방식보다는 성을 쌓고 방어하면서 조금씩 전진하는 식으로 팽창 정책을 펼쳤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활+기병이 주력인 유목민 군대 상대로 방어를 하려면 짧은 단병접전 은 최악의 전략이자 전술이죠 그들 상대로는 활이 최고 였을 겁니다. 활은 병사가 죽지만 않는다면 계속 활을 쏘게 되어서 결국 나중에는 베테랑 병사로 갈수 있는 확률이 근접병사들 보다 높을수 밖에 없으니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 할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여기 다큐에서는 우리가 활을 선택할걸 단지 평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엉터리로 설명을 하네요
@@simdak9 1929년에 조선궁술연구회가 펴낸 [조선의 궁술]에는 “과거시험에서는 편전을 130보 거리에서 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정일 뿐 1,000보(약 1,200m) 이상을 능히 도달하며, 두껍고 무거운 갑옷도 관통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한 때 편전의 사거리가 1,000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왕 태종은 편전의 사거리가 200보(약 240m)라고 언급했고, 세종대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이천은 “편전은 아무리 약한 활을 쏘아도 300보(약 360m)나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1,000보라는 사거리는 일반적인 편전의 사거리라고 할 수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 “강가(대동강 남쪽)에서 왜군이 쓴 조총이 1,000여 보를 날아와 대동관에 이르렀다. 연광정 방패 뒤에서 군관 강사익으로 하여금 편전을 쏘았더니 화살이 강 건너 왜적이 있는 모래벌판 위까지 날아갔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류성룡의 목격담은 결국 편전도 1,000여보 가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여서 [조선의 궁술]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 대동관 정면 대동강의 실제 강폭은 500m 미만이어서 ‘1,000여보’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이고 실제 사거리는 500m 내외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실제 편전의 사거리는 일반적인 화살보다 길어 약 200~300m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예외적인 경우 약 500m까지 날아갔을 가능성은 있지만, 1,000보(1,200m)라는 이야기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무기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서구권 학자인 존 부츠는 1934년 그의 논문 [한국의 무기와 갑옷Korean Weapons and Armor]에서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일본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해 “1592년 히데요시의 침략(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궁 사거리 350야드인데 반해 편전의 사거리는 500야드(457.2m)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이 기록도 편전 사거리의 최대치가 대략 500m였음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비록 1000보는 되지 않는다고해도 사거리가 500m 정도면 전근대 활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한다. 사거리가 가장 긴 활로 알려진 튀르크 활(Turkish Bow)의 기록상 최대사거리는 800m가 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일반적인 튀르크 활의 사거리는 최대사거리는 300~500m 정도다. 영국 장궁(English Longbow)의 최대 사거리도 200 ~ 300m 수준이다.
(활) 활이 어떤 목표를 정확히 맞추는 저격용 무기로 역할을 했지만.........전쟁터에서 무기로서의 활의 무서움은............ 전쟁에서 활을 지금의 저격용총 처럼 사용하는줄 아는데.......집단으로 화망 구성해서 쏘는 무기임. 활의 정확도,명중률 따지는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 하나의 각궁.......저 활의 위력이 대단한데......... 그 먼 옛날부터 전쟁터에서....... 수백,수천의 각궁 활을 가지고........ 수백, 수천의 궁사들이 쏘아대던 하늘을 뒤덮은 ........그 화살들의 무리들은 얼마나 위력이 있었겠나 ......상상되네요. 한국과 일본은...... 사계절이 모두 있지만..... 그래서, 자라는 식물,나무, 숲도 전혀 다르다. 일본은 습도높고 습도많은 것을 좋아하는 강수량이 큰곳에서 잘자라는.....관엽성 큰나무(목재용)들이 잘자라고....... 한국은 건조하고 습도를 싫어하는 식물,나무,숲이 (소나무,진달래,철쭉....) 형성되는 비교적 일본보다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것이다. (습도,수분,물의양,강수량....차이) 때문 한국과 일본은..... 기후(습도)도 다르고 자라는 식물,나무들도 다른 .....전혀 다른 기후(습도)환경이라 보면된다. 일본은..... 높은 습도로 인해....... 음식이 쉽게상하기때문에...... 한국과 달리 음식문화까지도 달라지는것이다.(주로 날것,싱싱한것 선호, 발효음식 발전못함) 일본의 무기...... 활이....... 여러재료를 아교(본드)로 붙이는 ...... 복합궁(각궁),합성궁을 쓰지못하고...... 장궁(하나의 긴 나무활)을 쓰는 이유.... (섬나라 영국도 동일하게 장궁(긴활) 사용)... 높은 습도 때문이다. (영국의 안개와 잦은 비)
5:30 부산진 순절도 9:19 화학적인 분자 구조가 아니라, 세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이사이에 간격이 있고 탄성이 있다 11:08 영국 장궁 11:17 각궁 15:34 활 쏘는 4가지 순서 17:52 무촉전 (촉이 없는 비살사용 화살) 18:23 박두 18:26 적시 18:32 세전 23:55 편전ㅡ화살이 짧아 다른 도구도 쓴다 27:04 궁사의 패러독스 27:38 와류 30:49 고풍 32:58 호미각궁 37:59 동진동퇴ㅡ활터의 예절
@@stevenkimdmd 과녁간 거리를 줄이면 되는데 대한궁도협회의 145m 고집이 심해서 타협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국궁의 대중화를 가로막지요. 정작 조선 시대에는 무과 시험 같은 객관적 측정이 필요한 분야가 아닌 한 여건에 맞게 과녁 거리를 조정해서 활쏘기를 즐겼는데 어째 현대에 와서 주최측이 꼰대화 되어버려 별 의미도 없는 145m만 주구장창 고집을 부립니다. 활쏘기는 본시 30m 정도의 거리만 확보되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다른건 다 이해 하는데.. 평화적인 방법이라니.. 뭔 개소리이야.. 전문가란 양반이.. 평화적인 전쟁이 어딨어... 다 죽게 생긴 와중에 뭔 평화적인 이야.. 그냥 당시 상황상 지리상 수성전에 유리하고 주로 북방의 기마 민족과 왜구들을 상대 해야하다보니 전술과 무기가 활을 이용한 방어전으로 특화 된거겠지..
하나의 각궁.......저 활의 위력이 대단한데......... 그 먼 옛날부터 전쟁터에서....... 수백,수천의 각궁 활을 가지고........ 수백, 수천의 궁사들이 쏘아대던 하늘을 뒤덮은 ........그 화살들의 무리들은 얼마나 위력이 있었겠나 ......상상되네요.
국뽕영상이긴 한데 재미는 있네요. 우리나라가 외부로 침략을 안한건 우리나라 민족성향이 아니라 위쪽으론 대국이 버티고 있고 삼면이 바다라 어디갈곳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바이킹처럼 호전적이고 도전적이지도 않고 우물안 개구리 였죠. 능력만 됐으면 치고 올라갔을겁니다. 실제로도 그랬지 않나요? 작은 땅덩어리에 능력도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민족적 성향이 제일 큽니다. 우리가 치고 나가서 얻는것과 그로 인해 잃을것들을 비교했을때 잘되면 좋은거겠지만 잘안됐을 경우에는 현 중국의 그늘안에 있는게 더 안전하고 얻는게 많았죠.
활을 이상하게 해석하시네.멀리서 적을 쫓아버리고 평화적이라고?그럼 총이나 미사일은 더멀리 나가는데 더평화적이겠네?무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라 이해한다.활을 한번 맞아봐야 아 내가 생각을 아주 잘못했구나하지.활은 단순한 방어 무기가 아니라 원거리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살상할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활을썼고 더 발전된 석궁도 썼다.그 무시무시한 몽고군은 기마병 한명이 한번에 60발을 쏴댈 정도로 화살비로 적진을 고슴도치로 먼저 만드는것이 주요 전술중의 하나였다.
싸움이든 전쟁이든 나나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는게 승리의 기본요건인데 그럴려면 장거리 무기가 효율이 큰건 당연한 것이고 장거리 무기는 대부분 기술력이 좋아야 하는게 대부분이고 좋은 기술력이란건 국가의 주관하에 관리되는게 당연한 것이고 보통 그런 기술력이 좋은 국가는 무력보다는 문을 숭상해 나라의 치안이 잘 유지되 국가의 존속기간이 오래될 수록 기술력이 쌓이는 것이고 우리민족이 활을 잘 쏘는 건 유목민족을 상대해야 되는 입장도 있지만 제가 위에 말한 요소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궁 제대로 쏘려면 엄청나게 숙련되어야하는데...멀리가는 만큼 당기는 것도 힘이 들기 때문임. 양궁에 비해 조준도 감으로 해야하고 어느 정도 당기냐 따라서 거리도 달라지는데...한마디로 밥만 먹고 활쏘는걸로 사는 사람들은 금수저나 왕족들 호위하고 살았기때문에 무장이 가능했음.. 물소뿔 수입해서 활만드는거야 돈 많으면 해결되는거고 군서 키워서 고용하면 그만인거고 특히 고려후기 사병을 거느리는 세력이나 왕족에 속한 군인들은 썼을거 같고... 임진왜란 직전엔 징집시스템이 개판이라 털릴만...했으나 그나마 무관시험친 놈들은 어느 정도 싸움질을 했던 놈들이 통과해서 장교하는거다.
뭐어.. 각궁 다큐니 각궁의 장점만 나열하는건 이해합니다만, 현실적인 면에서 전투용, 즉 병사용으로 적합한가? 하기엔 상당히 문제점이 많은 활이죠. 일단 각궁 자체가 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습기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영상중에 영국의 롱보우와 비교했지만, 일본이나 영국처럼 습기가 상당한 환경에 노출되면 각궁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아교가 습기를 먹어버리기 때문이죠. 또한 각궁 자체가 날씨가 추운 계절에는 제작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주재료인 물소뿔이 년간 100체 이상 수입이 안됬기 때문에 이래나 저래나 범용성이나 제작편의성면에서 군대에 보급하기위한 병기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하죠. 실제로 유럽역사에서보면 영국의 롱보우와 기계궁과의 전투에서 습기때문에 기계궁의 신뢰성이 떨어져 패배한 경우도 있었죠. 영상 처음에 한국이 방어일변도였기 때문에 활을 썻다고 하는데, 사실 이런저런면에서 각궁이 대규모 전투에 주력병기로 사용되었다? 하기에는 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각궁이라는게 그냥 막 쏠수 있을정도로 쉬운 활도 아니고, 사용중 관리 뿐 아니라 보관도 매우 신경써야 했기 때문이죠. 참고로 고려시대 위화도 회군당시 핑계로 비가 너무 많이 온다는게 지적된게 이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뭐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서도 각궁외에 목궁도 사용됬다고 짐작할 수는 있는데, 실제로 출토된 목궁은 조선시대에 자료나 기록이 매우 적습니다. 실제 목궁 사용량이 적었다면 조선시대당시 병력운용이 궁병위주가 아니라 창병위주겠죠. 하지만 대규모 궁병이 운용되었다면 각궁만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아교 ≠ 어교 가 아니라 아교 ⊃ 어교인데 왜 이런식으로 주장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되네.. 민어부레어교가 날고겨도 아교 자체의 가장 큰 특징이 습기에 약하다 라는 건데? 영상 어느부분을 봐도 "아교는 습기에 약해~" 부분을 반박시켜주지 않는데? 도대체 왜 우기는건지 이해가 안되네.. 한국의 자부심을 무시하는 발언이라 화가 났나, 아니면 멍첟한 소리했다는 걸 들키기 싫은건가?
그래도 이해가 안갈까봐 덧붙여 설명해주는데, 영상에서 "일반적인 아교로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아교가 노멀한 한가지 종류만 있는게 아니라, (상략) 우리 나라에 전래된 아교제조법은 오교법(螯膠法)·녹각교법(鹿角膠法)·우피교법(牛皮膠法) 등이 있다. 오교법은 가재로 만드는 것으로... 녹각교법은 사슴뿔을 구해서... 쇠가죽으로 만드는 우피교법은.. (하략) 출처 : 한국과학기술사 그러니까 아교라는건 그냥 뭐 단순히 한개만 있는게 아니라 유기물(주로 동물의)을 물에 불렸다가 말렸을때 젤라틴질에 의해 접착력이 생기는 접착제를 부르는 이름임... 일반적인 아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니까 뭐 민어부레어교는 만능인줄 아나보네.
칼을 좋아하기보다는 적을 쫓아내는 활을 좋아했다는것과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이라 활을 사용했다는 정말 짧은 시각에서 바라볼때 나오는 의견입니다. 유목민족과 연관되어 있는 많은 민족들은 활쏘는것을 중요시 여겼지만, 이는 수렵으로 생활하던 문화가 그대로 내려온것이고 활을쏘는 궁사들이 칼과 활 두분야에 정통했다는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말입니다. 몽고나 일본의 활도 국궁에 미치지 못한다는건 정말 말도안되는 헛소리구요. 여러가지 재료로 만든 복합궁은 날씨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데, 역으로 롱보우나 유미는 굳은 날씨에도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몽고의 옛활 기술이 실전되어서 좋은 품질의 활을 생산하지 못하는것 뿐이지 그들도 각궁을 사용했고 몽고 전투사를 본다면 그들의 활과 기술이 얼마나 수준높은지 알수있을겁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살인의 목적이 아닌 심신수양이라고 자꾸 포장하는데 무인들을 무시하고 문인들을 추켜세워 반도 밖으로 진출하고 싶어도 나가지 못나간건데 이리 포장을 하는걸 보면 이게 과연 다큐멘터리인지 소설을 쓰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활의 성능보다는 쏘는이가 얼마나 숙련되어있는지를 중요시 여기는데 대체 무슨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만들었는지.
심신수양이라고 한 이유는 문을 중시하는 조선문인들이 그렇게 말해서입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조선은 임왜 전에 100년 간 큰 전쟁이 없었어요. 그리고 군사무기자랑 전투력 자랑하는 데 대고 외국무기 가져다 대서 뭐합니까 잘하는 놈은 잘했겠죠. 왜 남보다 못한 게 진실이라는 식으로 우기는 건지요. 한국인들은 활을 잘 쏘고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큐에서 정확도면에서 단궁의 장점을 말했고 그런 장점을 가진 각궁이 최고라고 생각했다는 그 어디가 문제인가요? 칼을 못 쓴다는 것도 무슨 소리인지요. 무기 없이 유지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미사일 있으니까 총은 못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유감은 없습니다만 자꾸 조선의 군에 대해 너무 얕잡아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음 물론 그렇게도 볼수있지만 저는 고려시대 여진정벌중 가장대표적인 윤관의 여진정벌같은경우에도 보통 중국이나 일본이 주변국가와 전쟁을 했을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윤관의 여진정벌의 주목적은 황제국이라는 명목을 유지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강성해지는 여진에 '위협'을 느끼고 고려정규군과 일반성인남성까지 모두 모아 17만 즉, 온 국력을 쏟아부은 단순히 정벌하느냐 마느냐가 아닌 국가 존망이 달린 출병이었고 조선시대 세종의 4군6진 개척과 대마도정벌 같은 경우도 4 군6진을 개척하기위해 그 지역을 공격하기 전에도 사신을통해 명나라에 출병허가를 받고 출병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자주적이라 볼 수 있는 대마도 정벌도 초반에만 해안가에 포격하다 왜구들이 산으로 숨어버리자 얼마간 포위하다가 전투라기보단 항복을 받아낸게 전부입니다. 결과적으로 중원국가들과 일본의 대외원정은 대부분 단순히 개인(국가)의 욕망 혹은 욕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나라의 대외원정에는 욕망이 그 원정의 주된 배경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
안녕하세요 어교는 유기접착제와 다르게 열을 가하면 부드러워지고 차가워지면 단단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본드와다르게 붙이는 두물체가 밀착하면 할수록 본드의 역할이 좋아져서 잘붙지만 어교는 너무밀착해도 안되고 너무 멀어져 있어도 활고유의 탄성을 낼 수 없다고 합니다. 활모양을 보면 원형형태의 활을 반대로 잡아당기면 ㄷ모양의 형태가 됩니다. 세상의 어떤활도 그런모양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최대의 탄성을 만들어 내죠. 한국활이 아무리 좋아도 비가오는 날이나, 추운겨울에는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단점이 많은 활이죠. 다양한 활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스포츠로 전해내려오다보니 많이 사용하게 되고 명맥이 유지되고 있죠. 한편으로는 좋은점이 있으니 너무 타박하지는 않아도 될듯합니다. 직접 접해보면 너무나 재미있어요. 가까운 활터를 검색하시어 집접배우고 익히다보면 우라활의 장단점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겁니다.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ㅎㅎㅎ
광대싸리: 싸리는 아닌데 싸리 흉내를 내는 식물이라 하여 붙은 이름임. 무늬만 싸리나무고 실제로는 10m에 달하는 크기 명적鳴鏑 : 속이 빈 나무, 사슴 뿔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으며 옆에 몇 개의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을 화살에 끼워서 쏘면 구멍을 통하는 바람 소리가 마치 피리와 같은 작용을 하여 요란한 소리를 내고 적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명적을 끼운 화살을 적시(鏑矢)라 한다. 효시라고도 불렸으며 우리말로 "울고도리" 라고도 불렸다. 효시嚆矢 우는살
@Michael Ahn 옳은말이니 귀가 아프네요...^^; 이제 자기 힘으로 독립할수있게... 근데, 한 일본인 작가는 한국의 역사를 보고 `항상 외국의 침략을 당했는데도 정체성을 지켜온 끈질기는 혼은 평가할수밖에 없다.`라는 평가도 있죠. 그 밖에도 '몽골의 일본침략의 바로1년 전까지 고려는 몽골과 여섯 차례의 큰 싸움,42년 동안이나 전쟁을 하고 있었다. 고려가 몽골을 저렇게 끈길지게 막지 못했었더라면 과연 카미카제는 불었을까...' 라는 사람도 있고....
활의 유래 설명이 참으로 한심하다. 우리민족은 대홍안령산맥 동쪽으로 이주하여 현지인과 융화함으로서 성립하였다. 현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의 산악삼림지역이다. 하여 우리민족은 기본적으로 산악삼림민족이다. 이 지역은 주로 수렵과 채집을 위주로 하였고 주요 도구로는 활, 칼이 사용되었다. 이 지역에서 활의 사용은 후기신석기시대 돌 화살촉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즉 우리민족은 후기 신석기 때부터 수렵을 위하여 활을 사용해온 전통을 가졌다. 그러므로 활을 사용한 역사가 적어도 우리민족 성립초기인 BC.4000년경 환웅천왕 때부터라 해도 무방하다. 그건 후기신석기 때이니까 말이다. 그후 치우천왕은 BC.2700년경 초기청동기시대 5병을 만들면서 활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살촉도 이젠 청동기로 만들어 사용한 것 같다. 이러한 활에 대한 전통이 고조선 고구려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 아닌가 한다. 그러면 우리민족의 활을 이용한 역사는 6000년도 더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활을 사용하면서 활을 발전시켜 온 결과라면 전통시대 최고의 활은 각궁이 되는 것이다. 또 화살은 애기살을 이용하는 것이다. 13C에 고구려의 후예 칭기즈칸은 이런 우리민족의 활을 이어가지고 활로써 세계를 정복하였다.
침략해오는 적들에 맞서서 싸우는 민족이었지 외부로 나가서 공격하는 쪽이 아니었다? ㅋㅋㅋㅋㅋ 그래서 뭐 평화를 중시했다 그런뜻으로 한말인가? 팩트는 힘이 없었으니까 침략을 못했던거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밑에서 형님형님 하면서 호가호위 했던걸 이런식으로 포장하려 하니까 국뽕이니 뭐니하는 소릴 듣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