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무술 배워도 참았을때 자괴감 생기더라고요 사람따라 다른가봐요 오히려전 무술보단 헬스하고 근육생기고 나서 저한테 도발하는 사람들이 전 아무것도 안했는데 쪼는거보고 참아도 자괴감 안들었어요 핵심은 내면을 닦으면 되는사람과 외면을 진짜로 닦아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저는 내면만 닦다가 조현병 분노장애 우울증 쓰리콤보로 10년이상 앓아왔어요 성인인 지금은 헬스로 몸이 단단해지고 튼튼해지면서 건강해졌지만요 외면이 필요한 사람한테 내면을 닦으라는 말같이 독이되는 말이 없는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말고 현실에서 조언해주는 사람들이요. 전 저한테 독이 되는지도 모르고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였네요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달랐고 전 외향적인 사람이라 내향적인 사람들이 해주는 조언은 다 독인걸 저 병들 다 겪고 치유된뒤에 알았네요
@@user-sd8ni4sd1n 무술 배우는게 뭔 도 닦는게 아니라 상대를 개패듯 팰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서 상대가 뭘하든 제압할수 있다는 여유가 생김과 동시에 내가 한번 참아준다는 자신감도 생길수 있어서 무술이 자괴감 줄여준다는거 아님? ㅋㅋ 님 헬스가 이런 작용을 한거 같은데
영상에서 설명을 잘 해줬네요. 무술은 그 나라의 역사, 사회와 관련이 크죠. 일본은 평시에도 수시로 싸우니까 발도술과 빠른 급습 같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전시에 적군과 1:1 또는 1:다수와 싸우는 것을 가정하고 무술이 발전했죠. 뭐가 좋니 나쁘니 하는 초딩적 싸움은 그만.
전시에 1:1 또는 다수와 싸우는 것을 가정하고 발달한 게 아니라... 그냥 좋게 포장해준거죠.. 당장 영상에서도 일본이 실전성이 있고 우리나라는 퍼포먼스격의 성격이 있다라고 돌려말했잖아요. 물론 당시 조선검술이 실전성이 완전 제로라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실정성이 떨어지니까 전쟁에서 사용되는 검술을 비교할때에는 당연히 뭐가 좋니 나쁘니 이야기할때는 비교할 수 밖에 없죠.
@@user-cz1qx8bb4f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고려해보셔야야 해요. 일본은 전국 시대와 여러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며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했어요. 그러다보니 더 힘을 얻은것이 지방의 영주와 사무라이들인데 그러다보니 소규모 교전이나 급습과 같은 위기 상황을 대비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검술이 발달했됴. 비슷한 맥락으로 일본은 아무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창을 중용되면서 창이 발달했고요. 하지만 조선은 고려말의 혼란기와 왕자난 시절 이후 150년동안 평화가 이어지며 내부적으로 매우 평화로운 상태가 발생했고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어요. 그러다보니 지방의 군소 무사나 영주 세력이 없었고 자연히 섬같은 근접 무기는 발달이 미흡하고 대신 중국이나 만주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 원거리 화기나 궁술이 발달하게 됩니다. 단순히 일본은 발달했는데 우리는 별로였네 생각하지 마시고 왜 그렇게 되었고 대신 우리는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user-wu2lr8ic4l 그러니까 검술 비교하면 일본이 더 발달했다고요. 일본이 조선보다 발전한 이유 모르는 사람 있음? 역사 다큐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긴데 굳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음. 어쨌든 당시 왜적과 조선의 검술비교하면 일본검술이 실전성이 좋다라고 이야기하는건데 뭔 이상한 소리들이 많아요...
창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병력의 주력병기였고 1. 평지가 아닐경우 2. 정면에서 맞붙지않을 경우 3. 방진이 갖춰지기전 난전이 일어날 경우 3가지 경우에 창병의 전력이 감소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 대부분 부무장을 착용했다. 반대로 말하면 평지에서 정면으로 전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인지 가능한 상태에서 싸우는 경우 창병의 적수는 없었다. 즉 모든 무기는 상황에 따라 그 유용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평원에서의 전투는 창 , 철제 갑옷이 발달한 유럽지역에서는 도끼나 메이스와 같은 중량무기, 삼면이 바다였으며 지형이 험준한 지역인 한반도에서 조선이 궁병을 가장 중요시하며 조직했던 이유도 다 무기들의 각기 다른 장점을 극대화한 결과이다. 댓글 중 로마의 글라디우스에 관한 글을 보았는데 글라디우스를 이용한 검병이 로마의 제식병과 중 하나였던 것은 맞으나 이는 방패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짧은 검 형태 였던 이유는 철제무기에서 벗어나 강철무기를 제작하던 초반 단계였기 때문에 길고 고르게 펴낼 기술이 없었다고 하며, 전투시에는 투창과 창을 적극적으로 먼저 사용하여 이득을 취하고 갑작스럽게 돌진하여 거리를 좁히고 방진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싸웠다고 한다.
저분이 검도를 하는 사람이고 검도 자체가 일제시대 잔제 전유물이라 일본 편향적인 생각을 하시는듯...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여려 역사적 기록을 찾아봐도 한국의 것이 더 훌륭하고 좋음. 일본은 그냥 형식화된 검술이 아니라 그냥 칼들고 패싸움 하는게 다고 현대에 와서 서양이나 여러나라들과 틍히 한국 검술 갖다가 베끼고 섞어서 뒤늦데 형식화 한거임. 맞다 틀리다 나누지 말라는데 한국게 무조건 더 좋은거고 그게 맞는거임.
사실 일본도 활, 창 우선인데 전국 시대가 종식되고 에도 막부의 반란 방지 규제로 사무라이들이 평소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게 짜리몽땅한 도검 밖에 없으니까 이걸 쓰는 호신술이 발달한게 일본의 검술이지요. 옆에 활 있고 창 있으면 미쳤다고 검 먼저 뽑을 일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seunghoonyoo7803 그쪽의 주장: "고대 조상국가중 백제의 검을 빼고는 활이 우리 주력입니다." 제가 위에 띄운 근거 자료에 따르면, 이말은 틀렸습니다. 고대부터 고려 까지 한국인들은 근접무기를 활만큼 많이 사용했고 잘 사용 했다가, 조선의 국방 정책에서 검술 시험을 배제 시키고 해서 활이 주요 무기가 됬습니다. 백제의 검술과 칼 제조법이 일본으로 건너간건 사실입니다. 역사에 보면 고대 부터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그리고 고려 초기까지 보면 당시 일본은 사무라이가 있었어도 신라해적, 후백제 해적 그리고 여진 해적 한테 당했는데. 신라의 해적과 일본군의 싸움만 봐도 당시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 사무라이들 보다 근접과 활로 더 잘 싸웠다는걸 알수 있어요. 당시 일본이 이긴 전투는 소수인데, 일본군은 가장 잘 싸웠을떄가 성벽 위에서 석궁으로 싸우는거였고 오히려 신라 해적들이 근접전으로 싸우려고 했었는데. 어느 시점 부터는 일본검술이 한국의 검술을 따라잡고 추월한건 맞으나 그건 아마 고려 시대 도중쯤이였고 그전으로는 사무라이의 검술도 한국 검술에게 되지 않았죠.
@@seunghoonyoo7803 그리고 고대시대에 보면 광개토 대왕의 군대나 신라군 같은 삼국시대의 전술을 보면 근접무기는 중요한 혁할을 했고 근접무기를 한반도 사람들이 중국 또는 일본 보다 더 잘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당시에 최강의 군대는 당나라였는데, 신라인들이 메소성 전투에서 장창과 도끼 그리고 검으로 당나라 기마병을 제압했었죠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1ei7Psg1i98.html
어느정도 대식은 것은 맞지만. 국가 시스템상 밖에 없는 시스템 이었습니다. 정도전이라는 병신이 공상세 도입으로 상업의 세금이 제일 적은게 60% 이상 때림으로 사실상 상업을 금지 시킴과 동시에 무역은 개인은 금지 시킴과 동시에 국가가 중국과 조공이라는 형태로만 가능 했습니다. 즉 물건을 만들어도 농사를 남게 지어도 팔곳이 없으니 만들거나 더 많이 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쓸만큼만 햇습니다. 당연히 교류가 없으니 도로도 필요 없었고..상업이 없으니 부가가치의 발생도 없고 그로인해 국가의 세금의 수익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하니 직업적인 군인 1명 기를수도 없었습니다. 결국엔 외세로 부터 군인이 없으니 국민은 도륙이 났고 상업을 금지하니 공업도 없어 삼국시대에도 만들줄 알았던 바늘 벽돌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길이 없으니 수레도 필요없고 상업이 없으니 토지가의 상승도 없어 고려에도 즐비 했던 다층 건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해상무역을 개발한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상하수도는 그 개념 조차 몰랐고(개화이후에 앎) 조선 초기의 장영실의 업적은(장영실 아버지가 원나라 상인 입니다)고려시대의 무역에 의한 산업 발달을 겨우 이어 받은 겁니다. 조선 관리라고 해바야 할일은 농사 지은것 올려 보내는것과 마을의 송사 말고는 할일도 없었고 사대부라고 해바야 국가의 미래의 개념을 가질수 없는 시스템이라 공자왈 맹자왈 읍는것 말고는 할일도 없었죠. 시스템이 안되는데 관리와 사대부를 욕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jaeokpark9696 왕권과 공상세 도입과는 뭔 상관? 상업의 금지와 무역의 국가 독과점은 그 잘난 왕의 정통성을 유지하는것인데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설명하기위해 만든 말 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인간이 정착생활 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자본주의라고 할수 있는 경제 방식이 시작 입니다.
관리와 사대부가 무능했으면 조선이 5백년이나 갈수없었죠. 세계 어느나라 어느시대나 탐관오리는 존재했으나 조선시대때 사대부 양반들은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고 심지어 왕에게조차 불합리한것에는 목숨을 건 상소러시로 잘못을 지적한 유생들이 많았을만큼 건강한 정치관을 가진 분들이셨습니다. 세종대왕께서도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가 백성을 가르쳐 교화시킬수있다는 유학의 사상에서 비롯된것이니 우리가 쓰는 한글이야말로 유교의 산물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오늘날의 정치가들보다 훨씬 열려있었고 책임감도 훨씬 강했습니다.
저랑 구력이 거의 비슷하시네요 일본과 한국의 가장큰 차이는 실전성입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과 암살 경호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검술 한국은 근대에 창작하여 만든 검술이란 거죠 근대에 만들어졌다고 실전성이 아예없다는 아닙니다 창작하신분들중에 일본검도를 전문적으로 하셨던분들도 많이 계셨으니깐요 다만 실전적인 부분은 일본것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댁을 칼타고 달릴때 칼빼드나? 우선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우리 군사무술의 대강을 알려주지! 아주 간명해! 말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힘은 말탈정도의 힘만 있으면 되고, 기술은 말 위에서 활을 당길 기술 정도면 돼! 창은 기창騎槍이 있지만 웃기게도 말위에서 당위의 적을 찌르려면 일반 창보다 길어야 하는데도 창이 더 짧아! 오히려 임란이후 원앙진에 사용되는 낭선창이나 장창이 더 길 지경이지! 칼? 말타는데 방해가 안되도록 칼날 길이가 한자 여덟치를 넘는게 드물지! 당시 일본에는 말탄 사무라이를 베겟다고 칼날길이만 6자가 넘는 참마도가 있었는데! 게다가 말타는게 걸리적 거린다고 허리띠에 칼의 띠돈을 묶어서 사용하는 지라 칼날이 앞쪽에 칼자루가 뒷쪽에 위치해! 이건 뭐....... 즉, 조선은 칼쓸 대비가 거의 안되엇다는 사실. 화살로 못잡으면 칼로도 못잡는다는 그야말로 1스텟 몰빵이라고! 물론 일본은 창을 든 병사(아시가루)가 전쟁의 정역이긴 하지만 지휘관인 사무라이들도 맹색이 쌈꾼들인데 전공을 세워야 밥값을 하니까 거의 전쟁터 한가운데서 결투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지! 때문에 말 탄 무사였던 사무라이가 말에서 내려 서로 통성명하고 드잡이질 하려면 무엇보다도 칼집에서 칼을 뽑는 발도가 곳 가장 유효한 일격이 되는게 중요해! 왜? 결투나 다름없다고 햇지 결투가 아니거든! 전장에 선 순간이 바로 이것저것 볼것 없는 순간이지! 비겁하다 하려해도 이미 베여서 죽고 목까지 따였는데 알게뭐야!
@@user-ov5zm5rz3v 저기 뭐 애니검술 말함? 그리고 전국시대때 무슨 말에서 내려서 서로 통성명 하고 내려서 싸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상 상태에서 싸우는 법을 장수가 모르는게 말이나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시에 호퇴치 쓰던 가토 기요마사같은 장수도 있는데 발도 ㅇㅈ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발도술이 생기고 발전한 때는 윗분처럼 에도때 거리에서 싸우는 일도 많고 칼 뽑은채로 어슬렁댈 수 없으니 당연지사 빨리 칼을 뽑아 싸우는, 서부시대로 따지면 건맨들 싸우는 거랑 똑같은 건데, 전장터에선 당연 무기 안 뽑고 서 있으면 뒤지는 거지, 적장 온다고 가만 있음? 총쏘고 들고 있는 창으로 찌르고 하지.
@@user-ov5zm5rz3v 그리고 척준경, 유금필 같은 장수들이랑 이의민, 정중부, 같은 무신들만 알아도 니가 얼마나 개소리 하는지는 아주 잘 알거고. 이성계만 해도 원나라측 맹장 나하추랑 직접 붙을 정도로 무예가 출중했는데 뭔 칼 쓸 대비가 안되어있어 ㅋㅋㅋㅋㅋ 일뽕도 어중간하게 빨아서 개소리만 나발나발 떠드네 ㅋㅋㅋㅋㅋ 그리고 정신 차려, 검술을 게을리 했다면 애초에 항왜들 가지고 검술개량하는데 왜 써먹었겠니.
본국검은 개화기를 거치면서 군제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라져 무예도보통지의 내용만 남았을 뿐이고 현대에 나오는 본국검은 전부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복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중간에 끊어진 만큼 옛 모습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고 심지어 대한검도회 같이 힘없이 휙휙거리기만 하는 황당한 모습도 나오기에 이런 현대에 복원된 모습만 보고 본국검을 실전성 없는 정신수양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쌍방간 대결이면 당연히 상대방도 적극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해오기에 베기에 하던 동작을 할 기회를 얻는게 무척 힘들어 자신도 상대방의 검을 막거나 쳐내야 하지요.
@츄르츄릅 차이가 없을수밖에 없죠. 애초에 일본 검술을 우리것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해동검도(영상에선 태동검도라고 오타냈습니다.) 자체가 나카무라류를 계승한건데 이 검법의 창시자는 중일전쟁 때 포로들 베어가면서 정립한겁니다. 존심도 없는 ㅂㅅ들이 그것도 골수 제국주의자가 전쟁범죄를 통해서 만든 검법을 지들 것이라고 우기는 꼴을 보니 혐한들이 우리를 무시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검술의 필요성과 발달 배경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듯 합니다. 전략과 전술은 상대의 특성에 따라 변화 합니다. 저 검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의 주적이 북방 유목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돌면서 베기 등은 달려오는 기마병을 피하면서 공격을 가하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따라서 어느 검술이 더 훌륭하냐고 비교하기 위해선 검술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아야 하며 소수 전투인지 대규모 전투인지, 양성 과정에서 투입되는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전쟁에서 누가 칼을 쓰냐 창을 쓰지 사무라이는 전쟁에서 궁기병이랑 창기병이 결합된 형태야. 칼은 최후의 무기야. 상식적으로 당연히 사무라이는 전쟁터에서는 기마병인데 칼을 사용할거라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거 아니야? 사무라이는 5개를 할 줄 알고 연마해. 1. 검술 2. 궁술 3. 창술 4. 기마술 5.유학 고려부터 조선초기의 중요 병종은 기마궁병이야 그러니까 조선은 칼 꺼낼일 있으면 이미 전쟁은 ㅈ된거야. 주요무기가 활이니까 활에 걸릴적 거리지 않게 칼 크기는 작아진거고 진짜 ㅈ된 상황에서만 사용하게 발전한거지. 대부분의 문명국들은 철갑으로 병사를 둘둘 감싸기 때문에 칼로는 이빨도 안들어가. 일본 검술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종류로 나눠야해ㅡ 1. 전국시대 2. 에도시대 전국시대에는 진짜 전쟁을 끝도 없이해서 실전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도시대부터는 도장검술로 전락해 그래서 화려하고 괴상한 기술들이 남은 현재의 영상매체에서 볼 수있는 검술이 탄생한거야.
우리나라 검술이 중,일에 비해 발전하지 못한 이유 1. 인접한 국가가 당시 초강대국이던 중국 / 점령 및 유지는 어렵고 침략은 잦던 유목민족 창검을 들고 회전으로 맞서 싸우기보단 성벽을 이용한 수비전이 적합함 2. 조선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진 통일왕조국가라는 이유로도 지속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던 일본보다 상황이 나은데 그것마저 조선의 사병철폐 이후 도검을 패용 및 수련하는 것 만으로도 역적모의로 몰리기 딱 좋아지며 맥이 끊김 (중기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칼을 패용하고 다닌 것 만으로도 따로 기록될 수준의 특징일만큼) 영상에 나온 돌면서 베기는 뭐 전통이나 역사가 아니라 한국 검술이 나아가는 방향 중 하나로 보면 될듯 애초에 띠돈차고 칼자루 뒤로 돌린 채 패용하던게 우리나라라 칼로 유목민을 상대한다는건 화살 다 쓰고 창대 부러진 뒤에야 일어날 일이라 돌면서 베기에 유목민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음
@@ashton1810 아 예 앞으로는 검도가 아닌 도도라고 해야겠네요 오용되지도 않은 단어를 꼬투리잡아 잘못된 이유를 어거지로 붙이지 마시고 인정할 건 좀 인정합시다 검술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우리나라가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국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무지를 덮으려는 억지는 추하네요
@@yong-gilchoi8614 지금 나도는 본국검은 무예도보통지의 내용과 그림을 참고해 상상해서 만들어낸 복원물입니다. 심지어 찌르기 전에 좌우전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 쓸데없이 8자 돌리기를 하질 않나 무예도보통지 그림에는 분명히 아래로 찍어 내리며 찌르는 동작인 표두압정세를 검도의 목 찌름 동작으로 만들어놓지 않나 아주 가관 그자체에 동작 하나하나 힘없이 경직된 자세로 하는 등 공방원리가 제대로 설명도 안될 정도입니다. 이건 뭐 차라리 무당들 검무가 더 실전적으로 보일 정도이지요.
일본의 검술이 최고라는 것은 조선과 명나라 모두 인정한 점이지. 다 필요 없고 임진왜란 당시 명과 조선의 기록만 보아도 답이 나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목검을 든 일본의 병사 포로 하나가 진짜 창을든 조선 병사 10명을 가볍게 쓰러뜨린다고 했음. 미야모토 무사시가 오륜서에 적기를, 검을 들고 창과 대등히 맞서려면 상대보다 기량이 3배는 되어야 한다고 한걸 봤을 때, 진검도 아닌 목검으로 창든 조선 병사 10명을 쓰러뜨린건 기량이 최소 30배 이상이 차이가 남을 말한다. 이게 절대 과장이 된 수치가 아닌 것이,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10만의 병력으로 와키자카의 정예군 3천명에 박살이났고 전멸을 했을 정도였다. 30배가 넘는 병력차의 승리였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든 지상 전투는 모두 지형지물의 이점을 가진체 화약 무기를 가지고 벌인 수성전, 수비전그것도 아니면 치고빠지기의 기습 게릴라전 뿐이었고, 야전에서 대등하게 붙은 전투에서 승리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런 지경이 되면 그건 더 이상 전쟁도 전투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살육극이나 학살극이었을 뿐. 명나라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일본이 왜성에 틀어박혀 수성을 하자 조명 연합군은 수배에 달하는 대군을 가지고도 쥐를 잡아 먹을 정도로 굶주리고 사기가 바닥을 치던 일본을 상대로 단 하나의 왜성도 함락시키지 못했음. 오히려 역공을 당해 큰 피해를 보면 봤지. 오죽했으면 일본을 오랑캐라며 멸시하던 명나라와 조선마저 일본의 병장기와 무예가 자신들의 것 보다 뛰어남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창칼을 일본무기로 바꾸고 일본의 창칼을 생산하고 일본의 검술 창술을 훈련하는 도감까지 별도로 설치하고 훈련서까지 편찬했음. 이순신 장군 역시 어쩔 수 없었던 명량, 죽을자리를 찾아갔던 노량을 제외하면 절대로 일본과 근접전을 펼치려 하지 않았음. 심지어는 화포 포격으로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는 전투에서 조차 일본이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철수 했을 정도였음.
왜란당시 일본검의 효과적인 방식에 명과 조선이 영향을 받았지만 백병전에 주로 사용했던건 주력이 칼이아니고 창 이었을 확율이높고 조직적인 보병전술대형 속 조총 창 칼 식의 복합적인 방식이었을겁니다. 창이 망가지면 그다음 칼식으로 ... 풍신수길 사망후 와키자카도 일본으로 돌아가 권력싸움 의 내분에 휘말려 포위됬을때 창대형전술로 포위망을 뚫고나왔을정도로 일본내 임진왜란 전후 일어난 전쟁에서는 주로 창이 주력무기였죠
국가적 차이가 꽤 큽니다. 일본은 암습상태를 대비해야해서 앉은 상태나 납도 상태에서 바로 벨 수 있는 발도술이나 납도술이 발달하고 한국은 국경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주가 되기 때문에 발도술은 크게 발달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칼의 형태와 퀄리티, 무장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점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의 연출과 달리 일본의 매체에서 다도(검)류가 발달한 이유도 과거 일본의 칼의 퀄리티가 몇몇 유명한 도장의 칼이 아닌이상 매우 떨어졌기 때문에 전쟁을 나가거나 할 때는 칼을 3개~9개까지도 들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거나 휘었을 때 바로 다른 칼로 교체해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발달한 것으로 한국도 엄청난 차이는 없었겠지만 계속 전란의 시대를 이어왔던 일본에서 특히 그런것들이 발달했기 때문에 일도양단의 검술이나, 발도술이나, 납도술도 필요에 의해 발달했습니다.
@@user-dd4oy7zi7b 적어도 영상을 제대로 본 후에 입을 털도록 합시다 ^^ 이미 그 이전에 몇 번의 베기로 인해서 충격이 어느정도 가해져있던 상태였고 애초부터 저 원통 기둥의 디테일만 봐도 대충 만든티가 팍팍나는 박스재질의 원통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고정이 되어있지 않아서 베기전에 손으로 꾹꾹 누르며 고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이미 흔들거리는것도 분명하게 나오구요. 무슨 베기의 정확도의 기준을 만화나 애니에서 나오는 검사들 수준으로 보시는거 같은데 현실과 픽션은 구분해서 보도록 합시다 ^^
@@mayak-aru 왜이리 급발진해서 화를 내시는지용 ㅇㅅㅇ.. 영상 제대로 봤구여 다른 베기술을 보일때 그렇게 흔들리지 않은걸 보니 고정에 큰 문제는 없는거같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제대로만든 짚이나 대나무가 아니라 대충만든 저런 종이(박스)재질이 더 잘베입니다. 그리고 꾹꾹 누른건 앞서 말씀드렸지만 고정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선보일 발도술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베는 동작이기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는 할지언정 걸레로 고정한것이기때문에 저렇게 되실걸 예상한거같긴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장비탓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검선이 정확했다면 충분히 안날라가고 벨 수 있습니다. 전 테이프로 고정해놓은것도 한적 있으니 실수라고 생각하는게 맞는것같네요. 근데 영상 편집으로 보나 댓글들의 반응으로 보나 저렇게 원통이 날라가는게 정상이 아닌데 강력해서 날라간것마냥 대단하게 편집이 됐고, 사람들도 대단하다고하는 분위기이기때문에 원래 저래서는 안된다고 말한겁니다. 발도술은 강력해서 유명한게 아니라 그 존재와 발전의 이유와 의미, 실전성등등이 아우러져서 높은 평가를 받는것기때문에 발도술을 강한 베기로 생각하고있다면 그건 착각이 맞죠 ^^;; 강한 베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베는게 제일 강한거고 ㅎㅎ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저런 베기의 정확도가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제가 그걸보고 아는척을 하겠습니까 ㅋㅋ
@@user-dd4oy7zi7b 대나무 같이 딱딱한 것이 힘이 가해질 때 더 온전히 가해집니다. 박스같이 비교적 무른 재질의 물체일수록 충격이 가해졌을때 그 형태가 변질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충격이 가해지는 지점이 이동하게 되면서 그 힘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아서 더 베기 힘듭니다. 상식이에요 ^^ 좀 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보통 비닐같은 것을 가위로 자를땐 그냥 자르면 잘 안잘립니다. 다른 손으로 끝부분을 잡고 쭉 당겨서 팽팽하게 만들어야 잘 잘리죠 빳빳하게 만들어서 가위로 힘을 가할때 그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하는겁니다 아시겠어요? 갑자기 또 발도술이 최곤줄 알면 착각이네 위에서 아래로 베는게 어쩌네 하시는데 그냥 이따위로 못알아잡수실거면 대꾸를 하질 마세요. 지금 말하고자 하는게 댁이 뭣도 아니면서 정확도타령 하시는건데 정확도 충분히 정확했고 베일 때 충격때문에 고정이 제대로 안되어있던 기둥이 날아간 겁니다. 보시면 날아갈 때 이미 두동강 난 상태로 날아가는거 보면 정확도타령 할 게 아니란걸 알텐데 뭘 자꾸 정확도 정확도 뭐 노이로제 있으세요? 아무리 정확도가 훌륭해도 본체 자체가 가해지는 충격은 있을수밖에 없어요 ㅋㅋㅋㅋ 님이 말하고자 하는 그정도의 정확도는 이미 사람의 기술 숙련도를 떠나서 칼의 예리함이 결정짓는 비중이 더 크죠;;; 그냥 잘 하신다 하고 넘어가면 될 걸 왜 거따가 훈수 못참는 꼰대마냥 정확도타령입니까 예? 뭔 검선이 더 정확했다면 어쩌고저쩌고.. 만약 댁이 무슨 검술 가르치는 분이라 그렇게 주댕아리가 근질근질 하신거면 아가ri 로 ㅈ문가질 하지 마시고 영상이라도 하나 올리세요
현대사회에서 검을들고 상대와 싸울일은 없거니와, 애초에 그런상황은 있어서도 안됩니다.. 실전성을 운운할거면 복싱이나 주싯수, 호신술 등을 배워야지 무기술을 수련할게 아니죠 검도는 어떤 검도든간에 모두 좋은운동이고, 결국 수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마음을 다잡는것이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대한검도를 필두로 여러 무도의 수련생들이 서로 상호존중하지 않는 인터넷 문화가 퍼지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아니 인간적으로 조선검술은 아예 다 사라졌고 해동검도는 나한일이랑 김정호가 여관방에서 창작으로 만들어 진거는 이미 다 아는 사실임 애초에 해동검도는 이영식 선생이 나카무라 다이사브로에게 진검쓰는거를 배운것을 해동검도의 토대로 만들어서 발전한것인데 조선의 검술이라니 진심으로 기가찬다
조선시대 검은 허리에 벨트? 고리로 연결 해서 검을 매달고? 다녔고 일본은 위 영상처럼 허리띠 사이에 검을 꽂고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일본검은 일본철을 모래에서 채취 한 철로 제련 하기에 불순물이 많아 단조를 많이 했고 또 잘 부러지기에 두자루 이상 꽂고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 "배에 왜놈 한명이 올라올 때마다 아군이 다섯씩 죽어나간다" 그래서 아예 백병전을 못하게 하려고 배에 철갑을 둘러 만들어낸게 거북선입니다 애초에 수많은 내전을 통해 연마한 검술과 전쟁을 피하려 조아리고 무를 천시한 나라의 무력에는 차이가 나는게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고..
@@rlfntls8550 마냥 평화롭진 않았죠. 임란 전의 평화는 명나라가 안정적이어서 북방민족 침입을 조선과 같이 지속적으로 견제할 수 있던게 컸어요. 실제로 임란 이후에 조선과 명나라 국력이 동시에 약해지자마자 세력을 불린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호란이 발생했죠. 이때도 임란 이후에 일본검술을 도입하고 양성한 조총부대에 큰 피해를 입은 청나라가 나선정벌에서 조총부대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효종 이후 정조 시절엔 무예도보통지에 일본검술이 기록되기도 했구요. 해방직후와 한국전쟁 직후 국민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려고 태권도 같은 고유 무술을 창작하기도 했지만, 검술이 진짜 전쟁 기술이었던 시대엔 왜나라 검술이라고 무시한게 아니라 쓸만하니까 도입한 만큼 강해진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는 이상 무술에 경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쓴 댓글입니다.ㅎㅎ 현대 종합격투기의 사강과도 같구요. 전 태권도랑 무에타이 주짓수를 하는데, 태권도는 그냥 손발을 쓰는 무술이란 의미고 무에타이는 타이격투기란 뜻인데 무에타이는 특히 복싱, 가라데, 그레코로만 레슬링 등 다른 무술을 받아들이면서 강해졌죠. 주짓수는 지금 순간에도 활발하게 기술 개발이 이뤄지구요. 종합에선 쓸만한건 모든 허용됩니다ㅎㅎ
@@rlfntls8550 우리나라가 전투민족이 아닐수 있다는건...그렇게 볼 수도 있고 저도 옛날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최근에 한능검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 지리적으로 강국에 둘러쌓이고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을 당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당하면서도 언어나 문자 등의 고유성을 지킨 결과는 특유의 호전성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rlfntls8550 몇몇 말에 동의를 함. 우리나라가 외침이 많았다기엔... 영국, 프랑스, 스페인쪽 열강들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외침 및 내전이 덜한 평화적 국가였쥬. 장미전쟁에 백년전쟁, 병인/신미양요 때 전투 내용보면 처참한 수준의 국방력이었고... 임진년도 비슷했고. 그냥 감정 빼고 보면 중국에 사대를 잘해 살아남았다라 느껴지는 국가..
돌면서 베는 동작(영상한국검법)은 확실히 실전성보단 퍼포먼스에 가까운거 같네요. 첫번째 자세가 너무 커서 두번째 자세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넓은 보폭으로 몸의 균형이 불안정하고, 두번째동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첫번째 동작이후 자세가 올바르게 되어있어야 다음 자세가 부드럽게 되거든요. 잘 봤습니다.
@@user-xz2ph7hn4e 항왜인들은 임진왜란때 조선편에 서서 싸운 자들로 인조가 집권하던 시기에 이괄의 난에서 기록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일본 집권 300여년전의 기록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당시 일본의 검술이 조선의 검술보다 뛰어났다는 간접적인 기록이지요 그 이유는 막부시대라고 들어보셨지요? 일본은 끝없는 내전으로 전란이 없었던 조선보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훨씬 뛰어났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 후 바로 조선에 쳐들어 왔기 때문에 군대도 없는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것이고요 임진왜란 이후 항외인들은.북쪽으로 밀려나지만 이괄이 인조의 명을 받아 후금을 막기위해 북쪽에서 군사훈련을 하였죠 그때 이괄이 항왜인들을 훈련교관으로 채택해서 훈련시켰죠 그후 이괄이 반란을 이르켜 한양을 수복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고요 일본의 사무라이가 미화된건 사실이지만 그당시에는 조선보다 뛰어났다는 기록이지요
@@user-xz2ph7hn4e 이런 댓글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으로 밖에 안보여요. 실제로 항왜 중에 일본이름 사야카라는 항왜 장수가 귀화해서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선조에게 하사받고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에서도 조선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어요. 많은항왜들이 조선을 위해 싸웠고 검술뿐만 아니라 조총 훈련법 등등 조선에 좋은 영향도 끼쳤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 까지도 나쁘게 표현하시는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무지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