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뿔도 모르는 인간들 니들이 김일성을 알아 수만동포가 전재으로 그라고 타국 젊은 유엔군 희생 뭐라 할낀데 개 좃도 모르는 넘들이 역사운운 그래서 김준혁 같은 쓰레기가 뭘 안다고 역사운운 그리고 미국 욕하면서 지 아들은 미국 국적 댓글 꼬라지 넘들 쓰레기 이 젊은넘도 김준혁 같은 양아치
이 서류는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로 이 전 대통령의 영문 이름 ‘Syngman Rhee’,와 생년(1875년) 등과 일치하고 있다. 이밖에도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3 뉴스-
채상병의 죽음과 박대령에 대한 괴롭힘에서 도주대사까지, 그리고 최근 대통령 심기관리차 연출된 대파 875원이 그냥 나온게 아니라 그들이 존경한다는 이승만시대 따라하기였네요. 국민방위군사건등 많은 사건에서 제대로 된 책임을 묻지못한 역사가 쌓이고 쌓여 채상병의 어의없는 죽음과 박대령에 대한 괴롭힘으로 이어지고있다고 본다. 어떤 사회건 사건, 사고가 있을수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에 대해 투명한 실쳬적진실발견을 통해 책임을 명확히해 재발방지와 국민신뢰를 쌓아가는 사회만이 문명사회이자 선진국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것인가?
담요 한장을 둘둘말아서 한쪽 어깨에 걸쳐메고 신작로 가로 줄지어 남쪽으로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청도를 지나는 화물차 지붕 위에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보았다. 국민 방위군 그들은 핏기 없는 얼굴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경기도 충청도에서 부터 걸어서 경상도 땅에 이른 것이었다. 엄동 설한에 굶어 죽고 얼어 죽었을 것이다.
제주 올레를 걷다보면 4.3.의 흔적들에 가슴이 멍해질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곳곳에 남아있는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한 죽음들........ 저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개신교가 저지른 학살이 반드시 철저히 재규명되어, 그 사실을 역사교과서에 남겨서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박사가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강지처 박승선 여사는 이 박사가 묵고 있는 돈암장으로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만나주질 않아 그때마다 돌아오곤 했다." 이승만은 1912년 이후 5년 정도 서신을 교환하다가 더 이상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또 온 나라가 다 알 정도로 1945년 10월 귀국한 뒤에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박승선이 돈암장을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 정도였는데도 박승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여전히 자기 남편이었던 것이다. 박승선은 만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 어머니까지 여의었다. 궁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시위대에 밟혀 죽었다. 그 뒤 지금의 서울 후암동 외가에서 성장한 그는 16세 때인 1891년 외할아버지 중매로 앞집에 사는 이승만과 결혼했다. 여기서 이태산(이봉수)이란 아들을 얻었다. 태산은 1904년에 출옥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승선은 의리가 있었다. 24세 때인 1899년 남편 이승만이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연루돼 투옥되자 지금의 서울시청 앞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사흘간 단식하고 통곡하며 석방을 탄원했다. 또 직접 돈을 벌어가며 남편 옥바라지와 시부모 봉양을 책임졌다. 그리고 남편이 미국으로 재차 떠난 1912년 이후에는 이승만 아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사라진 이승만 호적 미스터리 [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이승만 부부의 적이 된 이승만 부인 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2736438
저처럼 71년생이 배운 교과과정은 근대한국사가 넘 수박겉핧는 짧게~특히 이승만쪽은 거의 안 가르치고 지나갔었어요 그만큼 부끄러운 진실이 있었던 거였네요 지금 5-60대 분들중 적어도 직접 역사를 격지 않은 분들은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진짜 무지한 지식으로 채워져 있을 겁니다 그냥 지금의 부를 이루게 해준 대통령으로…ㅜㅜ 황샘의 채널이 그 분들의 핸폰에서 구독되길… 전 국민의 핸폰에서 구독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