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문화 키워드를 이야기합니다. 그 일곱 번째 키워드, 중용(中庸)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댓글과 구독 또한 부탁드려요 :) 매화선생: 조명화 교수 저서: 논어역평 (현암사) #논어 #유교 #중용 #주희 #공자 #철학 #인문학 #동양 #대한민국 #문화정체성 #문화비판
선생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후대에서 중용이라는 것을 곡해하였으나(의도가 있는지, 한문의 특성으로 인한 해석의 오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후대까지 전해지면서 끊임없이 재 해석되어 온 유학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냥 사장되는 철학들과 사조들이 한가득인데, 지금까지 동북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죠. 제가 느끼기에 선생님이 뜻하시는 바는 그저 금과옥조처럼 선인들의 말을 받들지 말고 재해석하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하는 사람인데 경제학도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말을 후대에서 거의 신격화하였습니다(경제학의 이론 전개 방식에서 수학을 완전히 차용하면서 발생한 결과입니다만). 사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최고로 쳤는데, 두 책을 조합해보면 개인이 이기심을 부리더라도 사회가 허용하는 바운더리 안에서 부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어느 순간에는 원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식으로 이론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제대로 비판하려면 원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켠으로는 참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네요.
곡해라기보다는 편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지요. 제가 자주 비유하는 "빨가면 사과, 사과는 달다, 달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방식의 해석이지요. 그리고 그런 해석이 주희라는 권위자가 내린 것이라면,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됩니다. 유학이 그런 식으로 수천 년 이어질 수 있었던 원인은 그것이 체제교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제군주 체제를 지키는 데는 가장 적합한 교학으로 끊임없이 이용되었습니다. 심지어 몽골과 만주족이 지배할 때도 그랬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경우뿐 아니라 대개의 고전 해석에는 그런 함정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함정은 고전 자체를 세밀히 분석하면 드러나기도 하지만, 고전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공부할 때 더욱 잘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