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0 중3때 담임 선생님께 의뢰를 받았습니다. 친구♡를 일년동안 돌보아라. 학기초에는 될수있으면 나가서 축구하지말고 그 친구 옆을지켜라. 제가 그 당시 일년동안 느낀 것들이 교수님 강의로 설명이 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경험을 그로 써보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철학에 대한 관심도 생겼어요. 야전침대를 제공하라. 그친구가 원했던것이 그것인것 같습니다. 저도 알았는데 그때제가 어려서 방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코로나때 들었던 말은 선과악이 갈린다.였어요.지나고 보니 나라별 개인별 한 행동에 대해 볼수있었어요. 리더에 따라 성공과 실패. 공동체를 위해 나도 따라주었는지?. 어리석은 자신은 열심히 따라주지 않으며 남까지 선동해서 방역을 방해했어요. 하늘이 선별하더군요..내가 본 하늘은 분명 같이 다루지 않았어요.칠성판위 따로 담겨졌어요.
니체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니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예민하고 병약하고 정직하고 약자를 동정하고 천재고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인 인간이다. 행복과 동정이 도덕의 1원칙이 될수없음은 명확하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모든 고귀한것들은 드물고 어렵다. 도덕성은 고귀함이다. 심미적 감수성이 작용하는 의지적인 취향이 바로 도덕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돕고싶은 사람이 도움을 행하면 그것이 자연의 순리와 이치이고 그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아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돕지 않는 행위도 똑 같은 자연의 순리와 이치이다. 모든 문제는 도움을 준 사람이("착한일 한사람") 혹은 제 3자들이 돕지않은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나쁘게 보거나 이런 행위를 어떤 획일적인 가치관의 잣대로 보거나 강하게 비판하거나 주장하면서 인간끼리 차별과 멸시와 혐오가 생길때 발생된다.
힘의 의지에 의해 상승하려는 욕구에 따른 해석이란 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인간의 의지에 의해 상승하려는 욕구는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기준에 의해 해석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며 개개인의 다른 주관적인 해석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도덕이라 할 수 없다. 자기 욕구충족에 대한 행위에 대한 변명일 뿐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악 구분이 없어지고 욕망을 충족하려는악행도 자신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면 사회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니체가 자신의 생각을 문학적 독백으로 서술한 것을 철학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마 단지 문학일 뿐이 아닌가 생각된다. 철학이란 논리가 정연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젊은 시절 니체를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니체의 철학은 쇼펜하우에 심취해서 최초에는 비관주의적이었으나 나중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반발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변화시켰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의지를 권력의 의지 라고 외치며 긍정적 철학사상으로 선회했지만 궁극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을 벗어나지 못했다.니체의 책을 읽으면 그 무한한 독설 해학의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책에서 체계적인 사상은 얻을 수 없다. 반면 칸트의 저서는 난해하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책은 너무나 난해하여 철학자도 읽기를 거부하여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되었고 단지 그 자신이 만년에쉽게 해석해 놓은 책을 읽은 사람들의 의해 인정받아 만년에 유명하게 되었으나 청년시절의 명예욕은 이미 사라져홀로 조용히 오래 살다가 사라졌다.
배 부르면.. 그제야 어떻게?라는것이 스물스몰 몰려온다 .불평등이 심한 대한민국이 이제야 평민들도 어떻게?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듯하다 학창시절 아무리 배워도 삶의 찐이 안되고 40대 부터 다른 자기로 혼돈이 오는것같다 공동체가 심했던 우리나라 구조로 개인의 자유와행복은 없다.나도 행복하려면 부모님도 자식도 주변인도 행복해야 비로소 마음이 좋고 자기에게 집중하게 되는듯. 교수님들이 시민들과 자주 호흡하고 서로의 눈높이를 이해하는 장이 사랑방처럼 곳곳에 있으면 좋겠다.
사교성 많은 여우가 곰한테 와서 굴레를 만들어 놓고 친구하자 했지요 곰은 여우가 하자는 데로 몇개의 굴레 속에서 함께 즐거운 놀이도하고 배움도 같이 했지요 항상 대장이 되고 싶은 여우는 다른 곳에도 몇개의 굴레를 만들어 놓고 대장놀이를 즐기고 있었지요 곰과 여우는 친하니까 서로의 성격도 잘 알게되었지요 그런데 토끼도 닭도 강아지까지 여우 때문에 속상해 하며 곰한테 다가와 하소연도하고 여우가 했던 한소리라도 얻어들을까하고 곰 곁으로와서 질문들을 던졌지요 가끔씩 확인할수도 없는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는 여우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곰은 말을 옮기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래되니 그 여우의 근성은 곰에게도 튀고 말았지요 여러번 곰도 아픔을 당했지만 용기를 낼 기회가 왔지요 곰이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곰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동안 곰 곁으로와 여우 때문에 아파했던 많은 동물친구들과 곰 자신의 방어를 위해 시원한 한방을 날리고 싶었지요 곰은 굴속으로 들어가 사람이 될 때까지 마늘을 먹으며 인고의 시간을 갖기로 했지요
갠적 느낌> 실로 한사람이 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는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이를 알수 없죠 어떤 사람인지 ? 내가 만나는 이 사람들의 영향으로 내인생이 나쁘게 되기도 혹은 반대로 좋게 변하기도 합니다. 그건 즉 사람의 선과악행에 공존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래서 옛말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어질고 착한이를 가까이하라 (다중.이중인격은제외입니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자를 가까이 하지마라 무례하게 함부로 대하는 자를가까이 하지마라 술도박,아첨 여자를 탐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마라 등등 내 주위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영향을 받을 것이고, 내인생도 타인 처럼 바뀔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인들의 철학의 단점은 모든걸 "이것은 이것이야", "저것은 저것이야"처럼 명료하게 구분되야 한다는것이다. 생존과 안전 그리고 약간의 즐거움(오락)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고상한" 이념,사상,철학,도덕,통념 등은 모두 인간언어(생각;머리속의 언어)가 만든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언어(생각)는 볼수도,만질수도,들을수도,맛볼수도 그리고 냄새 맡을수도 없는 귀신의 존재와 그 특성이 너무나 똑 같다. 인간의 생각(상상과 모든 종류의 지식등)은 너무나 가변적이어서 도덕이라는 것도 상황적이고 상대적이고 지역적이고 시대적이고 문화에 따라 수시로 얼마든지 변하는것이다(예;"열녀문"은 더이상 도덕이 아니고 요즘의 "열녀"는 바보다). 귀신을 닮은 허상의 인간언어(생각,관념,이념,철학,도덕 등)가 만든 도덕이나 행복론으로 바람직한 인간 혹은 인간생활의 "표준"을 구분하고 주장하는 행위를 나는 '똑똑한 무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모든 "위대한"지식보다는 절대 상황적이지 않고 가변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의 생명들과 물질에게도 통하는 자연의 순리와 이치로 이세상과 인간사회를 읽고 살아간다.
선과악은 진화와 관계가 있죠~ 선만 있었다면 인간은 멸절했을것이고 악만 있었더라도 인간은 멸절했을겁니다. 선과악이 적당히 공존해야 멸절하지 않고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죠~ 진화는 도덕을 모르죠~ 진화가 가르키는것은 단 한가지 뿐!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들은 다양한 생각을 갖게 진화되어 왔음. 선한사람 악한사람~ 선도 악도 아닌사람~
@@soongum 인류가 사유하는 도덕이 진화하는 와중에 나타나는 망상이라면 인간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한게 아닌가요? 허왕된 망상을 인간의 역사속 대부분에서 사유했으니깐요. 선과 악처럼 진화론과 창조론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선택의 순간에 살고 있습니다. 칸트와 니체가 서로 다른 의견을 보여줬듯이 어느 한쪽은 맞고 어느 한쪽은 틀렸지만 그 결과를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언젠간 생물학적 접근으로 우리의 기원이나 도덕을 밝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죠. 진화론도 과학도 어느 하나 완벽한 진리는 없으며 그저 믿음에 의해 추측하는 이론들일 뿐이죠. 과학 현상을 증명했기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틀안에 갇힌체 경험한 것들을 보고 증명했기때문이죠. 결국 우리의 세계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고 그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았기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은 불가능한 이론이라고 말했으나 아인슈타인이 틀린것 처럼 우리는 과학조차도 진리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진리가 아닌 과학으로 먼 훗날 생물학적 접근으로 우리의 DNA에 도덕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확정할 수 없는 추측일뿐이죠. Hewis님을 반박하기 보단 마치 과학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것도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 댓글남깁니다.
@@user-du2bf9dk9o 인간은 물론이고 그 어떤 생명도 바로앞에 미래를 완벽히 예측 할수 없다!! 여기서 완벽이란 100% 를 말합니다. 99.99999999%와 100% 차이가 수치로는 작으나 결과는 0.000000001의 차이가 생깁니다. 진화는 100년 1000년이 아니라 훨신 더 큰 시간개념 까지도 생각하고 내린 결론 처럼 명확합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증식과 다양성 입니다. 그 다양성 안에 선과 악이 포함된겁니다. 그리고 그후 다른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사소하게 변화하여 분노,사랑,증오,고독, 즐거움,슬픔 등등이 생겨 났고~ 그러한 다양한 감정들은 진화의 산물인 것이죠~ 인간이 선하기만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영원히 살았을거란 착각을 많이 합니다! 인간이 선하기만 했다면~ 행복하게는 살수 있지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100년 1000년 은 운이 좋아 행복하게 살 순 있겠지만 10000년 100000년은 선한것 만으론 불가능 합니다. 그걸 진화는 알고 있어서 증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까지 포함한겁니다. 그러면 증식과 다양성으로 진화는 만족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다양성에서 오는 딜레마가 생겨납니다. 악의 딜레마! 그건 다시 진화로 보정하는것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명제를 실제론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도 감지하여 그걸 다시 진화로 보정해 주는것이 관찰됩니다. 보정되어가는 과정도 진화로 해결 하고 있다고 봅니다. 계속 진화 되어가는 모습은 진화의 명제를 완벽히 만족하지 않기 때문일겁니다. 하지만 점점 진화의 명제의 수렴해 가는것 처럼 보입니다.
@@user-du2bf9dk9o 진화를 생각할때 옳은것! 선한것! 을 먼저 생각하는것은 잘못 생각한겁니다. 진화는 선과악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그냥 도구정도 일 뿐! 진화는 유전자를 남기려고 하는것일뿐입니다. 언제까지? 영원히~ 그렇다면 많이?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어느 시간을 찍든! 그 시간엔 반드시 필요한 유전자가 있어야 한다죠~ 기원전 5세기를 찍든 서기 3000년을 찍든 10000년을 찍든 그시간에 반드시 하나의 유전자는 있어야 한다!! 그걸 만족시키기위에 생명의 육체든 정신이든 이렇게 변화 하고 있는겁니다
선과악을 바라보는 니체의 관점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신이 없다는 전제하에 그의 주장은 가장 현실적이며 진리에 가까운듯 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에 그가 주인성 (이타적인, 이성에의한 행위) 과 노예성 (이기적인, 본능에의한 행위) 을 선과 악으로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절대적 선과 악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을 방어할 마지막 수단). 마지막 강사의 멘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도덕은 삶 위에 만들어진 다는 것에 동의한다. 마치 내가 누군가에 의해 살인당하지 않기위해서 살인을 보편적인 관점위에 악으로 여기는 것처럼. 도덕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체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세상의 선과 악의 기준이 "나" 로 정의된라면, 철저히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과 선의 사슬(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로부터 벗어난 오직 자신을 위한삶 (이기적인 삶) 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진리에 접근한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살인당하지 않기 위해서 남을 살인 하면 안되지만, "선과 도덕의 굴레 속에서 오지랍과 이타적인 삶을 사는 자신을 보고 지혜롭다, 현명하다, 선하다, 이게 옳은 삶이야' 라고 자위하며 살 필요는 없다는 것" 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만약 나의 삶을 판단 하거나 심판할 절대자(신)의 존재가 없다면,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을 감히 누가 악이라 판단 할 수 있는가? 결국 도덕은 인간이 삶을 유지하지 위해 만든 "선" 이라는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위장한 한가지 방어체계 수단이며 이 세상은 결국 강한자(힘)에 의해 선과 악의 기준이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생존과 번식을 하려고 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혼자서 생존과 번식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만약 번식을 포기하고 생존만을 위해서 혼자 살겠다고 했다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해야 하는 인간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에 대해 책임지어야 그 관계가 유지됩니다. 절대자가 있건 없건 내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한 나의 선과 악은 타인에 의해 규명될 수 있으며 나 또한 타인의 선과 악을 규명할 수 있기에 내가 그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이기적인 삶이 아닌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삶을 산다”라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를 추구하면서 살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건 좋은데 기본전제가 항상 있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깔아놓은 인프라 위에서만 살 수 있어요. 자유로운 여행이 궁극의 목적인 사람이 맨 몸으로 혼자 그게 가능할까요? 기차 배 비행기 식사 숙소 심지어 관광지 티켓팅 직원까지 타인의 활동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같이 섞여 살아가는 존재임으로 자신의 삶을 누리고 즐기고 자신을 궁극의 목적으로 추구하되 타인의 자유나 생명 권리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유명한 말인 '만인이 만인의 적' 즉 모두가 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무시하면 모든 인간이 모두 서로에게 적이되고 즐기지도 못하고 공멸하는 즉 집단의 만족과 효용이 0에 수렴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죠. 나도 이 사람를 이유없이 패고 그 사람도 나를 이유없이 패고 모두 몸져누워 이로 못하고 굶어 죽는 이런 개판같은 세상이 도래하는 것인데 인간이 이런 자해행위와 같은 상황을 자처할만큼 어리석지는 않죠. 관습과 상식 법등 유무형의 것으로 인간 사이의 룰을 만들어 놓았고 이는 순전히 인간이 모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적이 되지 않고 부드럽게 서로가 서로를 도움닫기로 삼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에 절대적 선이라던가 그러한 가치성이 있는게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최소한 인간답게 살다가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규칙의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부산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이란게 상대적이잖아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 시대의 특성에 맞는 즉, 그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 마찰없이 어울릴 수 있게 만드는 규칙이란게 있고 그러한 규칙의 정신이나 가치를 담은게 그 시대의 도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남을 해치지 마라 이런건 도덕이나 선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본원적 가치체계이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태어난 이상 배고프면 밥을 먹고 싶다는 것만큼의 본능적 차원으로 남의 육체를 해하는것이 잘못된 것이라는걸 압니다. 잠자는 사람 함부로 건드는것도 마찬가지 차원으로요. 우리가 연약한 갓난아이가 새근새근 잠드는걸 볼때 함부로 깨우는 행위를 상상만해도 죄를 짓는것 같은 느낌이 들죠? 인간의 본능적인 것을 침해하고 있다는 걸 유전자(?) 차원에서 직감적으로 아는 겁니다. 이런건 도덕이 아니라 인간이 후각 시각등을 갖고 태어나는 것처럼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영역이구요. 도덕을 침해하는 인간은 비난받는 정도에 끝나지만 이런 절대적 영역을 침해하는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취급 자체를 못 받고 집단에서 퇴출 격리당하거나 심심찮게 목숨을 잃는걸로 인생이 끝납니다.
룬드 도덕결정의 주체는 개인. 하지만 개인도 누구인가에 의해 잡것과 고귀함이 있슴. 우린 잡것이아닌 ㅇ고귀한 위버맨시가 되어야하며 위버맨시의 도덕이 선한것이다 라고 할수 있겠네요. 물론 또 다른 위버 맨시가 볼땐 선이 아닐수도 있지만. 이게 니체가 본 도덕과 선악의 기준인것 같네요. 따라서 스피노자처럼 선과악은 결정할수 없고 단지 나의 존재 역량에 유리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가 아는 선.악은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편견이다. 라고도 할수 있겠죠.저도 어려눠요. 머리가 빙빙돔.
도덕이란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행해져 온 교육과 학습의 산물이며 그 사회의 팽창이나 수축에 따라 규범으로서의 도덕도 그 가치를 달리하게 되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가변적인 것일 뿐. 허나 인간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바탕으로 태어 난 니체의 힘의 의지로 이해되는 이 세계의 미래는 존재의 영속성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