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수와 정수, 유리수를 차례로 열거할 수 있는 수(셀 수 있는 무한)로 밝힌 것은 칸토어의 놀라운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이는 자연수와 유리수의 농도(갯수)가 같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은 것입니다. 자연수와 유리수 집합의 크기가 같다는 것은 칸토어 집합론안에서만 일견 합당해 보입니다. 패러다임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지요. 전단사함수(1:1대응)은 유한집합끼리만 의미있는 것입니다. 자연수와 정수가 유리수에 포함된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수리적 개념입니다. 사실 칸토어의 집합론은 러셀의 역설과 괴델, 코언에 의해 무력화된 지 오랩니다. 참고로 정수는 두 수사이에(ex 1과3 사이)에 유한한 정수만 존재하지만 유리수는 두 수사이에 무한한 유리수가 존재합니다(ex 1/2와 1/3). 두 집합의 크기, 농도(cardinality)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는 힐베르트 이후 현대수학이 보편타당성과 엄밀한 완전무결성과 결별한 결과입니다. 게임과 컴퓨터 프로그램, 알고리즘을 만들 때 주로 쓰이는게 현대 수학의 실정입니다. 과학자들 특히 양자역학 연구가들은 현대수학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와.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 통찰은 인간의 한계라기보단 지성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은 굳이 유한을 통해 무한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선택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오히려 통찰을 포기하는 게 무한을 이해하는 길에 가까울지도.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무의미한 무한을 인식할 방법이 이미 인간에게 있음에도 유의미한 인식을 놓지 않으려는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 되겠죠.
진짜로 어렸을때 양쪽 거울벽을 보면서, 또는 우주의 거대함을 상상하면서 어렴풋이 무한의 개념을 생각했지만, 끝이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 자체만으로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죠. 그 두려움과 호기심에 기독교에서 답을 찾았지만 제 기준에 맞는 답은 없었습니다. 이 영상들을 보면서 과거의 고민했던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나면서 그 때 이 영상을 접했다면 지금쯤 수학을 전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무한 우주속에 내가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거겠죠. 너무나 유익하고 좋은 영상입니다.
04:26 영상에 약간 어색한 문장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초월수에는 허수와 복소수도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실수인 초월수만을 다루겠다." 이건 왠지 허수 전체가 초월수에 포함된다라는걸 암시하는듯 해서 불편하네여 "허수부가 0이 아닌 복소수인 초월수도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실수인 초월수만을 다루겠다." 가 더 오해의 여지가 없는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