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잔인하게 친족까지 멸문을 시켰으니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인과응보로 천벌을 받아 자손들은 잘 된 사람이 한 명도 없이 본인은 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죽고 아들들인 덕종과 예종은 20세에 죽고 해양대군인 예종과 한명회의 셋째딸 이면서 예종의 부인인 장순왕후 한씨는 17세에 죽고 예종과 장순왕후 한씨의 큰아들인 인성대군도 3살에 죽고 한명회의 넷째딸 이면서 덕종의 둘째아들의 부인인 공혜왕후 한씨는 19에 죽고 증후손인 연산군 이라는 폭군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경혜공주가 제일 불쌍하네요. 어린 나이 에 조부모 부모 친동생 남편까지 죽는걸 목격하고 자식들도 역적의 자식으로 간 주되서 왕가의 자손들로서 마땅한 지위 도 못 누리고 어렵게 생활했다 합니다. 이런 사단을 만든 친숙부 세조를 증오하 다 못해 살의가 느껴졌겠지만 죽이지도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원통했을까요. 그래도 세조가 양심은 있었는지 경혜공 주와 그녀의 자식들은 노비로 만들지 않 고 나름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다 하네요
Vdd infelizmente em nossas sociedades a maioria das pessoas são gananciosas e cheias de maldade por causa da avareza dos corações por isso a cada dia a maldade aumenta e fica mais difícil para viver 😢😢
왕실로 보면 비극이나 반면으론 서민들이 살기엔 왕권이 강력한 왕이 통치하는게 서민들의 삶은 더 안정적이라고 볼수 있음. 실제로 왕권이 강할때 국내 평민들의 삶은 더좋았다고 실록엔 적혀 있음. 그반대로 왕권이 약할땐 평민들의 삶도 핍박했고 관리들의 부정 부폐도 심했죠. 그래서 난 태종과세조를 나쁘게만은 보지 않음.
@@문씹새-q4f태종은 충분히 그럴만한 명분도있었고 총명한 아들이 있음과 동시에 반대세력 청산후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백성들한테 되돌려주었지만 세조는 전혀아님. 명분도없고 남의 인생을 짓밟아버린 쿠테타 였을뿐 세조가 한 일부 좋은 정책들은 그 단면일뿐 인간으로써도 자식농사도 다 망쳐버려서 결국 조선이 더 못살게됨 ㅋㅋㅋ 연산군 인조 선조 이 라인만 봐도 ㅋㅋㅋㅋㅋㅋㅋㅋ
조선말엽에 영국에서 선교사로 왔던 분이 조선의 참수현장을 보고 참수하는 장면을 연필로 그리고 글을 남겼는데 양반 세명이 참수당하는 모습을 보고 조선사람들 너무 잔인하다고 표현했는데 우리가 사극에서 볼때는 망나니가 잘드는 칼에 물 뿌리며 참수하는 모습을 봤는데 선교사가 본 참수는 백정으로 보이는 사람이 칼이 아주 무딘칼로 여러차례에 거쳐서 참수하더라 그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라고 썼어요
예 맞습니다. 망나니가 백정이기도 했구요. 참수는 아주 무딘칼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영국 사람이 감히 한국인의 참수가 잔인하다니, 그들이 스스로들이 행하는 잔인한 고문들. 마녀사냥 노예사냥들. 그리고 그들끼리하는 잔인한 고문이나 그 외 참혹한 문화들이 널렸는데. 우리보고 잔인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초등학생 땐 이름만 듣기로 명재상 소리로 듣고 그랬는데.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이 아닌데 능력만 보고 좋은 평판을 내리는 우리의 문화 자체가 너무 실망스럽고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듬. 남녀노소 직위고저 불문하고 부정부패를 욕해도 우리가 만든 탐관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듬. 정치가 백성은 잊고 세력다툼해서 권력도 주는 재밌는 놀이라는 의미로 남으면 정치를 하는 그 어떤이라도 수천수만년 아니 인류 역사 내내 욕처먹어도 할 말이 없는게 우주의 옳은 이치임. 반드시 업적을 남겨야 하는게 그 업적만 시험에 나와서 후세에 훑는 사람 정도에게는 조용히 괜찮게 지나갈 수 있음.
그것보다 왕실 어른이 없어서 그럼 문종이 빈 중전 자리에 집안좋은 명문가 아내를 들였으면 세조도 무슨 짓 못했음 왕실어른인 대비가 수렴청정하면 세조도 대신이 조정 잡는다는 명분도 없었을테니까ㅇㅇ 그래서 조선은 단종 이후 중전자리 절대 안비워둠 그래서 영조가 할아버지 나이대에 10대 중전들인거임 세종이 잘못한건 단종 아내자리를 비워둔거지 다른 왕자한테 왕위 물랴줬어도 똑같았음
문종은 오히려 수양보다 능력이 뛰어났음. 이는 태종이 양녕이 아닌 세종에 물려준것과 같은 이치임. 실제로 문종화차도 본인이 만든 것인데다 훈민정음 반포도 문종의 대리청정 이후에 실시된거라 문종의 개입이 없다면 아무리 세종이라도 반포가 불가능하기에 창제쪽은 잘 몰라도 반포는 문종의 역할이 중요했고, 그걸 허락했다는 것은 문종이 세종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