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터널 바로 입구에서 미꾸라지 비슷한거나...작은 물고기 도롱뇽 잡고 제가 놀았던데에요.. 제가 78년 생이고 주례 바로 옆 개금쪽이 집이었는데 80년대 초반에 저기 터널쪽에 자주가서 놀았던 기억이 선명해요... 그 당시에 터널에 물이 꽤 차있던 기억이 있어요...터널 앞에도 웅덩이가 꽤 넓고 깊었던 기억이 나구요.. 캄캄하고 갑자기 깊어진다고 무서워서 터널안에는 못들어가본 기억이 나네요... 사실이에요.
형제원7년있던 사람입니다 원래 형제원 뒷산이 냉정산이라 불렀죠 한문으로 써면 차가운 냉 자에 우물 정자 그래서 형제원 시성안에 소대뒤 곳곳에 여름이면 차가운 물이 솟는 작은 약수터같은 셈이 있었죠 특히 취사장과 아동27소대앞 취사장 위편 건물뒤 중간에 여름에도 차가운 서리가 올라오는 셈이있어 여름에 소대장 수발용 물을 떠다가 갖다 받친 기억이 납니다
1996년도 철도청 기관조사로 재직중 이 터널에 대해 지도기관사님께 들은적이 있습니다. 지도기관사님 께서 70년도 부산지방철도청 재직시절 말이 많은 터널 이었다고 하십니다. 하자터널이라고. 이 터널 폐쇄이유가 영상 마지막 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배수문제. 터널을 잘못 뚫었다고. 지하수가 계속 터져나오고 터널내부 균열도가고. 붕괴우려가있어 흙막이 공사후 터널내부를 석재 돌덩이로 채우고 콘크리트로 막았다고 합니다.
집간다고 저곳 자주 다녔었는데 그 밑이 터널이였군요 형제복지원 아이들의 탈출구였다면 아마 지금 저곳을 개방한다면 많은 유골이 발견 되겠죠 형제복지원 생존자나 많은 분들이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되었던 폭력 살인 강간 학대에 대해 아직도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진전이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한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해 부산, 경성, 평양 세 곳에 지어진 "조차장" 이라 불리는 일종의 철도 물류센터 시설의 일부입니다. 현재도 부산 가야역과 서울 수색역, 평양에 가면 굉장히 방대한 철도 차량기지가 있는데, 과거 조차장 시설들의 흔적 입니다.
초 중 고를 사상구 주례동에 살면서 지금 보여지는 동굴 내부에서 고기를 잡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전에 지나다니던 입구에 집이 생긴건 뭐....이전엔 공장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같기도 하고 영상 내용에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닙니다. 기억상 초등학교 때니까 4~5학년땐가 그때까지만 해도 기차 선로와 터널 입구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조금만 걸으면 물이 있었고 밖 빛이 들어오는데까지 들어가 고기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제 나이가 50세니 계산해보면 아실듯요. 여튼 아직도 있다니 대박입니다.
1960년대말까지 현재 주례럭키아파트 부지에 휘발유 등 기름을 보관하는거대한 원형탱크들이 여러곳에 설치된 저유소가 있었습니다. 이 저유소는 초량에서 송유관으로 유류를 이송하기도 하고, 철도를 이용한 유조화차로 수송하가도 했습니다. 이후 저유소가 폐쇄되면서 가야역에서 경부선 철도 밑으로 통과하는 주령터널을 이용한 철도수송이 필요없게되어 폐쇄되었습니다. 저유소부지는 현재의 아파트가 건축되기전에는 신진지프(뒤에 거화로 사명변경) 주례공장으로 이용되다가, 공장을 경기도 지역으로 이전되고, 주례럭키아파트가 그곳에 건축되었습니다.
어릴 때 뭣도 모르고 형제복지원 있던 자리에 지어진 아파트에서 자랐는데 유독 사건사고가 좀 잦았던게 기억이 나네요... 1~2년전에 이 영상 썸네일을 보고 어라 좀 익숙한데 싶어서 들어왔다가 그 아파트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지 알아서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그래서 집값이 쌌던거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 동네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10~20대들이 형제복지원이 있었던 곳이라는걸 모르고 자라는 것 같더라구요
저희집도 그랬어요. 그 자리 아파트로 이사간 뒤부터 사업 망하고 아빠 수술하시고. 같은 동 아파트 사람들 자살하거나 사업 망하고 암걸리고. 결국 집이 망해서 다른 집으로 이사 갔는데. 아빠가 이사하고 난 뒤 말씀이 그 집에서 귀신 많이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가끔(대학생때라) 집에 가면 흉흉한 꿈 꿨네요. 이사나오고 형제복지관 자리인거 알았어요.
자막 만드시는 분이 부산 출신이 아닌가봐요 ^^ 6:30 에 인터뷰 하시는 분이 '다부' 라고 하시는데. 자꾸, 딱 으로 자막을 다셨네요. 다부는 다시란 뜻의 부산 사투리 입니다. "자꾸 거기서 나오니까" 가 아니라 "다시 거기서 (돌아) 나오니까" 라는 뜻이고 "높은 줄 알고 딱 나오더라고" 가 아니라 "높은 줄 알고 다시 나오더라고" 가 됩니다.
저 터널은 1940년대 일제가 부산조차장(가야조차장)건설시 같이 만들었다는 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주례 경부선 아래 철길로 연결된 터널이며 그 당시 아래 철길이 가야조차장에서 위 터널을 거쳐 형제복지원 앞쪽 경부선 아래까지 가설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상역까지 연결할려고 했으나 그 전에 해방되고 말았지요.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석유소비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1951년도에 현 주례럭키아파트 자리에 미군 공병대에 의해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rea Oil Storage COmpany 코스코)의 사상저유소가 건설되었으며 가야조차장과 사상저유소를 연결하는 선로를 위 터널과 철로를 이용하여 만들어 사용했었습니다. 사상저유소 저유탱크는 13개 정도 되었으며 초량동 3부두 옆 초량저유소와 경부선 철길을 따라 가설된 송유관2선로로 연결되어 경유와 빙카C유를 공급받아 저장하였으며 가야조차장으로 연결된 철로를 통해 전국 각지로 석유를 수송하기도 하고 가까운 군 부대에서는 드럼통으로 직 수령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1964년도에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에 준공되어 원유를 수입하여 정제유를 생산함에 따라 부산항을 통해 정제된 유류를 수입 저장하는 시설인 초량 저유소와 사상저유소 시설은 불필요 하게 되었고 1965년도에 폐쇄되게 됩니다. 그 후로 위 철길과 터널도 같이 폐쇄되게 되었습니다.
아주 옛날 어릴때 개금동에 미나리 밭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기차 터널이 완전 방치된채 있었거든여? 거기 터널에도 물이 차 있어서 친구들과 뗏목(아주조잡한 ㅋㅋ) 만들어서 탐험 해보자 하고 들어가다 물도 깊고 너무 깜깜하고 .... 너무 무서워서 입구에서 몇미터 들어가다 포기한 기억이 ㅎㅎㅎ 제가 말씀 드린 그 터널이 같은 주령터널(개금쪽)이 맞을겁니다. 지금 개금쪽 터널 입구 있었던곳은 낮은 저지대였는데 개발하고 뭐하고 하면서 다 매꿔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거에요 ~ 그래도 영상에서 주례쪽 터널 입구 있던곳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ㅎㅎ 주례쪽에 사는 친구들이랑 놀러 그쪽에도 자주 갔었어 주례쪽 터널 입구도 자주본 기억이 ㅋㅋ
개금초등학교 옆인데 당시에 그것을 담력 훈련처럼 간 큰아이들은 저기를 왕복하면서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영상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곳을 개발하여 와인터널이나 시원한 동굴로 개발하면 부산 경제와 주변 경제도 살릴 수 있는데 부산에 발전에 관심 없는 부산시......
형제복지원과 위 터널을 연관 지으려고 하는데 별 연관이 없습니다, 두 지역의 위치가 좀 가까이 있다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인데 형제복지원 아이들의 탈출 경로는 경부선철길도 있고 가야로도 있고 뒤편 백양산도 있는데 꼭 집어서 위 터널만 이야기 할 이유가 없습니다. 관심 유발용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입구가 주례쪽과 개금쪽이 있는데 개금쪽에서(개금초등학교 졸업 88년) 83년부터 89년까지 살았고 개금쪽입구인 가야창공터(지금은 우체국 물류센터)에서 많이 놀았습니다 이야기한 개금쪽 터널쪽마을(철돗길마을이라고 당시에는 불렸습니다)친구들과도 놀았고 터널부근에서 개구리잡고 놀았죠 주례쪽은 엄니가 마침 그위 방직공장에서 일해서 가끔 놀러 다녔네요 주례쪽 입구는 당시 정말 판자촌이였습니다 전쟁후 역사드라마에서나 나오는 60년대 판자촌이였습니다. 살던 사람입장에서 궁금하신거 있다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주례ㅋ제가 어렸을때 살던 동네..저 터널은 주례굴다리 밑 영상 나오는곳에서 부터 시작이구요..물이 많이 찬이유는 그길이 개금초등학교 앞 다리 로 연결되는걸로 아는데 거기가 원래 복개천 입니다.물이 찰수 밖에 없쥬..그뒤 한일아파트 근처 가 옛 형제복지원 자리 이구요,.도망쳐 나온애들이 터널안으로 도망가다 물이 많이 찬곳에 빠져 죽었다 라는 소문도 많았고..혹시 촬영 갈때 못느끼셨나요? 유독 굴다리동네만 음기가쎄고 으스스 하고 한이 맺힌 그런 느낌요..아마 오래 있고 싶진 않았을거 같네요..
형제복지원이 과거에는 부산 북구에 있었죠. 지금은 북구가 사상구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이 한참 운영될때 당시 북구의 국회의원은 현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이신 장x원 의원의 아버지인 장x만씨 였죠. 형제복지원 원장과 장x만 씨는 둘다 목사출신이었고 형제복지원의 만행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북구 공무원들은 이 유례없는 인권유린에 방관을 합니다. 그래서 장x만씨와 형제복지원 원장 박x근씨와 커넥션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x환 전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도 있죠.
아마 안전 문제 해소 및 운행환경 개량을 위한 이설이 아니였을까 싶네요. 위 터널의 경우 이설 시기 자체가 1970년대로 상당히 오래 전이고, 새로운 눈에 띄는 시설 건설이나 부지점유 없이 기존 철도부지 내에서 진행되는 소규모의 공사였기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터널 내에 물이 상당히 높이 차 있다는 말로 보아 경부선 아래쪽으로 교차해 지나가는 터널로 보이는데, 반대쪽 터널은 교차점이 없어 비교적 구배가 작은 평평한 터널이기 때문에, 침수 문제가 두드러지는 상행 터널만 이설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때 선로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구배를 감소시켜 동력차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더 긴 터널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나이 47세 태어난곳이 주령터널 상행선 하행선 중간에 집이있었지요 하행선은 지금도 터널이 있고 거기서 미꾸라지 많이 잡고 놀았지요 우리집 기준으로 주령터널 상행선은 제가 태어날때부터 막혀있었고 터널 입구까지 고무공장이 즐비했었는데 7~8살때쯤 고무공장에 엄청 큰 불이나서 영상에 보이는 높은곳에서 아래로 내다보며 불구경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뒤로 고무공장은 없어졌지요 그리고 형제복지원은 그 복지원 원장 아들이 2명 있었는데 둘째가 저랑 동창이고 그위에 형은 우리형과 동창이었는데 우리형이 형제복지원 큰아들 따라 놀러도 가고 했었는데 집이 형제복지원안에 있었다고 하는데 완전 집이 궁궐처럼 되어있었다고 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거기가 뭐하는데인줄 몰랐는데 다 커서 부랑아들 아니 멀쩡한 사람도 잡아다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노동시 키고 집단구타에 살인까지 저지른 악명높은 곳인지 잘몰랐네요 항상 형제복지원 지나 산에 가재잡으러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지나다 보면 감옥같은 창살에 파란 죄수복같은걸 입은 사람이 항상 불쌍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그런데인줄도 모르고 겁없이 지나다니고그앞에서 놀기도 했었는데 참...
갑자기 알고리즘에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22살 부산 토박이, 한번도 저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부산에서 나고 자라셨고, 외할아버지도 전쟁 이후로 부산에 쭉 사셨습니다. 계속 부산에 사시면서 택시 기사까지 하셨으니 부산 관련해선 아는 게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다음에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