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논증과 결론이 모두 멋집니다. 불교에서 무기(無記)라고 하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저승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헛소리다. " 라고 하셨죠. 하지만, 모든 것이 헛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란 늘 망각하는 존재라서 심지어 깨달음조차 깨달았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생경해기지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절에 가면 있는 불상, 불경, 수행의 계, 부처... 불교 밖에 있는 철학, 논리, 논증, 유튜브... 심지어는 악한사람 아수라장 무논리 가짜뉴스 등등 세상의 추한것들까지도(이경우엔 반면교사)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튜브 영상으로 늘 철학의 달을 가리켜주시길!
9개월 전 선생님의 비트겐슈타인 영상을 보고 생애 최고조로 깊은 환희를 느끼고 크디 큰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금 이 영상으로 찾아왔습니다만 이번에도 역시 그 황홀한 환희는 그대로군요. 깨달음이란, 영상에 나온것 처럼, 본디 개인만의 영역이자 한 단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1이 진정 깨달음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2가 진정한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것은, 자신만의 그 불가형언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영상들이 모두 제 인생의 신념이자 가치관이 되었다는 점에 무한히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만의 '깨달음'을 또 하나 만든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마지막 결론이 좋은 말씀입니다 훌륭하십니다 💖👍 따로이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환상놀음 입니다 하늘에 핀 무지개를 쫒아서 무지개만 보고 걸어가다 낭떠리지 에 떨어져 죽습니다 깨달음 쫒다 인생 망가지고 폐인되는 경우 허다 하지요 가짜에 속아 환상놀음을 하다 허송세월 하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어느정도 수준이신지 는 모르나 세상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셨더라도 그 마음상태 유지가 가능하셨을까요? 그 진여의 자리, 깨달음 자리에서 24시간을 머물수 있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요 진짜 공부는 온실 속에서 하는 게 아니고 생존의 처절한 전쟁터예서 해야 제대로이죠 스님들에 대한 그런 환상 갖지 맙시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훌륭하신 고승님들, 스님들이 진실을 알았고 ,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이죠 우리들 모두 노력합시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
영상, 강의, 모두 멋지네요..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것을 말로 책으로 기술할 수 없고 햬도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셈이니... 불가의 각이란 철저하게 '사적언어'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더더구나 깨달았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아니라고 하는 판국에 이르면...과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암튼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지눌스님의 수심결과 육조의 육조단경 모두 재밌게 봤는데요. 돈오돈수 돈오점수 깨닫고 난뒤에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 뒤돌아보고 너 어디로 왔니? 했더니 a코스로 온사람 b코스로 온사람. 코스만 달랐을 뿐입니가.근기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지는 길이 다른거죠. 정상에 올랐으나 올라온 길이 다르기에 둘다 같다 할 수도 없고. 어느 한길이 낫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진실은 다만 길이 달랐을 뿐. 모두 진실. 중도입니다. 사실 근기,돈오돈수,점수라고 하는 것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실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달을 가리킨 손가락이 존재하는 것처럼요. 내 모순을 알아보고 참회하고 감사함이 마음그릇에 차면 스스로 알게되지요. 나는 똥만드는 기계란 사실을 ㅎㅎ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 유투버님의 깊이 있는 헛소리에서 내공이 느껴집니다. 꾸벅
20년간 독서로 인해 깨달은 점은 딱 두가지로 요약되었어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체 유심조... 그냥 생각하는대로 보이는게 세상임 그리고 다 경전이나 언어에 속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성인들... 자신들은 엄청나게 텍스트를 읽어서 그 경지까지 간게 팩트임
깨달음의 정의는 뭘까요? 틀을 깨고 어딘가에 다다른다~그걸 깨달음이라고 배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모든 게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닌데... 각자의 정의와 개념에 따라서 언어는 가변적임을 알기에 블교에서의 깨달음 논쟁은 언제나 공허하게만 여겨집니다. 잘 먹고,잘 살면,그게 가장 잘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문구 또한 물질적인 해석만을 하는 사람은 어쩔수 없이 그 또한 그렇게 살면 그 뿐이고요.... 항상 철학의 현실적 조명을 해주시는 영상들에~감사합니다!
저는 종종 배를 타고 갔으면 배에서 내려야지 배를 타고 있으면 강을 건너지 못한다고도 비유합니다. 손가락과 달의 비유와 같죠. 헛소리긴 하지만, 헛소리도 손가락이나 배 쯤으로 생각해보면 좋겠네요. 배도 손가락도 필요하니까요. 오늘 영상도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주제를 쉽게 잘 정리해주시는 건 선생님의 탁월한 능력이고, 그만큼의 고심과 노력이 있었겠지요? 감사한 마음 듬뿍 남깁니다~^^
인간은 뇌에서 언어로만 생각할 수 있다. 어떠한 체험은 다양한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뇌의 알고리즘을 통해 어떠한 단어로 도출되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이것을 언어놀이라고 표현하였다. 노자의 사상처럼 “깨달음”을 어떠한 문장이나 언어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간은 뇌에서 전기신호를 이용하여 현상을 해석하고 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지어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이 또 모든것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이 참 현묘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제 댓글도 헛소리 입니다ㅠ
어릴적 중학생때 우연히 보게된 성철스님의 영원한자유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시간이 흘렀네요. 언어로는 한계가 있고 여기 유트브에서 언어로 얘기하는 것처럼 말 언어는 어떤 동기, 무브먼트를 유발할 수 있는 힘이긴 합니다. 그치만 모든 갈증을 해소하기엔 1프로도 부족하죠... 삶은 실제가 아니고 실제와 같은 착각이 드는 연극일 뿐인것 같아요(본인의 의지가 들어간, 여기서 의지도 현생의 의지) 성철스님도 본인이 아닌이상 우리가 깨달으신 분이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언어에는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 말씀을 전하셨으므로. 성철스님이 하신 말은 딱히 새로운 얘기가 아니기도 하구요.. 관련 서적 조금만 봐도 알수가 있느니, 하지만 저같은 사람들 깨우침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스님이십니다.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는 깨달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닌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세상에 흩뿌려진 글과 언어에 현혹되거나 철학적 논의를 하는 등의 활동에 쓸떼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깨달음의 철학적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는,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아닌 깨달음과 같이 언어로 상세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떠한 개념들에대한 철학적 논의이기에 충분히 의미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적 언어 논증의 요지를 깨달음의 객관적 여부가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은? cf)러셀의 이발사 역설 ; 자기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만 잘라주는 이발사, 자기 수염은? -> 자기 수염을 깎을수도 없고, 깎지 않을 수도 없다. -> 깨달음의 패러독스로 연관 수행을 통해 집착을 하지 않는 습관이 배이면 굳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버려짐 / 돈오점수 :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인 수행, 고려 지눌스님 vs 돈오돈수 : 단박에 깨닫고 수행은 불필요, 고려 보우스님, 성철스님 -> 둘은 다른 깨달음? 아니면 정도가 다른 깨달음? -> 깨달음은 사적체험이므로 알 수가 없음 /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 "내 상자안에는 딱정벌레가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딱정벌레(사적 언어)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주관적 경험(사적 영역)은 결코 알 수 없다. -> 언어의 달콤함에 빠져 꿀통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학자들 비판 깨달음의 분류 - 지적인 깨달음 : 공 사상의 이해, 연기에 의해 변화하며 실체/본질은 없음 - 열반적 깨달음 : 체험으로서의 깨달음,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진정한 깨달음 ~> 선불교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논의'를 하므로 모순!
이런 의문은 수준을 고려하지 않아서 나오는 것이라 봅니다. 일단 깨달을려면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소위 에고인데 그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결국에는 깨달으려는 욕망도 버려야 합니다. 언어적 가르침도 마찮가지죠. 초반에는 많이 들어서 채워야 합니다. 왜냐면 그래야 방향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비워내야 하죠. 궁극의 진리는 형상이 없는데 언어는 자동적으로 어떤 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과정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과 끝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근데 그런 과정과 수준을 무시하고 본다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다시 한번 보아도 명쾌한 정리에 감동입니다. 첨언이지만 붓다의 육성(아마 일부만)을 기록했다는 니까야를 보면 깨달음보다는 '해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며 비교적 명확한 언어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니까야를 보면 선에서 말하는 순간적인 깨달음(뭐라 부르든)은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의 성취에 가깝고 이를 비판하고 극복했다는 붓다는 해탈을 수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가 사라졌고(삼애에 들었을 때나 삼매에서 나왔을 때나)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역시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스스로는(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요. 중국에서 만들어진 선불교보다 오히려 기원전 6세기의 붓다가 '해탈'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승비불설은 이미 불교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으로의 발전이라고 억지를 부리지요. 대승은 브라만교이고 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짝퉁이라는 주장이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들립니다.
예전 말을 통한 깨달음은 방편이라 들은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철학적 논의대상으로 삼으니 또 새롭네요.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제 짧은 지식으로는 언어의 단계에서 깨달음에 대한 배척은 원효가 주장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러한 주장이 원시불교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좋은 영상과 내용 항상 감사드립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저도 나름 고민해 보았던 문제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정리본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논쟁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논쟁이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 요소는 바로 수련을 하고 있는 각각의 한명의 수련자 그 개인입니다. 수련을 하는 것은 결국 한명의 사람이므로 이 존재를 빼놓고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즉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주체는 바로 한명 한명 개인의 수련자가 됩니다.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종 전체를 기준으로보면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그 한명의 수련자가 돈오돈수형의 기질을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돈수가 맞고, 그 수련자가 돈오점수형의 기질을 가졌으면 그 사람에게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다분히 이론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측면을 보았을 때는 돈오돈수형의 인간은, 수련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돈오점수가 맞게 됩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이 자체에만 빠져버리면 오히려 다른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좀더 넓게 보고 다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성과 사고의 틀에 갖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결론은 "둘다 맞다"인데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가 됩니다. 아무튼 아침 일찍부터 좋아하는 내용의 영상을 볼 수 있어 기분 최고입니다. ^^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화이팅입니다 ^^
님의 글이 더 이해를 깊게 해 주네요. 철학적 논의가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왜 스님마다 다른 주장을 하셨는가에 대한 고찰은 의미가 있지요. 사실 저는 깨달음과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같은 수행이라도 깨닫기 전의 수행과 깨달은 후의 수행은 차원이 좀 다른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일반적으로 불교의 패러독스는 전칭명제를 사용하는데서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이 빚어낸다)"라는 화엄의 교설에서 모든 것을 마음이 빚어낸다면 그 마음은 그 모든 것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낳죠. 프레게나 러셀이 부딪친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봅니다. 이런 선불교의 교설은 많습니다. 가령, "개구즉착(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그르친다)" 이렇게 되면 개구즉착 그 발설 자체는 그르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또 "불립문자(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 스스로 문자를 세운 것일까, 아닐까. 선불교의 교설은 기본적으로 이런 패러독스의 구조위에 구축된다고 보는데 그럼 왜 그런 패러독스를 선사들은 사용했을까. 제 생각엔 언어와 사유의 논리를 먹통에 이르게 해서 언어와 사유를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사다리를 걷어찬다'라고 생각했구요. 반가운 테마여서 한 말씀 해봤습니다.
조계종 간화선도 해보고 인도에서 탄트라 싱잉볼 차크라 끌어올린다는 명상,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다 해봤는데요. 위빠사나가 제일 진짜 같습니다. 이쪽이 신비주의가 제일 없고 오로지 호흡과 감각만 관찰하거든요. 미얀마에는 아직도 아라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조계종에 서울대 나오고 명망있는 스님이 하는 간화선 강의도 들어봤는데 속만 터지게 하더군요. 결론은 조주에 물음에 답은 없다는거죠. 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 갖고 모른다 하는게 수행이라는거죠. 성철스님이 하는 말은 대단하지만 그분이 깨달았는지도 의심스럽고, 돈오점수가 더 맞다고 봅니다. 부처님도 자기 부족이 전쟁으로 코끼리에 압사 당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 햌ㅅ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지막 공양에서 설사를 하고 열반에 드셨으니까요. 오로지 흐름만 있을 뿐이지 항번에 깨치고 끝나는건 납득 안가네요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아무리 읽어도 그게 뭔지 모르겠었는데 마음이 달라지고 현실이 변하는걸 체험하고 나서는 그 설명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된다는게 다른점입니다. 그럼 깨달음 이전과 이후의 내가 엄청 다른 사람이냐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다만 이전에 거슬리던 상황들이 스트레스 받던 일들이 더이상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철스님은 현실에 더이상 번뇌가 안나타나므로 완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지눌스님은 번뇌 자체는 계속 나타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그런 상황을 마주보는 일은 계속된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되네요.
저 비트겐슈타인 새끼 말은 그냥 연관 관계적 생각을 포기하겠다는거 아님? 자기 무능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함. 인생을 초자아 없이 살아가겠다고? 그래서 거기가서 꺵판 피우셨나봐. 감정을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감정이 사라지는게 아닌데, 재귀정의 명제나열 자승자박 그 자체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