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보드게임에 "고바야카와"라는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1에서 15까지 쓰여진 카드15장에 칩만 있는 아주 단순한 보드게임인데, 직구를 하면 엄청 비싸더군요. 그냥 숫자만 넣어서 15장의 카드를 만들고, 은행에서 10원짜리 50개쯤 준비하면 아주 재밌는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얼마걸리지 않는데, 마치 기회주의자 고바야카와와 같이 기회를 엿보면서 베팅을 하는 게임이죠. 가끔은 오프라인 보드게임도 필요합니다.
히데요시가 도쿠가와의 옛 영지의 관리 실패 그리고 이에야스의 내정 역량 때문에 에도 외에 무사시, 이즈, 사가미, 고즈케, 가즈사, 시모우사 6개국 완전 지배 + 시모즈케 및 히타치의 일부를 지배함과 동시에 옛 영토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은 거물로 성장한거죠 석고는 250만석 이지만 실제론 더 많았을꺼에요
"이에야스"는 "야망"이란 역사드라마의 주인공이고, 우리나라에도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원작소설도 한국에서 유행했습니다. 다만 임란때 참전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건 침략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임란이후 뒷치기를 할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 있고, 실제 조선정벌에 관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와의 맹약을 어기고 결국은 이간질을 통해 히데요시의 충복들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여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인데, 이에야스의 용인술은 참고할 필요는 있어도 존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 본토에서조차도 상당히 인지도가 낮은 인물입니다.
결과론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에도로 보내버린 게 결정적인 실책이었던 게 비유하자면 오지랍시고 우크라이나로 보내버린 격이었죠. 너무 평야라서 전시에는 방어가 불가능한 지형이라 쓸모 없는 땅이지만 평화시에는 일본에서 손에 꼽는 비옥한 땅이고 수산자원도 지금도 좋은 어장으로 불리는 곳이라 힘을 키우기에는 최적의 땅이었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략에는 밝을 지언정 통찰은 한참 부족하다는 걸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그러니까 앞뒤도 안재보고 명나라를 치느니 하는 계획을 실행하죠.
도쿠가와 가문을 전봉시킨 간토평야는 호조가문이 100년이나 대영주로써 잘 다스린 땅이죠. 호조 가문이 내치를 잘해서 꽤나 평도 좋았구요. 히데요시가 전국통일을 한후 전국에 있는 모든 영주의 분쟁을 금했는데 호조가문이 이걸 어기게 되죠. 분노한 도요토미가 본보기로 호조를 조지려고 하고 호조 또한 당시 결혼 동맹이던 도쿠가와가 도와주면 한번 개겨볼만 하다 판단했는데 웬걸 도쿠가와가 도요토미의 선봉이 되어서 호조를 공격해 멸망 시키게 되죠. 그래서 간토에 있는 호족 세력들 무장 세력들 모두 도쿠가와에 원한이 있는 상태였고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약화를 위해 이 지역으로 전봉 시켰는데 도쿠가와가 간토의 넓은 늪지를 개간하여 간토 120만석 영지를 250만석 땅으로 만들어 버리고 거기다가 이전 영지였던 도카이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으로 성장해 버리죠. 그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걸물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너무 단순히 생각하시는데 전통적으로 다스리던 영지와 지역 이해관계를 버리고 황무지 갈대밭이던 당시 간토로 가라는건 전략적으로나 통찰로도 히데요시가 잘 읽은 거고 그걸 받아 들이고 도쿠가와가 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히데요시의 안목으로는 천하인을 포기하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일이었습니다. 전국시대는 작은 촌락 단위와 가문도 언제 배반하고 협조 안 할까 두려운 시대인데 이미 잘 정돈해 놓은 지역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에요. 더군다나 당시 간토 지방은 호조가가 오래 동안 잘 다스린 지방이라 호조가에 대한 충성이 높았는데 이 호조랑 결혼 동맹까지 맺어 놓고 호조가 히데요시에게 멸망 할 때 지원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통수 치고 가만 있던게 도쿠가와 입니다. 때문에 초기에 도쿠가와가 민심과 지역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히데요시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근데 도쿠가와가 그걸 다 극복하고 성공한 거죠. 장기적 투자, 개척이 힘든 전국시대 라는걸 감안하면 도쿠가와가 대단한거지 히데요시의 안목이 틀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토, 나라, 오사카가 있는 긴키지방이 일본의 중심이었고, 아이치현(토카이), 츄고쿠, 호쿠리쿠 지방까지는 긴키랑 가까워서 변방은 아니었음. 그런데 간토는 긴키지방에서 해안으로 가면 평지 위주로 갈 수 있다고는 하나 상당히 멀고 먼 까닭에 발달 되지않은 변방있었음. 그리고 간토 하류는 큰 강이 엄청 많고 저지대라 범람이 잦았음. 결론 그래서 도쿠가와를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촌구석 변방으로 보낸거임. 통찰이 부족했다고 말하기는 그 당시 사람 입장에서는 말하기 힘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관련해서는 오카야마성도 관련이 있습니다. 토요토미가의 우키다 히에이에는 임진왜란 때 총대장으로 우리나라 침공했지만 행주산성에서 크게 부상을 당합니다. 이 사람이 오카야마의 다이묘였는데 세키가하라에서 토요토미측의 서군으로 참가했으나 도쿠가와의 동군에 대패하고, 동군 승리의 결정적인 인물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오카야마 성주가 됩니다.이 양반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양자였으나, 토요토미한테 후계자가 생겨서 찬밥이 되고, 후에 울산전투 관련해 좌천이 됩니다. 이 양반이 여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우키다 히데이에의 영지인 오카야마 성을 본인이 차지하게 됩니다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2년 후, 1602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허무하게도 자손이 없었던 관계로 이케다 다다쓰구가 오카야마가 번주가 되어버립니다. 오카야마성 나중에 가시면, 이거 관련해서 간단히 영화(?)로 보여주기도 하더라구요, 우리나라와 악연이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보내고 최후가 어땠는지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참고로, 오카야마 성도 2차대전에 미군 공습으로 소실되었다가 콘크리트로 재건했습니다
@@user-rf6fi2zh2c 이건 무게감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를 말하는거고 이런 역사 공부는 한국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에서 이미 했어야 정상이란 생각은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독일인이 싫어할까봐 독일인 앞에서 2차세계대전 얘기 안한다는 소리들어본적은 있냐? 말같지도 않은 소릴 하네 부끄러운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