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99009 정말 웃기는 게 뭔지 알아? 결국, 님이 생각하는 광해가 폭군인 이유를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는 거지. 그야말로, 광해군을 올바르게 평가해보자라는 말 자체를, 오로지 식민사관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매도하는 의도밖에 없어. "이런 상황에서 만일 명의 편도 안 들었는데 후금이 갑자기 조선 처들어오면?" 이런 가정 할 거면, 반대로 '명의 편 안 들어서 후금이 조선 안 쳐들어왔으면?' 이런 가정도 해야 정상 아님? 결국 명 편 들다가 처발리고 머리 박았는데, 이런 논리로 쉴드를 치고 있는 건 대체 뭐지...? 명 편 들어서 처발리고 머리 박으나, 안 들어서 처발리고 머리 박으나, 뭐가 다른데? 그리고, 역사를 똑바로 알아야지 그냥 연수로 비교하네. 100년이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중국에서 100년 넘은 나라가 별로 없거든. 맨날 쪼개져서 지들끼리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다가 결국 북쪽에서 세력 잡은 나라 나오면 처발리는 게 한족 전통인 거 모름? 요, 금, 원, 요렇게 세 나라가 후금(청) 이전에 북쪽 통일 세력인데, 이 중에서 중국 쑥대밭 못 만든 나라 있음? 무슨 만리장성 드립을 치고 있어. 언제냐의 문제일 뿐 결국 얼마 안가 처발리고 시들시들하다가 망했는데. 역사서를 봤고 생각이란 걸 병아리 눈물 만큼이라도 할 줄 알면, 후금 북쪽 세력 통일하면 당연히 중국 본토가 쑥대밭 되는 걸 예상해야 사람 아님? 당시 광해군 쫓아낸 명분 때문에 무조건 명 편을 든 당시 관료들은 차라리 이해라도 가는데, 역사가 뻔히 말해주는 결과도 모르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됨? 결국 그 셋의 전통을 따라 청까지 명나라 처발랐는데... 전통이 이어지는 역사를 보고도 딴 소리 하는 사람들 머릿속엔 대체 감정 말고 뭐가 들어있는 거임?
@@sekaempire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사람”에 대해 찬반이 나뉘는 반면에 쿠테타는 “방식” 자체가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기위해선 기존 세력과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무력으로 인한 희생이 반드시 존재하구요. 거기에 박정희, 전두환을 생각해보세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바꿔버렸습니다. 투표 방식도 전 국민이 아닌 체육관 선거로 바꿨구요. 체육관 선거 예를 들면 후보에 문재인과 홍준표가 있는데 선거를 민주당, 또는 국힘당끼리만 체육관에서 투표를 합니다. 뻔한 결과 아닙니까?
@@sekaempire 모든 대통령들도 사람인지라 못하는 면도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나라 역대대통령들은 잘한 점이 있고 못한 점이 있습니당. 완벽 할수는 없죠(문재인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오해는 금물)대깨문은 아닙니당^^ 이상 지나가는 고딩이였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용
각자 본인들이 생각하는 역사관에 따라 광해군이 명군이냐 성군이냐 판단하는 것이지, 악의 무리는 또 뭡니까?ㅋ 그 시절 사람들은 이미 다 흙 속으로 들어간지 오래고 지금은 대한민국시대인데, 대체 굳이 광해군 이미지 흠집내서 뭐하게요? 전주이씨종친들과 원수지기라도 한 사람들인가?ㅋ 인터넷에서 제발 이런 유치한 음모론 좀 안보면 안되나?
황 선생님의 말씀 100 퍼센트 공감합니다... ㅠㅠㅠ 이 유튜버 중에도 있어요. 분명히 광해군을 까내리는 새끼들... ㅋ 내가 그 새끼들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게 아니라 황 선생님이라면 그 새끼들 말에 반박을 제대로 해줄텐데... 분명히 이 영상 보고있는 놈들도 있을거에요.. 그 새끼들은 선조를 왜 이렇게 찬양하는지 참... 이해 불가에요.
선생님아니었으면 어디서 이런 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대동법이니, 궁궐 재건이니, 알지 못하고 살았겠죠. 학창 시절에 공부를 했다고는하나, 겉핣기식이었고, 선생님 강의는 빨려 든 답니다.^^ 맞아요. 광해군이 인내심이 아주 강한 군주라 하셨죠. 우리네 지금의 각자의 삶도 어렸을 적 영향이 바탕이 되어 살아내고 있는거라 볼때, 폭군이 아니었다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오늘도 광해군에 대한 열렬한 황 샘의 강의 감동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며 애민사상에 기반한 용감한 개혁군주 광해군! 늦게나마 새로운 재평가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더 나아가 중국으로 부터 왕으로 책봉되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군에서 왕으로 개칭해야된다고 봅니다. 이게 후손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 자주국가로서 아직까지 옛 명나라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수치. 우리가 스스로가 주체가 돼야지요.
이시대의 정치인들도 황현필선생님 영상 꼭 보고 반성해야합니다 민주당과 국힘당이 서로 못잡아 먹어서 대치하는 꼴이 선조때 당파싸움으로 나라 말아먹던 상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거 같습니다 광해군처럼 미중 사이에서 실리외교로 또 대동법같은 개혁책으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정치 (이당이니 저당이니 보수니 진보니 싸우지말고) 보여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user-tp1uk7hl2h 북인의 주도하에 실록이 편찬되어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며 서인 주도하에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현종실록은 남인의 주도로 편찬되어 남인에 대해 불리하면 빼거나 일부러 잘못되게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서인들이 주장해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을 다시 만들 정도로 조선 당대에도 실록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파적 입장에 따라 하나의 사건도 180도 다른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폐위당하고 몰살당하다시피한 북인들의 목소리를 1도 담지 않고 서인들의 일방적 서술의 결과물인 광해군일기를 액면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서인들의 내로남불 아닌가요? 더군다나 광해군일기는 이괄의 난으로 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사료들인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산실되었습니다. 이는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가 40분의 1도 못된다"는 보고나 "검열 김광현이 시정기와 일기를 강화에 옮겨 두는 임무를 받은 뒤에 미처 실어 나르지 못하여 죄다 산실되었다."는 계사 및 "갑자년 변란 때 많은 문서들이 산일되었는데, 춘추관 서리 홍덕린이 광해군대 시정기 75권과 승정원일기 26권 등을 겨우 건져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찬수청을 설치하고 일기 편찬의 기초 사료들이 유실된 상황에서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이처럼 다른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를 중심으로 편찬하지 못하고 사대부가의 개인 야사와 문집까지 동원해서 광해군일기를 부실하게 완성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 엄청힘들죠 만약 광해군을 복위시킨다면 광해군일기를 실록으로 바꾸어야 하고 그리고 고지식한사학가분들이 가만있을리 있나요 역사가 바뀐다고 반대하겠죠 그리고 문화재청에선 귀찮으니깐 그런일은 하지도않을것이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승락도 안할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인조대왕후손인 현재 고종황제후손분들과 소현세자파 인평대군파 숭선군파 낙선군파 는 반정의가문으로 안좋게 남는건데 당연 심하게 반대하겠죠 그리고 (광해군 후손은 없구요) 순종황제때 광해군을 복위시켰어야했는데 그때는 일본식민통치에 있었고 고종이나 순종도 인조 3째아들 인평대군 후손인데 광해군은 생각도 안했을꺼에요... 임진왜란때 고생만하다가 선조인 아버지한테 미움받고 나중엔 귀양가서 아들하고 부인 며느리 먼저 보내고 귀양살이 15년간하고 정말조선에 있어서는 정말 아까운 왕입니다 ...
무슨 역사수정주의도 아니고, 과거의 역사는 그대로 놔두고 더욱 정확한 사료를 발굴하면서 그에 따라 각자 평가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조선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뭔 광해를 왕으로 복권시킵니까? 현대의 판단에 따라 역사를 바로잡느니 수정하느니 하는건 일본극우나 중국, 북한 공산국가들이나 하는 미개한 짓입니다. 역사가 무슨 못생긴 부분은 깎고 색칠해서 예쁘게 완성시키는 미술품인줄 아십니까?
@@user-mp9co3pk9s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광해군에 대한 공식 평가입니다. 너무 길어서 결론 부분만 적습니다. (중략) 왕조 개창 이래 왕도(王道)와 덕치(德治)를 최고의 정치 덕목으로 인식하고 그 실천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국왕의 당연한 임무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추대한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그 상식의 바탕을 이루는 효(孝)를 정면으로 거슬러 패륜을 자행하였다는 것으로 몰아붙여 이를 빌미로 정권을 쟁취한 후에는 반정의 명분을 기정사실화하고 광해군 시대의 정치를 깎아내렸다. 그렇지만 반정세력과 집권 서인(西人)의 시각에서 벗어나 광해군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이후 역사 전개를 살펴볼 때 그들이 행한 광해군의 평가가 반드시 정당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시대에 집권한 북인세력(北人勢力)과 당시 소외되어 있던 서인 정파간의 갈등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는 만큼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두고 역사를 보려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 광해군 시대의 정치가 새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재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krauskim7662 중2역사에 나오는데요. 그건 어쩔수 없는 거였습니다. 세자가 어리면 당연히 힘을 못쓰고 휘둘릴텐데 그럼 세도정치때 처럼 나라가 개판이 됩니다. 또한 태종이라는 호칭은 나라를 개국한 만큼 업적을 많이 쌓아 붙여진 호칭입니다. 그리고 태종또한 업적이 과장해서 세종과 비슷할 정도 입니다. 6조 직계제를 하여 의정부의 힘을 약하 시키고 문하부를 혁파할때 산하 하급 관료인 낭사들을 사간원으로 독립 시켜 자유롭게 대신들을 비판 할수 있게 하였습니다.또한 양전과 호구 수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흔히 배우는 사병을 혁파 시켰습니다. 한국사에도 많이 나오는 동양에서 가장오래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드셨고 노비 안건법을 실행하여 억울하게 노비가된 사람들을 해방 시켜주었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활자를 주조하던 당담관청으로 주소자를 설립하여 계미자(1403년)를 주조 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마도 정벌은 세종 업적이지만 강행 시킨 분 또한 태종이십니다. 세종이 왕이 되었을때 모든 권한은 주었지만 군사를 통제 할수 있는 권한만큼은 주지 않았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강행을 할수 있었고요. 여담이지만 상왕인 정종하고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하 저가 알고 있는 짧은 지식이었습니다. 고1이라 미숙한 부분이 존재 하지만 저가 알고있는 최선의 선까지 적어봤습니다. 틀렸다면 틀린 부분을 이야기 해주세요^^~~ 그럼 좋은 하루되세요.♡♡
@@user-kp5zz8qb2h 그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문제 일으키는거는 많은 후폭풍을 나았고요. 집안 개박살내고 왕가의 정치잠여 배제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반자인 처가를 완전 배제 사실 이 두축은 문제도 많이 일으키지만 왕의 가장 큰 후원자이며 동반자입니다. 이런 세력을 배척했으니 조선시대 내내 왕은 외로운 싸움을 했던거고 결국 신하들에게 휘둘리게 되죠. 거기다 왕권강화에 미쳐 신하들과 완전 대립각을 세움. 건국초기에 이미 왕과 신하를 정적관계로 만들어 버림 이게 태종의 업적? 입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조선은 이미 태종이 막장을 만들었고 연산군이 완성시키면서 성장동력을 상실했습니다. 연산군 이후 조선은 망했어야 근데 그 빌어먹을 충효의 유교로 세뇌를 시켜 500년간 말 그대로 연명을 했죠.
@@krauskim7662 차라리 태종의 문제가 아닌 성종의 문제로 가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성종의 문제로 최악의 연산군이 되었으니 태종은 관련이 없죠. 증조뻘 되는데 이런 희대의 망나니가 나올줄은 몰랐겠죠. 저도 그 연산군 이후 나라가 바꿔야되는다는 것에는 동의 합니다. 연산군이 만든 악습을 그대로 들고가 조선이 서서히 병들기 시작했죠.ㅎㅎ 좋은 저녁되세요~~^^(뜬금없지만)
주지용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선조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북인의 주도하에 실록이 편찬되어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며 서인 주도하에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합니다. 현종실록은 남인의 주도로 편찬되어 남인에 대해 불리하면 빼거나 일부러 잘못되게 기록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서인들이 주장해서 정권을 잡자 현종실록을 다시 만들 정도로 조선 당대에도 실록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polarishosi7290 [인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일기]의 신뢰도는 10% 미만의 기록물일 수도 있습니다. [광해군일기]는 일반 실록하고 차원이 다릅니다. 오죽하면 [광해군일기]를 국역한 학자께서 기록을 그대로 믿지말고 사료 검증부터하라는 매뉴얼을 남겼을까요. 인조실록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이 쑥대밭이 된 후 좌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 (중략) 《광해일기(光海日記)》와 《시정기(時政記)》는 거의 다 없어졌는데 상금을 주어 찾은 숫자는 10분의 1일도 못됩니다." 하였다. 1. 이괄의 난으로 초초본의 기초사료(승정원일기, 시정기)의 90% 이상 산실 2. 다른 실록과는 다르게 턱없이 부족한 초초본을 메우기 위해 사대부가에 소장하고 있는 일기, 장소, 조보, 야사 및 문집 등을 수집하여 편찬 3. 인조반정에 의하여 집권한 서인에 의하여 광해군일기가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이 상당 부분 작용하였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함 그러므로 "[광해군일기]는 사료 비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라고 [광해군일기]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국역한 역사학자이자 한문학자인 임승표 박사님께서도 각별한 주의를 요청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역사학자들은 승자의 일방적 기록 [광해군일기]를 맹신하며, 반정세력들의 논리를 그대로 ‘Ctrl+C’하면 진정한 역사가라 할 수 있을까요?
대동법은 의미상으로는 좋은법 이었으나 결론적으로 지주들은 기름진 토지에서 나는 생산량과 골담논 토지생산량에 같은 세금을 부과하면서 조선후기 대동법으로 인해 양민세력이 무너지는 결과가 됩니다. 강남아파트와 지방아파트에 평수가 같다고 같은 세금을 묻는것이 대동법이지요. 결국 대동법은 결과론적으로 서민에게는 악법이요 조선을 망친 대동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