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영이라는 인물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야사와 상상력을 더하신 부분이 있겠지만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네요~!! 정사가 아니더라도 우선은 몰랐던 역사적 인물들에대해 더 알고싶다는 마음이 들게하는것도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인것 같습니다~!! 팩스토리덕분에 더 알고싶은 인물들이 많아지고 공부하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user-zo6sl2zt1m 공식 역사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완전 허구의 인물은 아니지 않나요? "보장왕 1년(642년) 왕이 교서를 내려 연수영을 석성도사로 삼자, 연수영은 당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5000명의 수군을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을 건조하였다. 그녀는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으로,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들의 신망을 받았다. 645년 마침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와 전쟁이 일어나자 연수영은 그해 6월 당나라 군대의 해상기지인 창려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나라 군사가 2만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전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 군주 겸 모달(장군급)로 승진했다." “이 기록은 고구려의 영토였던 석성, 비사성, 건안성, 오고성 등지에서 발견된 비석문 등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 라고 합니다만…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아시는분은 알려주세요!
@@user-zs7ss1xz7m 연수연은 가상의 인물이구요(고구려엔. 신라의. 화랑도. 보다. 드 더욱 강한. 조의 라는. 막강한. 특수 부대가. 있섰지요? 연개소문사망후.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함. 해설때. 같이. 같지요ᆢ그후당나라. 무술이. 조의를 이어 받아 최고의 무예가. 되지요ᆢ
이거 빠져니갈 수가 없네요~ 계속 듣게 되는 홀릭~!! ㅎ 연수영 이런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니… 그럼에도 tv나 다른 곳에서는 못들어본 이름.. 갠적으로 비유하건대, 초한지의 소하에 견줄만 하다. 이세민 황제도 나라를 다 떠나서 대단한 인물인건 사실이다. 계책도 쓸줄 알고 사람들의 마음도 얻을 줄 알고 이런 점을 배울만 하다. 의자왕도 왕비 죽기전까지는 정책 잘 했다고… 김춘추가 무서운 것 하나… 복수에 대한 집념!!!!
아 고구려! 2천년전 세계 최강국 !!! 함석헌은 고구려의 멸망은 뼈를 깍고 땅을 치고 통곡해도 민족사의 돌이킬 수 없는 슬픈 통한의 역사!!! 이로서 한민족의 무대는 한반도로 또다시 그 반 쪽으로! 그러나 21c 세계 최강국 대한민국!!! 문화 기술 경제산업대국!!! 통일과 고구려 옛고토 회복하여 중국에 고구려 재창건!!!!!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사실 영류왕도 수당 전쟁 영웅 출신이고 10년 넘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걸 봤으니 그런자의 평화 스탠스는 분명히 이해는 갑니다. 실제로 천리장성 축조도 명했고 당건국 초반에 평화를 통한 국력 회복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침략 명분도 틀어막고 회복에는 화평이 필요하니까요. 다만, 당태종 즉위 후에는 귀족들과의 줄다리기랑 같이 고려하다가 너무 저자세가 되어서..... 굳이 안 해도 될 행동까지
안시성주가 쏜 화살에 애꾸가 되는 게 일단은 맞는데,(왜냐면 실제 안시성 전투 때 연개소문이 안시성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세민이 애꾸가 된 내용 자체가 당시의 역사 기록에선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고 조선시대에 가서야 그 때 이랬다더라 하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sbs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1회에서는 연출상 연개소문이 언월도를 이세민을 향해 치켜들며 세민아~~라고 일갈할 때 화살이 날아가 이세민의 눈에 박히도록 연출이 되어 마치 연개소문이 쏜 화살에 이세민이 애꾸가 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나중에 88회 때는 안시성주가 활을 쏜 것이 이세민의 눈에 박히는 것으로 연출이 된 걸로 보아, 1회의 장면은 아마 연개소문이 언월도를 치켜들고 일갈하고 있을 때 그 뒤에서 안시성주가 이세민을 향해 화살을 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user-ms6bx8ps4c 역사서를 파고 들수록 민족의 반역자라는 김유신.김춘추에 대한 단점이라고 찿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흔적만 나타나는 반면 연개소문은 반역질과 고구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 제공및 제대로된 공적 보다는 대부분 신채호에 의한 거품에 쌓인 만들어진 공적일뿐 그것을 걷어내니 비겁함과 잔인한 독재자의 면모만 뚜렷하게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알려진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이외 다른 공적이 나타나는 역사서가 없기 때문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답니다.
@@f-killer7537 답변 감사합니다. 두 가지 더 질문해도 될까요, 영류왕과 친당파가 화친을 추구한 이유는 이해하지만 외교적으로 잘한거라고 보긴 어려운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하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연개소문은 어떻게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능력적인 측면에서요
@@user-ms6bx8ps4c 영류왕을 친당파라기 보다는 현실파죠..그는 고수전쟁을 직접 경험한 장수로써 활약했기때문에 중국의 국력을 체험한 끔찍한 경험을 가진 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수나라가 망하고 수를이어 중국을 통일한 전투력이 최고조에 이른 신흥강국 당나라의 위력을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최대한 당나라에 빌미를 잡히지 않도록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당나라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굴복하면서 고수전쟁에서 약화된 국력회복에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여서 연개소문빠들 처럼 영류왕에게 친당파의 프래임을 씌우지 않고 최대한 사서들과 당시 주변상황을 고려하여 영류왕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나라 전쟁에서 해군을 이끌고 승리를 이끌었던 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겁쟁이가 되어 친당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수전쟁 영웅들을 반역으로 도륙시켜 당태종의 침략을 불러들여 고구려를 전쟁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만고역적 독재자 연개소문이 어찌 을지문덕과 이순신의 반열에 끼워 넣는거죠? 솔직히 개소문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가 고작 신라성 2개 빼았은 것과 당태종이 직접 지휘한 1차 고당전쟁시는 평양성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안보였고 2차 고당전쟁시 대총관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해도 감히 직접 나서지 못하다가 등급이 한창 낮은 겨우 총관급 방효태군이나 상대하여 사수전투에서 전멸 시킨것 말고는 죄다 수만명씩 고구려 군사들이 도륙당하는 병신짓 을 했는데 그런 위인을 3대장에 끼워 넣은 것이 신기하네요...ㅋㅋㅋ 그것도 악착 같은 방효태 결사대와 싸우다가 화살에 똥꼬를 맞았는지 사수전투 이후 사망소식 전해지기 전까지 역사기록에서 사라진 역신에 불과함.
@@f-killer7537 동부대신 아들 연개소문이 막리지 이어받은 뒤에 정변을 일으키며 귀족 100여명을 죽였다한들 나머지 고씨들이 정변에 대한 카운터로 근왕군을 일으키지 않았을까요? 귀족사회가 고건무 영류태왕보다 동부대표 막리지 연개소문을 지지한거죠. 전쟁이 일상인 귀족연합 고대국가에서 영류태왕 일파가 한 짓이 아무리 미화해도 민족반역 아닌가요. 사대주의 성리학에 입각해 해석하면 답 안나오죠. 성리학이 목숨 지켜준답니까. 당시 귀족들은 방패 대표로 고건무 대신 연개소문을 택한겁니다. 고건무는 지도를 줬으니. 조선시대 같았으면 고건무가 시해되었을때 고씨들이 연합하고 근왕군을 일으켰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네요.
노no 그건 님의 뇌내망상 고구려가 망했지만 당나라는 고구려땅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이내 발해가 고구려땅을 대부분 흡수했고 발해 무왕때는 고구려 전성기 보다도 더 국력이 높았는데도 쫄닥 망했습니다..동방의 별은 커녕 오히려 신라때문에 한민족이 비로소 만들지기 시작했어요...이후 우리가 발해땅 간도땅 되찾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초강대국이 되어 후손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론에는 찬성
북방지역들이 단합도 안되고 끊임없이 전쟁으로 망하고 생기기를 한지라, 고구려도 내분이 워낙 컸던지라 1500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거고 거란, 여진처럼 중국에 흡수되어버렸을수도 있지. 아쉽긴 하지만 신라가 나당전쟁까지 승리해 당나라마저 몰아내고 고구려유민들, 발해유민들까지 흡수해서 고구려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것이 크다고 본다
영류왕도 딱히 연개소문과 비교할 때 외교정책을 잘했다 볼 수 없음. 그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반드시 멸망시켜 버려야 할 나라로 생각했음. 그런데 영류왕은 당에 대한 저자세의 일환으로 봉역도까지 갖다 바침. 비유하자면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는 강도에게 알아서 자기집 위치, 현관 비번, 금고 비번까지 알려주는 꼴. 저때 봉역도에는 고구려의 지리정보 등 모든 기밀이 담겨있었음. 기록에 보면 천리장성 축조 등 나름 당에 대한 대비도 했지만, 차라리 강경일변도의 외교책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책이 너무 지나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