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어머니가 68년생이신데 저희 어머니 집에는 당시에는 거의 노비처럼 집안일 해주시는 분들이 4~5분 정도 게셨다고 하더라구요.......... 노비는 무슨 조선시대 때나 있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 그 집안일 해주시는 분들이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는데도 초등학생 정도 되는 당시 울 어머니한테 아가씨 아가씨 하고 존대하면서 절하고 그랬다고 하셨음...
연애결혼, 일부일처제 이런 개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죠... 몽골이나 중동 유목민족들에게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취하는 형사취수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부인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구요. 혹독한 환경에서 형수와 그 자식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도덕이라는 것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받아들여지기 나름일 뿐이죠...
증조할아버지가 당시 군수였는데 본처 하나에 첩 네명까지 있었다고 들었음. 첩들이 야금야금 돈 빼가서 나중엔 집 빼고 남은게 없었다던 썰을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그 중에서도 노련한 첩들은 돈 다 빼가서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시고도 알아서 팔자폈는데 좀 어리고 가난한 첩은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쫓겨나서 살데가 없어서 냇가 건너편에 창고 같은 곳에서 살다가 추운날에 얼어 죽었다고 들었음
우리집 썰을 좀 풀어보자면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 이야긴데, 외할머니가 첩임. 근데 엄마한테 얘기 들어보면 집에서도 처인 외할머니의 자식하고 첩의 자식하고 차별이 심했던것 같음. 본처 자식새끼들이 첩의 자식인 엄마랑 외삼촌을 무슨 노비 부리듯이 못살게 굴었다고. 서로가 그냥 정이 1도 없었음. 본처네 자식새끼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본적도 들은적도 없고, 그냥 외할아버지 얘기 나온 겸사겸사 나온 얘기임. 암튼 그러다가 외할배가 사업 거하게 말아먹고, 우리 외할머니가 식당일 하면서 본인 자식들 키웠다 들었음. 본처하고 본처 자식들은 뭐 사업이 망했어도 어떻게 굶기지는 않았나봄. 그게 아니라면 외할배가 우리 외할머니 오토 돌리듯이 돈벌어오게 시키고 집안 공동의 살림 비용으로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찌됐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를 들어보면 본처의 자식들은 첩의 자식인 우리 엄마와 외삼촌에게 대놓고 선민의식같은게 있었던 것 같음. 훗날(대충 198X~199X년 쯤) 본처 자식들이 자기 아빠(외할배)가 노쇠해서 기력이 없는데 그걸 차에 감금하고 재산상속 자기네 앞으로 돌리라고 며칠을 밥도 안주고 드라이브 뺑뺑돌리면서 협박을 해서 본가 명의이전 받아냈었다더라. 그리고는 외할배고 외할매고 다 내쫓아서 나앉은 와중에 외할배 병수발은 우리 외할머니네가 다 보고 나와서 살았다고 하더라고. 다행히 외삼촌이 어느정도 성공을 해서 터전을 일궈놓으셨어가지고 다 죽어가는 외할배 임종까지 모셨었다 함. 의외로 흑자썰 정도 되면 상위 10%의 오손도손이 아닐까 싶네 ㅋㅋ 우리 윗세대 집안썰은 무슨 매드맥스인데 ㅋㅋ
친구 할머니썰... 남편이 잘생기고 연하에 돈많은 한량. 여자들 너무 많아서 해탈지경. 본처였던 할머니 어느날 남편이 엄청 젊고 어린여자 집에 데려다 놓고 며칠 어디 일인지 뭔지 출타. 할머니가 보니까 젊은여자애가 너무 아까워서 밥해주며 살살달래서 여기있으면 신세조진다고 도망가라고 용돈까지 집어주며 보내기도 했다함... 그런시대였다. 그친구네 친지들 인물들은 출중한데 족보가 되게 어지럽고 인생들이 많이 꼬이더라.
@@user-te5un8by5t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 공정하지 못한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를 과거 신분제사회와 비교 하면서 살기 좋다고 말씀하신다면 발전과 개선은 필요 더 없지요~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살기 좋으니까요~ 근데 지금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현재 부조리를 과거에 못하던 시절과 비쿄하며 희석하는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저희 친할아버지도 부인이 2명이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건 고3이었는데 대학 수시원서 작성하면서 가족관계증명서 제출해야되기에 서류를 봤는데, 전혀 모르는 분이 할머니 쪽에 기재되어 있더라구요. 처음에 저희 어머니는 보고 당황하셔서(할머니까지 서류에 나오는 줄 모르셨어서) 급하게 뒤로 정리해버리길래 뭐지했었던. 굳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기에 말 안하고 있었다네요.이미 돌아가신 분 연애사는 뭐...딱히 그러려니 해서 넘어갔던 일화가 있었습니다.
저도 80년대 생인데, 90년대 초반에는 설날때 시골 본가에 내려가면 친가쪽 가족이 30명은 모였었습니다. 세배 한바귀 돌면 초등때 20-30만원 수금은 일도 아니였죠. IMF 오기전까지는 성실하게만 일해도 누구나 부유하게 살던 시절이라.. 장손이라 가끔 명절때 시골 본가 가긴 하는데, 지금은 모여봤자 5명도 안되네요. 친척, 사촌형누나 동생들 대부분 결혼을 안 한것도 있고, 작은 아버지분들도 많이 돌아가시고.. 집안에 다들 공부 머리가 없어서 고졸이 많은데, 할어버지의 첩의 아들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90년대 당시 대학교수셨습니다. 엣날 이야기 들어보니 어릴적에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들한테 많이 두들겨 맞고, 첩 자식이라고 불쌍하게 자랐다고 하더라구요. 출생의 아픔때문에 이악물고 공부해서 교수님이 되었고, 그 후에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들이 함부로 못 대했다는 썰... ㅋㅋㅋ
이거 먼얘기인줄아는데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배우면서 아파트설계도에 가장 특이한점 두가지가 있었음 하나는 장독대를 위한 베란다이고 나머지는 부엌뒤에 있는 정체불명의 공간임 이는 식모방인데 당시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소녀들을 도시에 데려와서 하녀로 쓰는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었음 당시 샐러리맨의 10%~20%의 임금을 받고 일했는데 먼시골땅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다른 연줄도 없는 어린소녀들은 손쉬운 먹잇감이었고 심하면 한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상대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함